미국 박사과정 진학을 위한 학업계획서(SOP) 쓰는 법
학업계획서와 자기소개서는 같지 않습니다
『대학사용법』에 수록된 팁의 일부입니다. 약간의 편집을 가했기 때문에 책의 내용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미국 박사과정 진학을 위한 학업계획서(SOP) 쓰는 법
미국의 우수한 박사과정 프로그램은 등록금과 건강보험을 학교가 대신 내줄 뿐만 아니라, 일정한 조건(연구조교나 강의조교로 일하는 것)을 충족하면 매달 생활비(stipend)까지 지급한다. 우리 학과 같은 경우도 5년 풀펀딩을 보장합니다.
저는 미국 박사 유학시에 한국의 고등교육재단(KFAS)과 UC 버클리로부터 모두 재정 지원을 받습니다. 6년 학교를 다니면서 (원래 5년차에 졸업하려고 했는데 코비드-19 때문에…) 한 번도 제 주머니에서 등록금, 보험료를 낸 적이 없습니다.1 이와 같은 지원이 없었다면 넉넉하지 않은 가정 형편에서 미국 박사 유학은 꿈에도 생각하기 어려웠습니다. 저는 그래서 학부를 마치고 회사에 갔다가 박사로 바로 유학을 오게 된 경우에요.
하지만 제가 진학할 때도 박사 유학이 쉽지 않았고, 요즘은 더 어려워 졌으니 준비를 정말 잘 하셔야 합니다.
미국 대학원에 지원할 때는 여러 종류의 서류를 제출하게 됩니다. 아래는 그 대략적인 목록입니다.
학업 성취도: 학부 성적, 영어 능력 시험 성적(토플 등), 대학원 수학 자격시험(GRE) 성적
추천서: 보통 교수, 최소한 박사 학위 소지자에게 받습니다
대표 글쓰기 자료 (writing sample): 연구 역량을 보여주는 논문이나 기말 보고서2
학업계획서(Statement of Purpose, “무엇을 왜, 연구하고 싶은가?”): SOP는 내가 왜 이 분야를 연구하고 싶은지, 어떤 문제를 풀고 싶은지, 그리고 어떤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문서입니다. 이 문서는 필수입니다.
자기소개서 (Personal Statement, “나는 어떤 삶을 살아왔고, 왜 이 진로를 택했는가?”): PS는 학문적 관심보다는, 개인의 성장 과정, 사회적 환경의 극복 경험, 커뮤니티에 기여했던 경험 등 보다 인간적인 서사에 중심을 둡니다. 특히 이 문서에서 진학 동기를 사회적 배경(예: 저소득층, 이민자, 여성, 지역 불균형, 교육 기회의 차이 등)이나 공공을 위한 활동 경험과 연결시킬 수 있습니다. SOP와 달리 PS는 학교와 학과에 따라서 꼭 필수는 아니다.
이 중에서 학부 성적이나 영어 시험 성적 등은 기본적인 학업 역량을 증명하는 데 쓰인다. 어느 정도의 기준선(물론, 상위권 학교일 수록 이 기준선은 높습니다)을 넘었는지 확인하기 위한 참고 자료일 뿐이다. 학부 성적은 박사 진학할 때가 되면 이미 어쩔 수 없는 것이고 (그리고 평점뿐 아니라 어떤 강의를 들었는 지도 본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영어 시험 성적은 보통 겨울에 원서를 내니 전 아무리 늦어도 여름까지 끝내기를 권합니다. 유학 갈 때도 그렇고, 그 이후에도 그렇고 한국 학생들끼리 경쟁하는 것이 아니에요. 지원자의 주류인 미국 학생들이 여름 이후에는 온전히 SOP와 writing sample을 개선하는 데 시간을 쓸텐데, 이때 영어 시험 성적을 준비해서는 경쟁력이 떨어집니다.
추천서나 대표 논문은 심사위원이 해당 지원자가 대학원에 와서 연구를 잘 할 수 있을지를 가늠하는 데 아주 중요한 문서입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크게 바꾸기는 쉽지 않습니다. (추천서를 잘 받으시려면 성적을 잘 받는 것을 넘어서 오피스 아워를 꼭 가시길 추천합니다.)
이 모든 서류를
(1) 이어주고 설명하는 중심축이자,
(2) 지원자 스스로 자신의 문제의식과 연구계획을 논리적으로 펼쳐낼 수 있는 유일한 글이 바로 SOP입니다.
이 서류는 짧은 기간 안에 바꿀 수 있는 여지도 크다. 따라서 박사 지원 시기인 가을 학기에는 SOP에 정말 많이 집중해야 합니다.
대략적인 입학 심사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담당 교수들이 수백 명의 지원자를 일단 예비 후보군(long list)으로 분류합니다. 그중 일부만을 최종 심사 대상(short list)으로 올립니다. 여기에 올라가야만 실제 인터뷰나 교수 개별 검토가 이뤄지며, 최종 합격 가능성이 생깁니다. 여기서 SOP는 이 관문을 통과할 수 있을지를 결정하는 핵심 문서입니다.
SOP는 ‘자기소개서’가 아닙니다. 사업계획서에 가깝죠. 자신이 어떤 연구자로 성장할 것인지에 대해 논리적으로 설명한 ‘제안서’입니다. 여기서 목적은 설득이고, 따라서 심사위원의 입장에서 잘 읽히는 글이어야 한다. SOP는 나의 지적 사고력, 준비성을 보여줄 뿐 아니라 심사위원의 판단 기준을 고려해 설계해야 합니다.
입학사정위의 심사위원은 누구인가? 미래 동료와 지도교수
SOP를 읽는 사람들은 행정직원이 아닙니다. 심사위원은 (그해 애드미션 커미티에 끌려 들어간) 해당 학과의 교수들입니다. 본인이 진학을 희망하는 프로그램에서 앞으로 연구를 함께할지도 모를 당미래 동료이자 지도교수입니다.
교수들은 성적이나 경력도 보지만, 이것만으로 이 사람이 대학원 트레이닝을 잘 받을 수 있을지, 이후 유망한 연구자가 될지 알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SOP, writing sample, 추천서3 등을 통해서 지원자가 어떤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지, 그 문제를 학문적으로 풀어갈 수 있는 능력과 계획이 있는지, 그리고 본인의 연구 아젠다와 학과의 방향성이 얼마나 잘 맞는지를 살펴봅니다.
SOP의 핵심: ‘상대방의 입장에서 사고하기’
SOP는 자기 생각을 정리하는 글이면서 동시에 타인을 설득하는 글이다. 그렇기 때문에 SOP는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나열하는 글이 아니라, 교수가 어떤 기준으로 나를 평가할지를 고려하여 설계한 글이어야 합니다. 좋은 SOP는 이 기준을 예상하고, 그 기준을 만족시킵니다.
“이 지원자는 어떤 문제에 관심이 있는가?”
“이 문제는 왜 학문적으로 의미가 있는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지원자가 제안한 해결 방식은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한가?”
“이 지원자는 이 문제를 해결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우리 프로그램에서 이 학생을 지도할 수 있는 교수는 누구인가?”
이 질문에 논리적으로, 구체적으로, 그리고 읽기 쉽게 답하는 SOP가 좋은 SOP입니다. 좋은 SOP를 쓰는 정답은 없지만, 이런 요건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대략적으로 다음의 구조와 구성요소를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SOP의 구조와 구성요소
훅(Hook): 내가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
문헌 간극(Gap): 기존 연구에서 해결되지 않은 부분
연구 설계(Design): 이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에 대한 아이디어
자격과 경험(Qualifications): 내가 이 연구를 수행할 수 있는 이유
프로그램과의 적합성(Fit): 이 학교와 이 프로그램이 왜 나에게 필요한가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여기서 개별 요소는 하나의 문단으로 설명합니다.
각 문단을 쓸 때는 핵심 내용을 앞쪽에 배치합니다 (저도 그렇지만 속독을 할 때는 첫 문장만 흝어 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영어에서는 첫 문장이 주제 문장이어야 하거든요).
교수들은 수백 개의 SOP를 짧은 시간 안에 읽습니다.
당신이 누구인지, 어떤 문제를 풀고 싶은지, 왜 잘할 수 있는지, 그걸 왜 이 프로그램에서 하고 싶은지를 빠르게 납득시켜야 합니다.
박사 유학 이후의 커리어 팁에 대해서는 이 글에 정리해 놓았습니다.
재정 지원을 잘 해주는 학교에 합격하면 외부 장학금이 꼭 필요하지 않으나 들고 있으면 협상력이 생깁니다. 학교에서 제시하는 연구조교나 강의조교로 일해야 하는 조건을 완화할 수 있습니다.. 제 펀딩 패키지는 한 학기 강의 조교를 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전 운좋게 제가 원하는 강의(전산사회과학)를 조교가 아닌 강사로서, 규모가 작고 행정(채점) 부담이 적은 대학원에서 가르칠 수 있는 기회가 있어서 사실 한 학기보다 더 가르쳤습니다.
사실 기말 보고서로는 많이 부족합니다.
좋은 추천서는 지원자가 연구하려는 바의 가치를 추천인의 언어로 명확하고, 상세하게 설명하는 추천서입니다. 학계에서 연구를 잘 하는 것으로 잘 알려진 분(유명한 것과는 다릅니다)이 이런 추천서를 써 주시면 이것이 강력한 추천서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