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바라보다 보면... 언젠가 눈이 마주치는 순간도 있을까?
***
모른 척 다른 곳을 보고 있던 호시우미의 눈길이 슬쩍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다시 그의 시선을 받은 남자는 아무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태블릿에 열심히 필기 중이었다. 남자의 태블릿 옆엔 전공 서적과 뜯지 않은 샌드위치, 음료가 가지런히 놓였다. 그는 고작 두 테이블 정도 떨어진 거리에 앉아 있었지만 호시우미에겐 지구와 다른 행성의 사이만큼 먼 거리였다.
남자가 전공 책을 뒤적일 때마다 표지에 적힌 이름이 빠르게 시야를 스쳐 지나갔다.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상관은 없다. 호시우미는 남자의 이름을 이미 알고 있었다. 수의학과 3학년 히루가미 사치로. 그는 평일 오후 이 시간이 되면 학생회관 라운지에서 샌드위치나 음료를 구입한 뒤 공부를 한다. 이어폰을 끼고 있을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지만 오늘은 끼지 않았다. 그는 훤칠한 키에 패션 감각이 좋았고, 오늘은 베이지색의 가디건을 걸쳤다. 그리고 바지는 까만 색의... 호시우미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이동하던 중, 히루가미가 꼬고 있던 다리를 반대쪽으로 바꾸었다. 그 움직임에 놀란 호시우미가 후다닥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리고 물고 있던 빨대를 쭈욱 빨아 음료를 들이켰다. 상표를 보지도 않고 아무거나 집어온 음료는 물고 보니 사과 맛이었다. 말라 있던 입 안으로 달짝지근한 사과 향이 퍼졌다.
자세를 바꾼 히루가미는 여전히 태블릿 화면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는 한번 자리에 앉아 필기를 시작하면 최소 삼십 분은 움직이지 않는다. 예외가 있다면 한 번씩 팔을 뻗어 스트레칭을 하거나 앞머리를 매만지는 정도였다. 학관 라운지는 시간대별로 수십 명이 들락날락하지만, 그는 이 소란스러운 곳에서도 마치 혼자만의 공간에 존재하는 것처럼 공부를 하곤 했다. 집중력이라고는 5분도 가지 못해서 쉴 새 없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호시우미와는 달랐다.
그러니. 그 정도로 집중력이 좋으니 벌써 한 달째 저를 지켜보는 시선이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겠지. 덕분에 오늘도 관심도 없는 책을 펴놓고, 시간 가는 줄도 모르며 히루가미의 옆모습을 훔쳐보고 있을 때였다.
“야, 고라이! 여기서 뭐 하냐!”
테이블 반대편에서 들리는 우렁찬 목소리에 호시우미의 얼굴이 파삭 구겨졌다. 짜증 가득한 얼굴로 돌아본 곳엔 과 동기 하쿠바가 샌드위치가 담긴 봉지를 들고 서 있었다.
“책은 무슨 책이냐? 어울리지도 않게!”
“제발 조용히 좀 해.”
호시우미가 윽박지르듯 그를 향해 속삭였다. 진짜 이 자식은 내 삶에 도움이 안 돼. 오늘따라 목소리는 왜 이렇게 큰 거야? 호시우미는 결국 테이블에 올려두었던 책을 팩 집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이긴 했지만 무슨 내용인지는 아직도 모른다. 히루가미 생각을 하느라 한 장도 제대로 집중해서 읽어보지 못했다.
“6시부터 연습경기야. 가서 몸 풀어야 돼.”
“알아. 지금 갈 거야.”
“아 맞다, 고라이. 주말에 뭐하냐? 나 동호회 레슨 나가기로 했는데 레프트 좀 뛰어주라!”
“알았어. 조용히 말해.”
“어, 진짜야! 해주기로 했다!”
“알았으니까 빨리 나가.”
호시우미가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하쿠바의 커다란 등을 밀어냈다. 하쿠바는 라운지 출입구가 이마에 닿진 않을지 걱정이 될 만큼의 거구였다. 어서 빨리 이 크고 시끄러운 친구를 데리고 라운지를 벗어나고 싶었다. 히루가미의 귀에 저의 촌스러운 별명이라든지, 책은 어울리지도 않는다는 둥 이상한 소리가 더 들어가기 전에.
티격태격하던 두 사람의 목소리는 곧 출입문을 지나 라운지 바깥으로 멀어졌다. 소란스러운 대화가 끝나고 나서야 히루가미의 시선이 힐긋 그들이 사라진 곳을 향했다. 몇 초간 머물던 시선은 다시 무심한 듯 태블릿 화면으로 돌아가고 만다.
***
“이러다 진짜 죽겠네.”
정말 답답해 죽어버릴 지경이었다. 때는 시월의 초입을 지나 완연한 가을에 접어들었다. 낮 기온은 선선했지만 운동을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갈 즈음이면 밤바람이 꽤 찼다. 배구를 하며 끌어올린 열기는 진작 식어버렸다. 쌀쌀한 기운에 호시우미는 져지 지퍼를 턱 밑까지 끌어올렸다. 에휴. 저도 모르는 사이 한숨이 새어 나왔다. 터벅터벅 기숙사로 향하는 발걸음에는 영 힘이 없다. 가로등을 등지고 넓은 길을 홀로 차지한 제 그림자가 오늘따라 외로워 보였다.
뭐, 연애에 관심 없다고? 야, 3학년 돼봐라. 그때도 혼자가 좋은가. 선배들이 했던 충고가 유독 뼈에 사무쳤다. 서양의 어느 대문호가 그랬던가. 사랑은 고통일 뿐이라고. 강렬한 사랑은 필연적으로 강렬한 아픔을... 그다음은 뭐더라. 기억이 안 난다. 아무튼. 오직 배구만이 세상의 전부였던 제가 짝사랑을, 그것도 모르는 사람을 이렇게까지 좋아하게 될 줄은 몰랐다. 이 지경이 된 데에는 특별한 계기랄 것도 없었다. 그저 학관 라운지에서 음료를 주문하다 우연히 마주친 그의 눈동자가 필름에 상이 찍히듯 콱 마음에 박혀버렸을 뿐이었다.
히루가미 사치로는 어떤 사람일까.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 건 아닐까? 키도 크고 잘생겼으니 그만큼 주변에 매력적인 사람도 많겠지. 그 탓에 말 한 번 걸어보지도 못하고 끙끙 앓기만 한 기간이 벌써 한 달이었다. 차라리 아는 사람이었다면 고민이 덜했을 텐데. SNS를 건너고 또 건너 알아낸, 그가 아직 애인이 없다는 사실만이 유일한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누굴 좋아한다는 게 원래 이렇게 힘들고 괴로운 거야? 정말 이게 맞는 거냐고. 이 망할 짝사랑을 시작한 뒤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제 생각도, 마음도 더 이상 제 것이 아니었다. 퓨, 다시 한번 깊은 한숨을 내쉰 호시우미가 발 앞에 걸린 돌멩이를 힘껏 걷어찼다. 그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것은 그로부터 몇초 후였다.
툭.
응?
분명 아무도 없는 곳을 향해 걷어찬 돌멩이였는데. 돌멩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어딘가 이상했다. 그의 귀에 들려온 것은 딱딱한 땅을 구르는 소리가 아닌 마치 사람이 맞은 듯한 소리였다. 잠깐만, 사람? 사람이라고...?
거기 사람이 있었어? 화들짝 놀란 호시우미가 고개를 들었다. 언제 나타났는지, 그의 앞엔 검은 머리칼을 지닌 남자가 무표정으로 서 있었다. 남자는 깔끔한 정장을 위아래로 갖춰 입고 돌에 맞은 정강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의 바지 밑단에는 돌멩이가 부딪히며 생긴 듯한 흔적이 남았다.
“죄, 죄송합니다! 사람이 있는 줄 몰랐어요.”
“......”
“혹시 다치셨나요?”
호시우미가 황급히 사과를 하며 물었다. 도대체 언제 내 앞에 사람이 있었지? 그는 방금 전까지도 비둘기 한 마리 없는 밤거리를 혼자 걷고 있었다. 길 위엔 아무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자신 외에 그 누구도 발소리를 내지 않았다. 남자의 등장은 그가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는 것 외에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 다행스럽게도 남자는 돌에 맞았다는 사실에 그다지 개의치 않는 듯 불쾌한 얼굴이 아니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당신, 소원이 뭐예요?”
“에?”
“소원 좀 말해줘요.”
남자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예상 밖의 것이었다. 그는 여전히 호시우미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소원을... 뭐라고? 방금 내가 잘못 들었나? 호시우미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갑자기요?”
“당신의 소원을 들어드리겠습니다.”
어릴 적 동화책에서 몇 번 비슷한 전개를 본 것 같긴 한데... 그럴 땐 보통 요술램프를 줍는다던가, 동물을 구해줬다던가 하지 않아? 이렇게 대뜸 소원을 말하라고? 심지어 내가 찬 돌에 맞기까지 했는데? 앞뒤 설명이라도 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당신 뭔데요?”
“저는 카게야마 토비오인데요.”
“아니, 이름 말고요. 지금 왜 저한테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냐고요. 소원을 들어준다느니.”
“저요? 저는......”
카게야마가 눈동자가 천천히 옆으로 굴러갔다. 그제야 상대방에게 상황을 설명할 필요성에 대해 깨달은 모양이었다. 꿀꺽, 호시우미의 목울대로 크게 침이 넘어갔다.
“저는 요정입니다.”
“에?”
이어진 대답은 더 가관이었다. 요정? 요오오오정? 피터 팬이나 신데렐라에 나오는 그 요정? 신도, 천사도 아니고. 왜 하필 요정이야? 그리고 요정이 뭐 이렇게 사납게 생겼어? 무슨 요정이...... 덩치가 이렇게 크냐고. 손이 솥단지만한데.
의심 가득한 눈길이 카게야마를 위아래로 훑었다. 정장으로 감추긴 했지만 그는 상당한 근육질 체형이었다. 과장하지 않고 거의 현역 운동선수 급에 가까웠다. 호시우미 역시 운동을 했기에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카게야마가 귀 뒤를 벅벅 긁었다.
“방금 속으로 요정이 왜 이렇게 생겼냐고 생각하셨죠?”
“저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당신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어요! 뭐, 요정은 다 손가락만 하고 앙증맞아야 한다는 법 있습니까?”
이게 다 동화작가들 때문입니다! 요정에 대한 천편일률적인 묘사! 이 덩치에 무슨 요정이냐고 맞을 뻔한 적도 있어요, 사기 치지 말라고. 사이비 취급은 아주 일상이에요! 억울함을 토로하는 카게야마의 목소리가 점점 격양되었다. 그 눈빛만은 소년의 것마냥 순수해서 나쁜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알겠어요. 미안합니다, 카게야마 씨. 그러니까... 요정님. 호시우미가 얼른 손을 내저으며 대답했다.
“그러니까, 제가 소원을 말하면 당신이 들어준다는 거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당신은, 그러니까 요정님은 왜 제 소원을 들어주려고 하는 건데요?”
호시우미의 말투가 점점 삐딱해졌다. 상황을 짚어볼수록 이상한 사람과 의미 없는 대화를 반복하는 것만 같았다. 기묘한 일이었다. 평소였다면 미친 놈, 하고 지나갔겠지만 이 순간은 알 수 없는 힘에 발목이 묶인 기분이었다. 이상하게도 실없게만 느껴지는 카게야마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싶었다. 동화에 나오는 마법사처럼 카게야마가 어떤 힘을 써서 저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 실적을 급하게 쌓아야 해서요.”
“음?”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소원을 접수하는 방법도 있긴 한데... 지금 제가 좀 급하거든요. 곧 실적 평가 기간이라.”
사무적으로 대답한 카게야마가 바지 뒷주머니에서 펜슬을 꺼내 들었다. 어느새 그의 손바닥엔 방금 전까지 보이지 않았던 태블릿이 들려 있었다.
“요정이 아이패드를 써요?”
“네. 제가 기억력이 별로 안 좋아서요.”
“아니 그게 아니라. 동화책에서 보면 허공에 깃털로 글씨를 쓴다던가. 유리구슬 같은 걸...”
“어휴, 몇 백 년 전 얘기를. 아무튼, 소원 좀 말해줘요. 당신 소원이 뭐라고요?“
“소원? 나는 그런 거 없는데...”
“지금부터 속이 좀 메스꺼우실 수 있습니다.”
카게야마가 호시우미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서며 말했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나는 소원 같은 거 없어. 순간 호시우미의 입술이 격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카게야마의 말대로 이전에 먹은 것을 전부 게워내 버릴 듯 속이 메스꺼웠다. 보이지 않는 손이 식도를 타고 들어와 내장을 헤집어대는 것 같았다. 이러다 토하겠어! 내가 저녁에 뭘 먹었더라...? 맞다, 반숙 카레. 안돼, 안돼. 그걸 길바닥에 토해버릴 수는 없다. 차라리 입을 다물고 싶었지만, 입술과 턱이 강력한 무언가에 붙들린 것처럼 의지와 정반대로 움직였다.
“...나 토... 토할 것 같...”
“괜찮습니다. 편하게 털어내세요.”
”어윽, 컥. 내... 내 소원은."
“네. 잘하고 계세요.”
“...내... 소원......은.”
히루가미 사치로와 사랑하는 사이가 되게 해주세요.
“쿨럭, 쿨럭.”
허억. 허억. 말을 마친 호시우미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방금 전까지 요동치던 속은 언제 그랬냐는 듯 말끔하게 가라앉았다. 호시우미는 믿기지 않는 눈빛으로 연신 목을 더듬었다. 방금 전 입에서 나온 말이 성대를 거쳐 나온 진짜 목소리인지, 머릿속에 울려 퍼진 마음의 소리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런 호시우미의 상태는 안중에도 없이 카게야마는 태블릿에 무언가를 슥슥 적어 내려갔다.
“좋습니다. 히루가미 사치로 씨와 호시우미 코라이 씨는 곧 사랑하는 사이가 될 겁니다.”
“방금, 방금 저한테 무슨 짓을 한 거예요? 그리고 제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죠?”
“전 다 압니다. 여기 사인 좀 해주시겠습니까?”
카게야마가 호시우미를 향해 태블릿을 내밀었다. 호시우미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패드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화면엔 휘갈겨 쓴 글씨체로 방금 제 입에서 '튀어나온' 소원이 적혀 있었다.
“여기 사인하시면 정식으로 소원이 접수됩니다.”
“......”
“지금 속으로 여기 꼭 사인을 해야 하나 생각하셨죠?“
일종의 책임 서약이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이제 카게야마는 어서 빨리 일을 마치고 집에 가고 싶은 직장인 같은 얼굴이었다. 꿀꺽, 헛공기를 삼킨 호시우미가 카게야마에게 펜슬을 넘겨 받았다. 그러나 사인을 하는 도중에도 미심쩍은 마음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소원이 이루어졌는지는 어떻게 알아요? 당신이 알려줘요?”
“아뇨. 그건 본인이 직접 확인하셔야 하는데요.”
“그 사실을 제가 어떻게 확인해요???”
“그건 뭐... 재량껏.”
“그걸 어떻게 재량껏 확인해요? 그 사람한테 가서 너 나 좋아하냐고 물어볼 순 없잖아요!”
“히루가미 씨도 당신을 좋아하는지 알고 싶으세요? 그럼 히루가미 씨의 마음을 알려달라는 걸로 소원을 수정해야 해요. 소원은 한 사람당 한 가지씩만 접수할 수 있거든요. 수정하실래요?”
“지금 히루가미는 제가 누군지도 몰라요!”
“그럼 굳이 수정하실 필요 없겠네요. 원래 접수한 걸로 하시죠.”
그럼 이렇게 접수하시는 겁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카게야마가 재빨리 악수를 청해왔다. 상대방의 사정이고 뭐고 그는 얼른 마무리를 짓고 싶은 모양이었다. 아직 의문점은 남았지만, 호시우미는 얼떨결에 그가 내미는 손을 잡았다. 정말 이상한 밤이었다.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두 사람의 머리칼이 잔잔하게 흩날렸다. 마법사의 호롱불 같은 보름달이 융단처럼 까만 하늘을 홀로 밝혔다.
***
눈을 떴을 땐 새벽이었다. 창밖에선 새가 지저귀었다. 호시우미는 멍하니 새소리를 듣다 벌떡 일어나 시계를 확인했다. 잠을 깨자마자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어젯밤 일에 대한 기억이었다. 현실이라기엔 너무나도 이상하고, 꿈이라기엔 선연한.
어젯밤 카게야마는 악수를 마치자마자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호시우미는 그 자리에 남아 카게야마가 사라진 방향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가 사라진 곳엔 제 그림자만이 덩그러니 남았고, 호시우미는 무엇에 홀렸다 깬 사람처럼 터덜터덜 기숙사로 돌아와야 했다.
침대에 누웠지만 바로 잠들 수 있을 리 없었다. 밤새 그 이상한 요정과 히루가미에 대해 생각하다 간신히 잠이 들었다. 꽤 깊게 잠을 잔 것 같은데 시계를 보니 잠들었던 시간은 고작 세 시간이다. 아침 러닝 시간에 맞춰두었던 알람도 아직 울리지 않았다. 어젯밤 그 일은 정말 현실이었을까? 소원이 이루어진다면 좋은 일이고. 꿈이었다면... 모르겠다. 개꿈 꾼 셈 치지 뭐. 호시우미는 두 손을 들어 버석버석해진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 운동복을 걸어둔 옷걸이로 향했다.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러닝을 해서 머리를 맑게 할 생각이었다. 등 뒤에서 코를 골던 룸메이트가 몸을 뒤척이며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러나 마법에 걸린 듯 오묘한 기분은 아침 러닝을 마치고, 오전 수업이 끝날 때까지도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꼭 무슨 일이 일어나고야 말 것처럼 쉴 새 없이 가슴이 두근거렸다. 야, 고라이. 점심 뭐 먹을래? 교양 수업을 같이 들은 하쿠바가 가방 속으로 책을 밀어 넣으며 물었다. 호시우미는 학생들이 강의실을 전부 빠져나갈 때까지 한참을 움직이지 않다 진지하게 말을 꺼냈다.
“가오. 이거 내 얘긴 아닌데.”
“어?”
“혹시... 소원을 들어주는 요정 얘기 같은 거 들어본 적 있어? 물론 내 얘긴 아니야.”
“갑자기 웬 요정? 그거 인어공주에 나오지 않냐?”
“인어공주에 요정이 나와?”
“그... 같이 후크선장 물리치지 않나?”
“됐다 됐어.”
인어공주에 무슨 후크선장이 나와 이 멍청아. 물어본 내가 잘못이지. 호시우미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가방을 한쪽 어깨에 멨다. 뭔가를 먹을 기분은 아니었지만 오후 운동을 위해서는 뭐라도 입에 넣어야 한다. 학교 앞 토스트 가게 갈래? 그래. 거기 뭐가 맛있어? 뭐가 맛있더라. 햄치즈인가 그랬던 거 같은데. 두 사람은 점심 메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교정을 걸어 나갔다.
그러던 중 호시우미가 어느 지점에서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그가 멈춰 선 곳은 수의대 건물 근처에 위치한 어느 카페 앞이었다.
“가오. 나 잠깐만.”
“응?”
“잠깐만... 잠깐만 여기 있어! 나... 카페 안에 들어갔다 나올게.”
호시우미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의 눈이 붙박은 듯 카페의 쇼윈도에 고정되었다. 뭐라고? 하쿠바가 되물었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카페 안에선 점원이 익숙한 얼굴의 남자에게 음료를 건네고 있었다. 히루가미. 히루가미 사치로다! 호시우미는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카페로 뛰어들어가 유리문을 밀었다.
문을 열자 종이 청아하게 울리며 짙은 원두 향이 났다. 그의 발이 강력한 자석에 끌려가는 고철 덩어리처럼 저절로 움직였다. 눈은 단 한 사람만을 보고, 머리는 당연히 일어날 일의 결과를 기다릴 때처럼 묘한 확신에 차 있었다. 뚜벅뚜벅 카페로 들어선 호시우미는 곧 주문대 근처에 있던 히루가미의 옆에 나란히 섰다. 히루가미는 누가 다가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음료에 종이 컵홀더를 끼우고 있었다.
“저기...”
“아, 죄송합니다.”
호시우미가 말을 걸자, 히루가미가 얼른 사과를 하며 한 발짝 옆으로 비켜섰다. 아마도 호시우미가 주문대에서 비켜달라는 뜻에서 그를 불렀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아뇨, 그게 아니라... 히, 히루가미 사치로 씨!”
히루가미가 깜짝 놀라 호시우미를 쳐다본 건, 호시우미가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였다. 연갈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호시우미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그만 숨이 멎어버릴 것 같았다. 두 번째로 마주한 그의 눈동자는 처음 봤던 그때처럼 부드럽고 따뜻하고, 또 다정했다.
“방금 절 부르셨어요?”
“저... 저는...”
“제 이름을 어떻게...”
“저는 호시우미 코라이입니다!”
미쳤어. 정신이 나갔나 봐. 그러지 않고서는 이럴 수 없어. 이렇게 대책 없이 말을 걸면 어쩌자는 거야. 그다음은 어쩔 건데? 어? 어쩔 거냐고 코라이. 그러나 때는 늦었고 일은 벌어졌다. 히루가미는 이미 휘둥그레 눈을 뜨고 저를 보고 있었다. 그 눈을 마주하고 있자니 가슴이 쿵쾅거리고 손이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내가 떨고 있다고? 내가? 말도 안 돼. 전국 체전에 나가서도 이렇게까지 떨어본 적이 없는데!
“체, 체육학과 3학년이고 나이는... 당, 당신이랑...”
“......”
“...동갑!”
히루가미의 입술이 반쯤 벌어졌다. 그는 도무지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아, 이젠 나도 모르겠다. 호시우미는 성큼성큼 히루가미를 지나쳐 주문대에 놓인 냅킨과 사인펜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냅킨에 거침없이 뭔가를 적어 내려갔다. 잠시 후 히루가미에게 돌아온 호시우미는 덥석 그의 손에 냅킨을 쥐여주었다.
“그럼... 이만!”
“네?”
잠시 스쳐 닿은 히루가미의 손은 커다랗고 따뜻했다. 냅킨을 건넨 호시우미는 곧바로 몸을 돌려 카페를 뛰쳐나갔다. 그 바람에 카페 문에 달린 종이 급작스럽게 흔들리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야, 무슨 일이야! 어?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하쿠바가 그를 따라 뛰며 물었다. 두 사람은 곧 알 수 없는 방향으로 빠르게 달려 사라졌다.
남겨진 히루가미는 황당한 표정으로 손에 쥐어진 냅킨을 내려다보았다. 냅킨엔 삐뚤빼뚤한 글씨로 누군가의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
“그 남자는 얼마나 황당했을까.“
다음 날 저녁. 사건의 자초지종을 들은 하쿠바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사건의 주인공은 햄버거집 테이블에 얼굴을 박고 삼십 분째 일어나지 못했다. 어쩐지. 수업을 들을 때도 운동을 할 때도 녀석의 상태가 영 이상하다 싶었다. 하쿠바는 다 먹은 햄버거의 포장지를 구겨 쟁반으로 던져넣었다.
“그래서. 연락은 왔냐?”
“...아니.”
“당연히 안 왔겠지. 내가 그 남자였잖아? 너 장기매매 하는 사람인 줄 알고 경찰에 신고했다.”
“죽는다 진짜...”
“입장 바꿔서 생각해 봐라. 처음 보는 사람이 딸랑 번호만 던져주고 도망갔는데 와, 신난다! 내가 먼저 연락해서 아는 사이가 되어봐야지! 이런 생각이 들겠냐? 니가 어떤 사람일 줄 알고.”
“그렇게 말 안 해도 나 충분히 심란하거든?”
“그리고 그 사람, 수의대에서 제일 잘생겼다며?”
“......”
“과 애들도 그 사람 다 알던데."
그런 사람이 뭐 하러 먼저 연락을 해? 분수를 알아라 이 밤송이야. 쯧쯧쯧. 하쿠바가 혀를 차며 절반 이상 녹은 쉐이크를 빨대로 저었다. 호시우미는 여전히 엎드린 채로 햄버거집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누가 몰라? 그 사람 잘생긴 거 누가 모르냐고. 나도 알아. 이름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얼마나 무모한 짓을 했는지는 머리가 달린 이상 나도 안다고. 하지만 나는... 요정이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단 말야.
이러다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을까 싶어 차마 요정 이야기까지는 하지 못했다. 하쿠바의 눈에는 제 행동이 그저 허무맹랑하게만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니, 저 역시 곱씹을수록 이 상황이 기이하기만 했다. 만약 카게야마가 진짜 요정이 아니고 시시콜콜한 장난을 친 거라면? 저는 무턱대고 히루가미에게 연락처나 들이민 사람이 된다. 만약 그렇다면... 히루가미가 보기에 그날의 나는 얼마나 이상했을까? 호시우미의 얼굴이 점점 심각해졌다.
그때였다. 한참을 엎드려있기만 하던 호시우미가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그가 앉은 테이블 건너편에서 익숙한 뒤통수를 가진 남자가 와앙 입을 벌리고 햄버거를 베어 물고 있었다. 반질반질한 까만 머리에 위아래로 차려입은 정장. 호시우미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남자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남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그의 멱살을 잡아 쥐었다. 순식간에 멱살이 잡힌 카게야마가 당황해 소리쳤다.
“어어, 뭐, 뭡니까!”
“이 자식, 너 사기꾼이지. 너 이럴 줄 알았어.”
“잠깐만요, 배추, 야... 양배추 떨어져요!”
카게야마가 황급히 호시우미의 손목을 맞잡았지만 이미 그의 옷 위로 양배추 조각이 굴러떨어지며 한 줄기 그림을 그렸다. 아, 이거 어제 세탁한 건데! 안타깝게 외치는 카게야마를 향해 호시우미가 따지듯 소리쳤다.
“애초에 요정이고 뭐고 말이 안 됐어. 무슨 요정이 맥도날드에서 햄버거를 먹어???”
“햄버거가 왜요! 밥은 먹어야 일을 할 거 아닙니까!”
“요정이 왜 밥을 먹고 일을 하냐고! 너 때문에 나만 이상한 사람 됐잖아!”
“그게 무슨 말이에요? 진정하고 말해봐요!”
“진정하게 생겼냐!!!!!!”
카게야마를 붙잡고 흔들어대던 호시우미가 진정한 것은 그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였다. 어느새 하쿠바를 비롯한 매장의 모든 손님들이 넋을 놓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큼, 그 시선을 눈치챈 호시우미가 슬그머니 카게야마의 옷깃을 놓았다. 얼마나 힘차게 쥐고 흔들었던지 깔끔했던 셔츠 깃이 온통 주름투성이가 되었다. 카게야마가 탁탁 옷을 털어내며 억울한 얼굴로 물었다.
“도대체 제가 뭘 어쨌다는 겁니까?”
“사랑에 빠지긴 뭘 빠져? 미친 척하고 번호 주고 왔는데 연락도 없잖아, 이 사기꾼아!”
“좀 기다려요! 소원 접수했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그걸 왜 이제 말해? 너 또 사기 치려고 지어내는 거지!”
“기존 세계의 질서를 흐트러뜨리지 않으려면 시간이 필요해요. 특히 사람 마음을 변화시킬 땐 배로 시간이 걸려요. 그리고, 제가 호시우미 씨 소원만 담당하는 줄 아세요? 이거 말고도 동시에 처리할 게 여러 건이에요!”
“그럼 내 소원은 언제 이루어지는데!”
“기다려봐요! 저도 상황 보고 있으니까.”
휴, 고기 떨어질 뻔했네. 카게야마가 중얼거리며 주섬주섬 흐트러진 햄버거를 추슬렀다. 호시우미는 못마땅하게 입술을 다물었다. 그의 말을 듣고 보니 이틀 만에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며 따진 제가 진상 고객 쪽에 가깝기는 했다.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그를 믿을 수 있게 된 건 아니었다. 호시우미는 미안함 절반, 그러나 여전히 의심스러움 절반인 눈빛으로 카게야마를 바라보았다.
***
없어. 분명히 없어.
양손을 망원경처럼 만들어 라운지 안을 들여다보던 호시우미가 유리문에서 손을 뗐다. 로비에 붙은 벽시계를 확인해보니 벌써 오후 네 시 반이다. 지금쯤이면 히루가미가 이미 자리를 잡고 공부를 하고 있어야 하는데. 오늘은 평소의 그 시간이 한참 지나도록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햄버거 집에서 카게야마를 만난 이후, 히루가미로부터는 하루가 더 지나도록 연락이 오지 않았다. 밤새워 후회와 고민을 반복하다 호시우미는 마침내 결심을 했다. 카게야마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지만, 이미 사고를 쳐버린 이상 가만히 손을 놓고 있어서는 안될 것 같았다. 그래, 자고로 용기 있는 자가 미남을 얻는다고 했다. 오늘은 히루가미에게 직접 말을 걸어 제대로 된 통성명을 하던지, 그의 연락처를 알아내던지 어느 한 가지는 해낼 작정이었다. 그런데...
히루가미가 보이질 않는다. 목표물이 나타나야 낚싯대를 던지든 포켓볼을 던져보든지 하지. 웬만해선 이 시간까지 나타나지 않는 일이 거의 없는데. 아무래도 오늘은 날이 아닌 걸까? 혹시 아프거나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이십 분 가까이 입구를 서성이던 호시우미가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유리문 안을 들여다보던 순간이었다.
“들어가실 건가요?”
누군가 그의 뒤에서 정중하게 물었다. 아뇨, 죄송합... 사과하며 비켜서던 호시우미가 숨어있던 걸 들킨 고양이처럼 화들짝 놀랐다. 말을 건 사람은 다름 아닌 히루가미 사치로였다. 저를 알아보았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히루가미는 기다란 속눈썹을 깜빡이며 멀뚱멀뚱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떡하지? 지금이야. 지금 말 걸어야 돼. 긴장한 호시우미가 스포츠 백의 끈을 꽉 틀어쥐었다. 그런데...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더라. 무슨 말부터 해야 하지? 그쪽 핸드폰 번호도 알려주세요?
아니 아니, 그전에 상황부터 설명해야지. 내 연락처를 줬던 이유부터. 그쪽한테 호감이 있어서 그랬어요. 이건 너무 촌스러운가. 근데 이렇게 입구에 멍청하게 서서 얘기를 해도 되는 거야? 자리를 옮기자고 해볼까? 그럼 어디로 가야 하는데? 라운지 안으로? 아니면 근처에...
“저기. 호시우미 씨?”
“네? 저, 저요???"
그러나 히루가미가 이름을 불러온 순간, 호시우미의 머릿속은 다시 백지장이 되었다. 히루가미는 제가 연락처를 주고 도망갔던 사람이라는 것 뿐만 아니라 제 이름까지도 기억하고 있었다.
“저번에 주고 가신 전화번호요.”
히루가미가 입고 있던 가죽 재킷의 주머니를 뒤적여 뭔가를 꺼내 들었다. 그가 꺼낸 것은 호시우미가 쥐여주고 떠났던 카페 냅킨이었다.
“연락해보고 싶었는데 잉크가 번져서 숫자를 알아볼 수가 없었어요. 혹시...”
“......”
“다시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히루가미의 말대로 호시우미가 쓴 글씨는 도저히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이곳저곳으로 번져 있었다. 수성펜을 쓴 탓에 잉크가 그만 냅킨의 결을 타고 번져버린 모양이었다. 이러나저러나, 냅킨을 내민 히루가미는 꼭 로맨스 영화의 주인공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호시우미는 믿기지 않는 상황에 벙쪄 멍하니 그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머릿속으로 펑펑 불꽃이 터졌다.
영험하신 카게야마 요정님. 제가... 제가 감히 요정님을 몰라뵀습니다.
***
“그래서 올해는 농학부 전부 테마 하나씩 맡아서 부스를 운영하기로 했어. 수의학과는 음식 부스.”
“그렇구나. 너도 참여해?”
“응. 주문이랑 서빙 맡기로 했는데 주문이 너무 많이 밀리면 요리도 같이 해야 해.”
“힘들겠다.”
“괜찮아. 나 요리하는 거 좋아해.”
히루가미가 산뜻하게 대답했다. 호시우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슬쩍 창밖으로 돌렸다. 이거... 진짜 현실이야? 실제로 나한테 일어나고 있는 일이 맞는 거지? 초조하게 물고 있던 빨대 끝은 어느새 잇자국 투성이였다. 카페 밖에선 아까부터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서로 연락처를 교환한 날, 히루가미는 먼저 호시우미에게 메시지를 보내왔다. 각자 소개를 한 그들은 연락을 주고받기 시작했고 때로는 학관 라운지에서, 때로는 교내 카페에서 만남을 가졌다. 카게야마의 능력은 실로 대단했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말을 놓았고 언제부턴가 서로를 이름으로 불렀다. 누가 봐도 이제 막 호감이 싹트는 관계 같은 모습이었다. 오늘의 약속 장소는 호시우미가 연락처를 적어 건넸던 바로 그 카페였다. 두 사람은 창가 자리에 마주 앉아 얼마 후 열릴 문화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히루가미는 음식을 만드는 부스를 맡았고, 그곳에서 서빙을 하거나 주문을 받을 거라고 했다.
“코라이 군, 혹시 지금 나오는 음악 듣고 있어?”
“응?”
“이거 내가 진짜 좋아하는 곡이거든. 이사오 사사키 Forever. 코라이 군도 피아노 음악 좋아해?”
“아니. 음악은 잘 몰라.”
“나도 잘은 모르는데 가끔 찾아들어. 클래식도 좋아하고 재즈도 좋아하고.”
음악에 대해 설명하는 히루가미의 목소리가 한층 들떴다. 그는 음악을 무척 좋아한다. 그러나 호시우미는 히루가미의 눈 대신 비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쇼윈도에 맺혀 흐르는 빗방울 사이로 그의 모습이 반사되어 비쳤다.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히루가미는 아까부터 볼펜을 쥐고 냅킨에 뭔가를 끄적이고 있었다.
카게야마의 말대로 이제 히루가미는 확실히 제게 호감을 가진 듯 보였다. 그는 잦은 빈도로 연락을 해왔고 바쁜 스케줄을 쪼개가며 틈틈이 호시우미를 만나고 싶어 했다. 이런 그가 싫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에 더 가까웠다. 싫지 않아서, 그가 너무 좋아서 그와 눈을 똑바로 마주할 수 없었다.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기보다는, 그를 속여 거대한 틀에 가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호시우미와 함께 있는 히루가미는 즐거워 보였지만, 그걸 그의 자유 의지라고 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어찌 됐건 그를 이 자리까지 오게 만든 건 카게야마의 힘이었으니까. 히루가미가 제게 호감을 갖게 된 건 제가 좋은 사람이어서가 아니었다. 이런 역설적인 감정은 그와의 사이가 가까워질수록 점점 커져만 갔다.
“코라이 군!”
호시우미가 응시하고 있던 어느 빗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린 순간, 히루가미가 밝게 그를 불렀다. 호시우미는 그제야 생각에서 깨어나 히루가미 쪽을 쳐다보았다. 히루가미가 웃는 얼굴로 그에게 냅킨을 내밀었다.
“이게 뭐야?”
“코라이 군은 꼭 고양이 같아.”
“내가?”
“응. 나한테 관심 있는 줄 알았는데. 막상 다가오니까 눈길도 안 주고.”
“아니야, 그런 거.”
히루가미가 내민 냅킨엔 털이 북슬북슬한 고양이가 그려져 있었다. 호시우미는 놀란 눈으로 그가 그린 고양이를 내려다보았다. 꼭 만화가가 그린 것처럼 능숙한 그림체였다.
“사치로 그림 잘 그린다.”
“뭐, 그 정도 가지고.”
“넌 진짜 잘하는 게 많네. 공부도 잘하고, 요리도 잘하고.”
“칭찬 받을 정도는 아니야. 코라이 군은 그림 잘 그려?”
“아니. 나 엄청 못 그려. 난 잘 하는 거 하나도 없어.”
“에이, 체육학과잖아.”
“운동만 잘해. 그게 다야.”
호시우미가 힐끔 시선을 돌려 카페 벽에 걸린 시계를 올려다 보았다. 히루가미와 함께하는 시간은 늘 쏜살같이 지나갔다. 그다지 길게 이야기를 나눈 것 같지도 않은데 커피잔은 텅 비었고, 어느새 수업을 들으러 갈 시간이 되었다. 그의 시선을 따라 시계를 바라본 히루가미가 아차, 하며 몸을 일으켰다.
“맞다, 코라이 군 두 시에 수업 있다고 했지? 그만 일어날까?”
호시우미는 아쉬운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카페 입구로 나선 두 사람은 곧장 카페를 벗어나지 못했다. 카페에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맑았던 하늘에서 여전히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소나기일 줄 알았던 비는 쉽사리 그치지 않았다. 길가엔 벌써 이곳저곳 물웅덩이가 생겼다.
“코라이 군, 우산 있어?”
“아니.”
“나 아침에 예보 보고 우산 챙겨왔는데. 수업 어디서 들어? 데려다줄게.”
“아냐. 그럴 필요 없어.“
“어디야? 수업 장소.”
히루가미가 남색 단우산을 꺼내 들며 물었다. 정말 데려다 줄 필요 없어, 빨리 뛰어가면 되니까. 호시우미의 대답은 금세 공중에 묻혔다.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호시우미는 이미 히루가미의 손에 이끌려 빗길을 걷고 있었다. 커다란 손이 다가와 호시우미의 어깨 위를 감쌌다. 투둑투둑, 거센 빗방울이 두 사람이 쓴 남색 우산을 사정없이 두들겼다.
“진짜 괜찮은데...”
“안 돼. 가을비는 맞으면 감기 걸려. 그보다 좀 더 가까이 올래? 어깨 젖잖아.”
단호하게 대답한 히루가미가 호시우미를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이제 호시우미는 거의 안기다시피 그에게 붙어 빗길을 걷고 있었다. 히루가미가 걸친 후드 집업에선 그와 어울리는 산뜻한 향기가 났다. 이건 무슨 냄새일까. 섬유유연제 같기도 하고. 로션 냄새 같기도 하고... 아니면 향수를 쓰는 걸까? 향수를 쓴다고 해도 뭔가 잘 어울려. 힐긋 히루가미를 살피던 호시우미의 얼굴이 갑자기 붉어졌다. 호시우미가 최대한 비를 맞지 않게 하려다 그랬는지, 히루가미의 한쪽 어깨가 빗물에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의 머리카락 끝엔 어느새 굵은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안 되겠다. 이러다 히루가미 혼자만 흠뻑 젖게 생겼다. 호시우미는 후다닥 히루가미의 팔을 밀어냈다. 저도 양심이라는 게 있지. 남의 힘을 빌어 마음을 훔쳤는데, 비에 젖게까지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냐! 내가 그냥 빨리 뛰어갈게. 어차피 바로 앞인 걸.”
“......”
“정말이야. 3분이면 돼. 우산은 너 혼자 써. 이러다 네가 다 젖겠어. 그럼 안녕!”
인사를 마친 호시우미가 재빨리 우산 밖을 나섰다. 우산을 벗어나니 바로 눈두덩이로 빗물이 들쳤다. 순간 히루가미가 손을 뻗은 것 같았지만 호시우미는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그가 저를 붙잡을 수 없도록 온 힘을 다해 뛰었다. 이제 비는 점점 거세져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을 정도였다. 얼굴에 흐르는 빗물을 훔쳐내며 호시우미는 수업 장소인 제 2체육관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렸다. 수업 장소가 바로 앞이라는 건 거짓말이었다.
***
“그래서, 이젠 그 남자가 먼저 연락해서 만나자고 한다고?”
“그래.”
“오늘은 체육관까지 우산도 씌워주려고 했고?”
“그렇다니까.”
“니가 너무 불쌍해 보여서 그러는 거 아님? 하도 거지꼴을 하고 다녀서.”
“진짜 짜증 나게 하지 마.”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다 말고, 호시우미는 결국 하쿠바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이게 듣자 듣자 하니까. 반박할 수 없는 말이라 더 짜증이 났다. 악, 아파! 하쿠바가 비명을 지르며 탈의실 의자 위로 푹 주저앉았다.
비를 쫄딱 맞고 체육관에 온 탓에 호시우미는 오후 내내 젖은 몸으로 운동을 했다. 구기 종목 수업과 연습 경기를 마치고 나서야 그는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을 수 있었다. 동기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떠나고, 어느덧 탈의실엔 호시우미와 하쿠바 둘만 남았다. 머리의 물기가 어느 정도 마른 것을 확인한 뒤 호시우미는 마지막 순서로 가방을 챙기고 락커 문을 닫았다. 그리고 탈의실을 나서는 하쿠바를 서둘러 따라나섰다. 아까 하쿠바의 더플백 안에서 얼핏 우산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야, 가오.”
“왜?”
“우산 좀 같이 쓰자.”
체육관 밖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의 장대비가 쏟아져 내렸다. 우산 없이 뛰쳐나갔다간 몇 초 만에 다시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될 게 뻔했다. 하쿠바가 황당한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지금 장난해?”
“뭐가?"
“너 내 덩치 모르냐? 이 코딱지만 한 걸 어떻게 너랑 같이 써?”
“딱 붙어서 가면 되지.”
“내가 왜 너랑 딱 붙어서 가? 싫어!”
“아, 십 분이면 되잖아. 제발.”
“그럼 뛰어 멍청아! 전력으로 뛰면 3분 컷도 가능하겠구만!"
“가을비는 맞으면 감기 걸린단 말야!”
“알 바냐???”
와, 진짜 개싸가지. 왜 내가 싸가지야? 우산 뺏어 쓰려는 니가 양아치지. 내가 감기 걸려서 죽기라도 하면, 네가 책임질 거야? 죽든가 말든가. 너 내 장례식 오지 마! 와달라고 무릎 꿇고 빌어도 안 간다! 실랑이는 곧 몸싸움이 되었다. 그들이 우산 하나를 끼고 한창 난투극을 벌이고 있을 때였다.
“코라이 군.”
누군가 나직하게 호시우미의 이름을 불렀다. 두 사람은 동시에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쳐다보았다. 이윽고 호시우미가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체육관 입구엔 남색 우산을 든 히루가미가 서 있었다.
“사치로?”
“생각해보니까 코라이 군... 돌아갈 때도 우산 없을 것 같아서.”
히루가미의 시선이 천천히 이동해 두 사람이 맞잡은 우산에 와닿았다. 호시우미와 하쿠바가 서로를 쳐다보며 두어 번 눈을 깜빡였다. 퍽, 상황을 파악한 하쿠바가 얼른 호시우미의 등을 히루가미 쪽으로 떠밀었다.
“억.”
“됐네. 해결됐네. 잘 가라.”
“야!”
호시우미가 다시 저를 붙잡을세라, 하쿠바는 냉큼 우산을 펴들고 체육관 밖으로 달려 나갔다. 치사한 자식. 내일 진짜 가만 안 둬. 하쿠바의 뒷모습은 빠르게 멀어졌고 호시우미는 머뭇머뭇 히루가미를 돌아보았다. 호시우미와 히루가미의 눈이 천천히 허공에서 마주쳤다. 체육관 지붕을 타고 후두둑 굵은 물방울이 떨어졌다.
“가자. 데려다줄게.”
“......”
히루가미가 우산을 펴며 말했다. 이젠 정말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결국 호시우미는 얌전히 그를 따라 빗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두 사람은 가로등 불빛이 밝히는 교정을 함께 걷게 되었다. 고요한 학교에선 찰박거리는 두 사람의 발소리 외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방금 그 분은 과 동기야?”
“응.“
“저번에도 한 번 본 것 같은데. 많이 친한가 보네.”
“응. 같은 고등학교 출신이라서.”
“수업은 잘 들었어? 오후엔 보통 어떤 운동해?”
“수업은 구기 종목이었어. 세 세트 정도 뛰었고 오후엔 요일별로 루틴이 있어.”
제 2체육관과 기숙사는 그렇게 멀리 떨어진 거리가 아니었고 그들은 금방 기숙사 근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저, 코라이 군. 그런데 말야. 호시우미의 학교생활에 대해 이것저것 묻던 히루가미가 갑자기 걸음을 늦추었다. 그는 호시우미가 기숙사로 들어가기 전 뭔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호시우미는 의아하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사실 오늘... 마음에 조금 걸렸던 게 있어.”
“누가? 네가?”
“응. 아까 카페에서 만났을 때도 그렇고 우산 씌워줬을 때도 그렇고. 어쩐지 코라이 군이 눈도 잘 안 마주치고... 나랑 별로 같이 있고 싶어 하는 것 같지 않아서.”
“......”
“그래서 혹시 내가 코라이 군한테 뭐라도 실수한 적이 있는지...”
“아니야!”
호시우미가 황급히 소리쳤다. 왜 네가 나 때문에 그런 걱정을 하는 거야? 순전히 히루가미를 위해 한 행동이었는데, 거꾸로 그를 걱정하고 신경 쓰게 만들었다는 사실이 당혹스러웠다. 히루가미도 급작스러운 반응에 놀라 호시우미를 쳐다보았다.
“절대 아니야, 사치로. 그건 단지 내가...”
내가 널 정말 좋아해서 그래. 너무 좋아한 나머지 널 그렇게 만든 거라서... 그러나 호시우미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요정이 나타나서 네가 날 좋아하게 만들어줬어, 이런 허무맹랑한 소리를 그에게 해버릴 수는 없다. 대답을 기다리던 히루가미의 고개가 픽 아래로 떨어졌다.
“아냐. 불편하면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 대신 코라이 군한테 주고 싶은 게 있었어.”
“나한테?”
“아까 주려고 했는데...”
꼭 와줬으면 해서. 머쓱하게 중얼거린 히루가미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건넸다. 그는 방금 전 대화로 호시우미를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은 듯 여전히 옅은 미소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게 뭐야? 호시우미는 그에게 받은 붉은 종이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가 내민 것은 수의과대학 로고가 찍힌 문화제 부스 티켓이었다.
***
생각보다 규모가 크네. 부스 존 뒤편을 기웃거리던 호시우미가 슬그머니 앞으로 빠져나왔다. 오늘은 학교에서 열리는 문화제 둘째 날이었다. 교내 중앙 광장에선 여러 과들이 각자 설정한 테마에 맞게 부스를 운영하고 있었다. 큰 행사라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부스가 많을 줄은 몰랐다. 그러고 보니 문화제를 찾은 건 1학년 때 이후 처음이었다. 체육학과에서도 매년 이벤트 부스를 운영하지만, 학교 행사에 관심이 없어서 딱히 참여해 본 적은 없다.
오전부터 진행되었으니 저녁이면 한산해지겠지 싶었던 생각은 완전 오산이었다. 가을밤의 부스 존은 이 지역 대학생들이 모두 몰려왔나 싶을 정도로 북새통이었다. 광장 한가운데선 학생 밴드가 버스킹을 했다. 호시우미는 티켓에 적힌 위치를 확인하며 한참이나 광장을 헤매다 드디어 어느 한 곳에 발을 멈추었다. 바로 수의학과에서 운영하는 부스 앞이었다. 홍등으로 꾸민 수의학과 부스는 무척 화려했고, 티켓에 적힌 것과 같은 이름의 팻말이 입구에 붙어 있었다. 그 안에선 아마도 수의학도일 학생들이 분주하게 요리와 서빙을 했다. 전부 귀여운 강아지나 고양이가 그려진 앞치마를 둘렀다. 가라아게, 야키소바, 타코야키... 호시우미의 눈이 캘리그라피 메뉴판을 천천히 훑었다. 뭘 사 먹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오늘 그가 이 곳에 온 이유는 딱 하나였다.
“코라이 군!”
히루가미가 반갑게 그의 이름을 외치며 부스 바깥으로 달려 나왔다. 그 역시 허리에 강아지 앞치마를 둘렀다.
“드디어 왔구나. 기다렸는데. 왜 이제 왔어?”
“미안. 정규 운동은 빼기가 힘들어서.“
“아니야. 왔으니까 됐어. 식사는 했어?”
“아니, 아직.”
“잘 됐다. 이리 와 봐.”
히루가미가 덥석 호시우미의 손을 쥐었다. 어어, 하는 사이 그는 히루가미에 이끌려 부스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부스는 기름 냄새와 달짝지근한 소스 냄새로 가득했다. 히루가미가 집게와 접시를 챙기며 그에게 물었다.
“코라이 군, 가라아게 좋아해?”
“뭐, 응.”
“조금만 기다려. 내가 제일 잘 튀겨진 것들만 골라줄게.“
접시에 가라아게를 담는 히루가미는 무척이나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를 기다리는 사이 호시우미는 히루가미의 손이 닿았던 곳을 슬쩍 매만져 보았다. 금세 사라진 그의 온기가 못내 아쉬웠다. 히루가미는 곧 가라아게와 야키소바를 가득 담은 접시를 들고 나왔다. 근데 앉을 자리가 없겠는데? 호시우미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부스 앞에 설치된 테이블은 삼삼오오 몰려온 학생들로 이미 만원이었다. 그러나 히루가미는 주저 없이 어느 테이블로 걸어가 자리를 만들어 냈다. 동물 인형과 블루투스 스피커로 장식해 둔 테이블이었다. 애초에 손님을 받을 목적의 테이블이 아닌 듯 보였지만 인형을 치워내자 딱 호시우미만 앉을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 생겼다.
“코라이 군, 같이 있어 주고 싶은데 손님이 너무 많아서 나만 나오기가 힘들 것 같아.”
“응. 가서 일해. 난 정말 괜찮아.”
“이거 먹고 조금만 기다릴래? 손님 어느 정도 빠지면 다시 올게.”
“그래.”
대답을 들은 히루가미가 싱긋 웃어 보이고는 얼른 주문을 받는 곳으로 되돌아갔다. 어떤 걸로 하시겠어요? 타코야키 2인분이요?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다음 분 주문하시겠어요? 호시우미는 바쁘게 일하는 히루가미를 바라보다 그가 챙겨준 접시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가라아게 한 조각을 포크로 찍어 입안에 넣어보았다. 불룩해진 볼이 천천히 움직였다. 음식은 맛있었다. 그러나 어쩐지 배가 고프지는 않아서 호시우미는 금방 포크를 내려놓았다.
예상과 달리 손님들은 시간이 지나도록 쉽게 빠지지 않았다. 한 테이블이 나간다 싶으면 어김없이 다른 손님들이 들어와 빈 자리를 채웠다. 히루가미는 이리저리 서빙을 하면서도 호시우미가 신경 쓰였는지, 자꾸만 이쪽을 쳐다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호시우미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저 사람이 히루가미지? 하늘색 셔츠 입은 사람.”
그러던 중 어디선과 나누는 대화에서 익숙한 이름이 들렸다. 호시우미는 포크를 만지작거리다 말고 저도 모르게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바로 옆 테이블에서 히루가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진짜 잘생겼다.”
“미친 거 아냐? 저 얼굴에 어떻게 수의대까지 갔지.”
“그냥 연예인 해도 될 거 같지 않아? 성격도 좋대. 내 친구가 봉사동아리 같이 하거든.”
“와, 그건 좀 심했다. 사람이 뭐 하나는 모자라야지.”
역시. 사치로는 모든 사람들이 좋아해. 호시우미가 신고 있던 운동화 뒤축으로 흙바닥을 긁었다. 옆 테이블의 화제는 금세 다른 것으로 전환되었다. 부스 안의 모든 이들이 하하하 웃고 떠들었지만, 호시우미만은 그러지 못했다. 그는 흙 묻은 운동화를 내려다보다 주머니를 뒤져 부스 티켓을 꺼냈다.
주머니에 있는 수의학과 부스 티켓은 총 네 장이었다. 특별한 의미가 있을 줄 알았던 티켓은 사실 학관 앞을 지나다닐 때마다 언제든 받을 수 있었다. 심지어 하쿠바도 누군가가 나눠주는 걸 그냥 받아왔다고 했다. 호시우미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히루가미는 누구에게든 사랑받을 수 있고, 그래야 마땅한 사람이다. 그에겐 저보다 더 어울리는 사람을 사랑하고, 그런 사람에게 사랑받을 권리가 있었다. 호시우미는 어쩐지 울 것 같은 심정으로 티켓을 꾹 쥐었다. 사실 히루가미와 저의 관계는 딱 이 정도가 알맞았다. 어디서든 구할 수 있는 티켓을 부담 없이 줄 수 있는 관계.
그는 처음부터 제가 독차지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요정의 힘 없이는 가질 수 없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을 위해서라도 보내주는 게 맞다. 이 이상 관계가 진전되길 바라는 건 욕심이다.
마감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손님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마지막 테이블의 계산이 끝나자 사람들은 일제히 부스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히루가미는 다른 학생들과 남은 재료들을 모아 아이스박스에 담고 있었다. 행사는 이대로 끝이 날 분위기였지만 호시우미는 조용히 테이블을 벗어나 바깥으로 달려나갔다. 히루가미에게 인사를 하고 싶진 않았다. 어수선한 분위기였으니 저 하나 사라진 것 정도는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어디로 향해야 할지를 몰라 사람들이 몰리지 않는 곳으로 무작정 뛰었다.
발이 가는 대로 몸을 맡기다 보니 어느새 그는 제 2체육관으로 이어지는 숲길을 달리고 있었다. 체육관을 가려던 건 아니었지만 그곳을 벗어날 수 있다면 어디라도 상관 없었다. 먹은 거라곤 가라아게 두 조각이 전부인데. 이상하게 속이 울렁거렸다. 꼭 카게야마에게 소원을 빌었던 그날 밤 같았다.
그때, 달리던 호시우미를 누군가 뒤에서 강하게 잡아챘다. 호시우미는 쓰러질 듯 휘청이며 뒤를 돌아보았다. 뜻밖에도 그를 잡은 건 상기된 얼굴의 히루가미였다. 도대체 언제부터 날 따라온 거지? 멀리 달아날 생각만 하다 보니 누가 제 뒤를 쫓는 줄도 몰랐다. 얼마나 오랫동안 호시우미를 쫓았던지, 히루가미는 연신 거친 숨을 내뱉었다.
“왜, 왜 그냥 가버린 거야?”
그가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캠퍼스 어디선가 무대 공연을 시작했는지 멀리서 사람들의 환호성이 들려왔다. 붉은 색과 노란 빛의 조명이 학교 곳곳에서 번쩍이며 어둡던 숲길 사이로 새어들었다. 그 빛에 비춘 히루가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미안해. 내가, 내가 코라이 군을 너무 오랫동안 혼자 있게 했지? 너무 정신이 없어서... 정말 미안.”
“아니야. 나도 널 방해하고 싶진 않았어.”
“아니잖아. 역시... 내가 코라이 군한테 뭔가 계속 실수를 하고 있는 거지? 왜 자꾸 말을 돌려?”
“그런 거 아니라니까. 너무 소란스럽고 답답해서 조용한 곳으로 나오고 싶었을 뿐이야.”
“그냥 솔직하게 말해주면 안 될까? 부탁이야.”
“뭘 솔직하게 말해? 진짜 그런 게 없는데!”
“제발 부탁이야, 코라이 군. 내가 더 잘할게. 내가... 내가 이렇게 빌게.”
“갑자기 왜 그런 소릴 해? 그렇게 말하지 마!”
이 자식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제발 정신 좀 차려! 답답한 마음에 점점 목소리가 커졌다. 왜 네가 나한테 부탁 따위를 하는 거야? 지금 누가 누구한테 빌고 있는 거냐고. 내가 어쩌다... 널 이렇게 만들어 버린 거야? 곧 울 것 같은 그의 얼굴을 보니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호시우미가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이젠 정말 다른 방법이 없다. 솔직하게 털어놓는 수 밖에는.
운동을 시작한 이래로 그는 단 한 번도 꼼수를 부리거나 상대방을 속여본 적이 없었다. 만약 인간관계가 운동 경기고, 히루가미가 상대 선수라면 이제는 페어플레이를 하고 싶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제발 히루가미가 그 점을 알아주었으면 했다.
“사치로.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되진 않겠지만 그래도 들어 줘. 나 사실... 너에게 속임수를 썼어.”
“......”
“예전부터 널 좋아했고, 쉬운 방법으로 네 마음을 얻어보려고 했어. 그래서 무턱대고 번호도 물어보고, 널 체육관까지 오게 만들었던 거야.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건 아닌 것 같아. 이해가 안 된다면 그냥 한 귀로 듣고 흘려 버려. 넌 나보다 더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어. 충분히. 앞으로 다시는 연락하지 말자. 그럼 이만.”
호시우미가 빠르게 할 말을 마치고 다시 길 반대편으로 몸을 돌렸다. 마음은 아프지만 히루가미를 위해서는 이게 가장 옳은 길이라 믿었다. ‘다 널 위한 거야’ 따위의 말은 마지막 배려 차원에서 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그곳을 떠나려던 그를 붙잡은 건 떨리는 히루가미의 목소리였다.
“그러면 안 되는 거야?”
“.......”
“쉬운 방법으로 사람의 마음을 얻으면... 안 돼?”
호시우미가 물기 어린 목소리에 깜짝 놀라 뒤를 돌 았다.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숲길 한가운데 우뚝 선 히루가미는 분명 울고 있었다.
“나는 상관 없어, 코라이. 널 잡을 수만 있다면... 그게 뭐가 됐든지 나는 할 거야. 왜냐면 네가 정말 간절하니까.”
“내가 뭐라고 울고 그래? 울지 마.”
“나는 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매일매일이 깜깜했어. 방법이 있다면 그게 뭐라도 손을 뻗어서 잡고 싶었어. 너한테는... 너한테는 내가 그렇게까지 간절하지 않은 거야?“
“그런 게 아니야!”
호시우미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외쳤다. 히루가미가 어둠 속에서 그를 응시하다 한 걸음씩 천천히 그에게 다가왔다. 두 사람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다, 마침내 히루가미가 그를 끌어안았다. 기다란 팔이 단단하게 몸을 옭아매 왔다. 잠시 후, 호시우미의 어깨 위로 굵은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코라이 군이 말하는 쉬운 방법이 뭔지는 모르겠어. 근데 정말 그런 거라면... 책임을 져야지.”
“뭐?”
“난 이제 코라이 군이 없으면 안 돼. 네가 날 이렇게 만들었다면... 네가 날 책임져야지.”
책임을 져야 한다고...? 호시우미의 동공이 커다랗게 확장되었다. 머릿속에서 커다란 종이 울렸다. 뭔가에 세게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 밀려들었다. 그래, 새삼스럽게도 사람에게는 책임이란 게 있었다. 아무 조건 없이 이루어진 소원인 줄만 알았는데. 이제 와 보니 거기엔 숨겨진 대가가 있었다. 일종의 책임 서약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과거에 카게야마가 했던 말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이제야 제가 했던 사인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나 버리지 마, 응? 제발. 코라이. 히루가미가 울먹이며 호시우미에게 빌었다. 넘쳐오르는 감정을 억제할 수 없었는지 그가 덜덜 몸을 떨었다. 그가 느끼는 두려움이 고스란히 호시우미에게 전달되어 왔다. 미치겠다, 진짜. 호시우미는 어둠 속에서 질끈 눈을 감았다. 이럴 계획은 절대 아니었는데. 어쩌다 이런 상황까지 와버렸는지 모르겠다.
결국 호시우미는 무기력하게 두 팔을 벌려 그를 안았다. 미안해, 사치로. 다 내 잘못이야. 서럽게 우는 그의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말해주었다. 그러자 히루가미가 더욱 세게 그를 끌어안아 왔다.
그 순간 노천극장 쪽에서 빛줄기가 터져 올랐다. 무대공연이 절정에 달해 볼꽃놀이를 시작한 모양이었다. 형형색색의 불꽃이 앞다투어 하늘을 수놓았다. 폭죽이 연달아 터지는 소리를 들으며 호시우미는 가만히 히루가미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
오늘도 사치로는 라운지에 나왔을까?
라운지로 곧장 들어가지는 못하고, 호시우미는 입구에서 이어진 복도를 한참이나 서성거렸다. 문화제 이후 호시우미는 이 주일간 생각할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히루가미의 마음이 더 깊어지기 전에 그를 보내줄지, 이대로 모르는 척 히루가미와의 관계를 이어갈지. 어느 쪽이 더 옳은 방법일지에 대해 고민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 어느 쪽을 선택하든 그가 이 모든 것에 대한 결과를 책임져야 한다는 것 만큼은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사실이었다.
그 기간 동안 호시우미는 라운지에 오지 않았고, 히루가미와 연락도 하지 않았다. 며칠 전 히루가미에게선 기다리고 있겠다는 메시지가 마지막으로 왔다. 그렇게 두 사람은 이 주일간 각자의 시간을 가졌다. 라운지를 자주 가는 하쿠바의 말에 따르면, 히루가미는 매일 그 시간이 될 때마다 여전히 그곳에 나타난다고 했다.
라운지는 언제나 그렇듯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중간고사 기간이 가까워져 평소보다 더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것 같기도 했다. 호시우미는 한참을 더 머뭇거리다 슬쩍 유리문 안을 들여다보았다.
“아.”
호시우미가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 라운지 안쪽에 위치한 테이블, 익숙한 그곳에서 히루가미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예전의 어느 날처럼 베이지 색 가디건을 걸치고 곧은 자세로 필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역시... 난 널 좋아하나 봐. 호시우미가 얼굴에 슬그머니 웃음꽃을 띄웠다. 그리고 걸음을 재촉해 히루가미가 앉은 곳으로 다가갔다. 그의 등 뒤에 선 순간, 그가 인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안녕, 코라이 군.”
여기 앉을래? 먼저 침묵을 깬 히루가미가 옆자리의 의자를 빼냈다. 호시우미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가 꺼내준 의자에 앉았다. 히루가미는 씩 웃으며 다시 태블릿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치로. 그동안 계속 여기 나왔어?”
“응.“
“나 만나려고?”
“응.”
“내가 안 나왔으면?”
“나올 때까지 기다렸겠지.”
“...내가 졸업할 때까지 안 나왔으면?”
“기다리다 졸업했겠지.”
히루가미가 사각거리는 소리를 내며 필기를 계속했다. 단정한 글씨체가 노트 화면을 빼곡하게 채웠다. 그 옆에 놓인 커피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가 써내려가는 문장을 내려다보다, 호시우미는 뭔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난 너한테 분명히 말했다.”
“뭘?”
“나는 요행을 써서 네 마음을 얻었던 거라고. 하지만 네가 괜찮다고 한 거야.”
“아하하.”
“난 다 솔직하게 털어놨는데! 네가 그래도 괜찮다고 날 선택한 거라고. 알겠어???“
“알겠어.”
“나중에 무르기 없기야! 환불이나 교환 같은 건 없어.”
“무르기?”
“그러니까... 왜 다른 사람을 못 만나게 했냐고 원망한다던가... 더 좋은 사람이 생겼다고 헤어지자고 한다던가...”
호시우미의 목소리가 서서히 자신감을 잃었다. 저 혼자 좋아하고, 도망가고, 화내고, 고민하고. 마지막엔 무르지 말라고 협박이나 하기. 제가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결말이었다. 히루가미가 결국 참지 못하고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잠시 후, 웃음을 멈춘 히루가미가 호시우미의 손을 잡아 쥐었다. 그는 맞잡은 손을 내려다보다 호시우미의 손을 끌어 제 입술로 가져갔다. 쪽, 호시우미의 손등 위로 따뜻한 입술이 내려앉았다.
“너야말로.”
코라이 군이야 말로 무르기 없기야. 히루가미가 호시우미의 손을 쥔 채로 속삭였다. 그는 진심으로 행복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그 모습이 꼭 부서지는 가을 햇살 같아서, 호시우미는 넋을 놓고 그를 바라보았다.
***
“으으, 추워.”
이제는 건물 안으로 들어와도 추위가 가시지 않을 만큼 기온이 낮았다. 가을의 정취를 즐길 수 있는 건 아주 잠시였고, 가을옷을 몇 번 입어보지도 못한 채로 곧장 겨울을 맞이하게 생겼다. 슬슬 겨울옷을 꺼내야겠다고 생각하며 호시우미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막 히루가미와의 데이트를 마치고 기숙사로 들어온 참이었다. 데이트는 즐거웠다. 두 사람은 영화를 보고 기숙사 근처 카페에서 따뜻한 커피를 마셨다. 연애를 시작한 지 한 달. 돌아서면 보고 싶고, 보고만 있어도 또 보고 싶어지는 나날들이었다. 분명 여러 차례 인사까지 하고 헤어졌건만, 히루가미는 여전히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기숙사 출입문 밖을 서성였다. 이대로 호시우미를 보내기가 못내 아쉬운 모양이었다. 이 바보가. 날도 추운데 빨리 가! 호시우미가 어서 가라는 손짓을 하자 히루가미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마지막 인사를 다시 주고받은 뒤에야 히루가미는 뒤를 돌아 교정으로 이어지는 언덕길로 사라졌다. 호시우미는 히루가미가 떠난 것을 확인하고 엘리베이터로 발을 옮겼다.
“좋아 보이시네요.”
“으아아아악, 깜짝이야!”
불쑥 들려온 목소리에 놀란 호시우미가 펄쩍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도대체 언제 나타난 건지, 엘리베이터 앞에 분명 아까까지 보이지 않았던 카게야마가 서 있었다. 이 자식은 요정이 아니라 저승사자를 하는 게 낫겠어. 호시우미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카게야마를 째려보았다. 이런 등장은 몇 번을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다.
“나타날 때는 인기척을 좀 내. 인간들은 그러면 놀란다고. 잘못하다간 심장마비로 죽어!”
“죄송합니다. 근데 혹시 지금 신고 계신 운동화, 이번에 새로 사신 거예요?”
“갑자기?”
“제가 운동화에 관심이 많아서요. 혹시... 슈프림 에어포스 원???”
카게야마가 이제껏 봐온 것 중 가장 생기 있는 눈빛으로 물었다. 눈썰미가 좋긴 하네. 내가 그 마음 알지, 기분이 좋아진 호시우미가 으쓱대며 한쪽 발을 내밀었다. 며칠 전 히루가미에게 선물 받은 운동화였다. 마침 자랑할 사람이 필요하기는 했다.
“맞아.”
“실제로 보니까 진짜 멋지다! 나도 같은 모델로 사야지.”
“같은 모델을 산다고? 그건 안 되겠는데.”
“왜요?”
“나랑 사치로랑 커플로 맞춘 거니까.”
“그게 왜요?”
“그게 왜요라니! 커플 운동화를 셋이서 신고 다닐 수는 없잖아. 나랑 사치로만 신을 거야!”
“뭐 어때요? 그럼 이 세상에 같은 모델 신고 다니는 사람들은 다 사귀는 거게요?”
아무튼 안 돼! 싫어! 그게 뭐가 어떻다고 그래요? 하여튼 쩨쩨하시긴... 쩨쩨우미. 뭐? 너 방금 뭐라고 했어? 쩨쩨우미요. 이 자식이, 요정이라고 봐줄 줄 알아? 엘리베이터에 타지도 않고, 호시우미는 한참이나 카게야마와 운동화에 대한 논쟁을 벌여야 했다.
“그래서, 왜 또 날 찾아온 건데? 운동화 이름 물어보러 온 건 아닐 거 아냐.”
“아, 네. 소원이 이루어지신 것 같아서 완료 처리 좀 하려고요. 여기 체크하고 서명 좀 해주세요.”
카게야마가 또 어디선가 나타난 태블릿과 펜슬을 꺼내들며 말했다. 저기 호시우미 씨. 왜? 거기 있는 요정 만족도 조사 별 다섯 개 주시면 안 될까요? 어이없네. 알았어! 기분이 좋아진 호시우미가 흔쾌히 대답했다. 별 다섯 개에 체크하고 서명란에 이름을 적은 뒤, 호시우미는 다시 태블릿을 그에게 돌려주었다. 카게야마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감사함다.”
“아니야. 내가 더 고맙지. 덕분에 사치로랑 사귀게 됐으니까. 근데 우리, 앞으로 또 만날 수도 있어?”
“아뇨. 저희는 소원 진행 중에만 만날 수 있어요. 성취 완료 처리가 되면 다신 못 볼 거예요.”
“그렇구나. 우린 서로 잘 안 맞는 것 같아. 그동안 고마웠고 다신 보지 말자.”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서로를 흘겨보던 카게야마와 호시우미가 손을 내밀어 마지막 악수를 했다. 그럼 안녕. 안녕히 가세요. 두 사람은 인사말을 주고받고, 각각 기숙사 출입구와 엘리베이터 쪽을 향해 등을 돌려 걸었다. 만약 카게야마와 친구나 동료로 만났다면 재밌게 지낼 수 있었을 텐데. 호시우미는 아쉬운 마음으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그새 정이라도 들었는지, 다신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잠깐! 잠깐만요, 호시우미 씨!”
그렇게 그가 탄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려던 순간이었다. 다급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카게야마의 손이 불쑥 안으로 들어와 문이 닫히는 것을 막았다. 카게야마는 갑자기 예상치 못한 상황이 생긴 듯 잔뜩 당황한 표정이었다. 호시우미는 얼른 열림 버튼을 누르고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왔다.
“무슨 일이야?”
“문제가 생겼어요.”
“무슨 문제?”
“소원 완료 처리가 안 돼요. 내역이 중복됐대요.”
“그게 무슨 말이야?”
“똑같은 내역의 소원이 이미 완료돼서 호시우미 씨 건 반려를 해야 한대요. 두 사람이 동일한 소원을 접수하면 먼저 이루어진 사람의 것만 완료 처리가 되거든요. 소원 하나에 요정 둘을 배당할 수는 없어서요.”
카게야마가 빠르게 태블릿으로 뭔가를 검색해 호시우미에게 내밀었다. 그 말은... 누군가 나와 똑같은 소원을 접수했었단 말야? 도대체 누가? 호시우미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그가 내민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화면에 뜬 것은 다른 누군가의 소원 내역이었다.
■ 소원 내역: 히루가미 사치로와 호시우미 코라이는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 소원 의뢰자: 히루가미 사치로
■ 접수 일자: 8월 3일(접수자: 요정 야치 히토카)
■ 완료 일자: 9월 14일(완료자: 요정 야치 히토카)
“호시우미 씨, 저희가 처음 만난 게 언제였죠?“
“우리가 만난 건... 시월......”
“이 소원은 호시우미 씨가 저한테 접수하기 전에 이미 완료됐네요. 야치 제 동기인데. 그러고 보니 호시우미 씨, 9월 쯤부터 그분을 좋아하시지 않았나요?”
“......”
“아니, 그럼 소원 접수할 때 미리 중복이라고 뜨게 해두던가. 기껏 완료 처리 하려니까 이제 와서 안 된다고 하면 어떡해? 하여튼 이 시스템 진짜 문제 있다니까요. 예전에도 비슷한 문제로 원로들한테 몇 번 건의한 걸로 아는데...”
어쩔 수 없죠. 이 소원은 다른 요정이 이룬 거라서 제 이름으로 수리할 수가 없어요. 죄송하지만, 다른 소원을 접수해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이번엔 철저히 확인하고... 호시우미 씨. 호시우미 씨? 제 말 듣고 있어요? 호시우미 씨?
소원 내역의 서명란엔 이미 다른 누군가가 이름을 적어두었다. 가지런한 글씨체가 눈에 익었다. 서명의 주인은 바로 히루가미 사치로였다. 순간 머리가 아득해지며 웅웅 귀가 울렸다. 카게야마가 뭐라고 외치는지는 더 이상 호시우미에게 들리지 않았다.
***
호시우미 코라이와 사랑하는 사이가 되게 해주세요.
쿨럭, 쿨럭. 문장을 뱉어낸 히루가미가 가슴을 들썩이며 심한 기침을 했다. 울렁대던 속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편안해졌다. 히루가미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명치를 더듬었다. 제가 가진 의학적 메커니즘으로는 방금 겪은 현상을 도저히 설명할 수 없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어떻게 이렇게 짧은 시간에 구토감과 메스꺼움을 불러일으켰지? 속에서 느껴진 이물감의 정체는? 혹시... 아이스크림에 무슨 짓을 한 건가? 히루가미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앞에 놓인 아이스크림 컵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생각을 읽었는지, 야치가 스푼으로 아이스크림을 떠 태연하게 베어 물었다.
때는 한여름이었다. 히루가미와 야치는 유명 아이스크림 집이었고, 가게는 폭염을 피하러 온 손님들로 북적였다. 사람들은 테이블마다 삼삼오오 모여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박장대소하며 수다를 떨기도 했고 사랑의 말을 속삭이며 아이스크림을 떠먹여 주는 연인도 있었다. 스피커에선 연달아 아이돌 음악이 나왔다. 가게의 손님들 중 누구도 이 두 사람이 이상하다고 느끼거나 관심을 가지지 않는 듯했다. 사람들에겐 히루가미와 야치가 그저 친구나 평범한 연인 정도의 사이로만 보일 것이다. 히루가미가 어느 정도 진정이 되자, 야치는 어디선가 태블릿과 펜슬을 꺼내와 그의 앞으로 내밀었다.
“수고하셨어요, 히루가미 씨! 그럼 이렇게 접수하는 걸로 할까요? 여기 서명 좀 해주시겠어요?“
“......”
소원이 가져오는 모든 결과에 대한 책임이 본인에게 있다는 뜻이에요. 야치의 친절한 설명이 이어졌다. 히루가미는 펜을 쥐고 조금 떨리는 손으로 이름을 적어넣었다. 흐음, 야치가 깍지 낀 손에 턱을 괴고 그 과정을 지켜보다 넌지시 그에게 물었다.
“짝사랑하신 지는 일 년 정도 됐네요? 작년에 구내식당에서 우연히 보고 첫눈에 반했고.”
“그걸 어떻게 아세요?”
“저한테는 파노라마처럼 히루가미 씨의 과거가 보이거든요. 근데 그렇게 오랫동안 좋아했으면서 왜 먼저 다가가지 않으셨어요? 말이라도 한번 걸어보시지.”
“아...”
호시우미에게 먼저 다가가지 않은 이유... 더 정확하게는 다가가지 못했던 이유. 히루가미의 입술이 바르작거렸다.
“두려워서요. 어설프게 다가갔다가 다시는 못 만나게 될 까봐...”
“에? 두려워요? 도대체 뭐가요? 히루가미 씨 인기도 많잖아요.”
“그런 건 하나도 의미 없어요.“
사랑 앞에 그런 건 정말 하나도 의미 없어요. 히루가미가 웃으며 중얼거렸다. 제법 괜찮은 조건의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타인의 존재만으로 이렇게까지 자존감이 낮아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캠퍼스에서 호시우미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은 구내식당이나 체육관, 또는 체대 건물 근처가 전부였다. 늘 체육학과 동기들과만 어울려 다니는 그는 운동 외의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이성 친구라든지 연애, 사랑 따위에도 마찬가지였다. 시간이 지나도 그에게 다가갈 틈은 보이지 않고, 마음은 바짝바짝 타들어 가기만 했다. 우여곡절을 통해 찾은 그의 SNS 계정은 아주 오래 전에 올린 학과 단체 사진 한 장이 전부였다.
“정말 당신이... 사람 마음을 움직일 수 있어요?”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대답이 달라질 수는 있지만, 웬만해선 가능해요!”
“진짜 말 한 마디 안 해 본 사이인데...”
히루가미가 저도 모르게 무릎에 올려둔 손을 꾹 쥐었다. 이런 허무맹랑한 이야기마저 믿고 싶어지는 걸 보면 제 마음이 간절하긴 간절한 모양이었다. 그런 그를 응원하고 싶었는지, 야치가 의자를 바싹 당겨 앉았다. 히루가미는 몇 입 먹지 못하고 스푼을 내려놓았지만, 그녀는 이미 아이스크림 컵을 깨끗하게 비웠다.
“히루가미 씨. 저 이래 봬도 입사 동기 중에 실적 1등이에요.”
“......”
“정말이에요. 저, 믿으셔도 돼요!”
야치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까만 하늘에서 색색의 불꽃이 터지듯, 그녀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이렇게 바라보다 보면... 언젠가 눈이 마주치는 순간도 있을까?
바라보다(Love Should Go On) 完.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케케묵은 책장 속, 한 편의 동화를 읽는 것 같은 시간이었길 바랍니다.🥰🥰🥰 트위터@mxnx_56
《바라보다-OFF THE RECORD》
카게야마: “호시우미 씨, 저번에 주신 햄버거 쿠폰 잘 먹었어요. 감사합니다.”
호시우미: “아니야. 뭐 그런 걸로. 그나저나 너는 야치 씨한테 영업을 좀 배워보는 게 어때? 거긴 진짜 요정이냐고 의심받은 적도 없다던데. 접수율도 거의 백 프로래.”
카게야마: “아, 이게 진짜 타고난 게 절반이에요. 저도 야치 얼굴로 태어났으면 그런 수모를 안 겪었겠죠. 그리고 저 하나 인상 바꾼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에요.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니까요. 전 세계 동화 산업을 싹 다 갈아엎어야 돼요! 작고 가냘픈 요정이 나오는 이야기를 법으로 금지한다던가...”
호시우미: “동심 때문에 그렇겠지. 소원을 들어주는 이야기에서 너 같은 애들이 튀어나오면 애들이 얼마나 무섭겠냐? 아, 그리고 너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
카게야마: “뭔데요?”
호시우미: “너 몇 살이야? 내 또래 같아서.”
카게야마: “저요? 저 곧 200살 돼요! 150살 이후로 안 세어봐서 정확하진 않지만... 하여튼 그 언저리일 거예요.”
호시우미: “......”
카게야마: “왜 그렇게 놀라세요? 너무 어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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