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혈, 신체손상 등 각종 트리거 요소 주의
눈앞이 몰락하고 떠오른다. 아득해진 머릿속으로 사고하는 것들은 전부 번진 잉크처럼 흐릿할 뿐이다. 사헌은 눈을 깜빡였다. 누군가 고약한 장난을 치는 것처럼 앞이 명멸하는 와중에 알 수 없는 질문들이 몰아쳐 머리를 부여잡고 헐떡였다. 뒷목에서부터 시작된 두통의 불씨는 어느새 온 머릿속에 번져 사고회로를 불태우고 있다. 말의 뜻조차 이해할 수 없어 고장난 라디오처럼 반복한다. 몰라요. 모르겠어요.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불현듯 그런 생각이 일었다.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이 두통도 원인을 제거한다면 언젠가 사라지고 말 고통 아닌가. 제 뇌실 안에 못처럼 박힌 혹을 도려낼 수 없다면 두뇌를 통째로 제거하는 게 마땅하다. 최선은 아니지만 현재로썬 꽤 괜찮은 생각 같았다. 그래서 사헌은 뇌를 꺼내려고 했다. 단단한 두개골을 부수고 뇌를 파헤쳐서 그 망할 혹을 어떻게든 하고 싶었다. 그런데 한껏 일그러진 시야 너머 달려든 흰 형체들이 몸을 억지로 붙들었다. 상흔으로 남은 어렴풋한 기억은 사지를 억누르는 흰 가운을 보는 것만으로도 트라우마를 자극했다. 갇힌 것처럼 좁아졌던 시야와 타들어가는 것만 같았던 왼쪽 안와. 죽음을 외치던 목소리는 어느새 비명에 가까운 절규로 탈바꿈해 있었다. 내 눈 눈알만큼은 안 돼 이젠 하나 밖에 없다고.
극심한 공포가 범람하며 숨통을 틀어막았다. 사헌은 짓밟힌 벌레처럼 꿈틀거렸다. 비명을 질러야 하는데 입이 없는 느낌이 들었다. 필름 같은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에 펼쳐지며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온갖 기억들이 머릿속에서 잔뜩 뒤엉키고 있었다. 지하철 안에서 약올리듯 눈알을 보여주던 김솔음, 힘 빠진 몸을 업은 채 묵묵히 걷던 김솔음, 날카로운 두통에 꿰뚫릴 때마다 이마를 맞대었던 김솔음, 태연한 얼굴로 거짓을 뱉으며 뒤통수를 갈기던 김솔음, 제 몸을 유린하고 집어삼키던 김솔음, 난생 처음으로 완연한 충만감을 느끼게 했던 김솔음...
전부 김솔음 때문이다!
죽음과도 같은 공포와 쾌락 모두 김솔음이 선사한 것이었다. 곤죽이 되어 일말의 생존 본능 밖에 남지 않은 머릿속마저 김솔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끔찍한 기분이었다. 얼굴을 일그러뜨린 사헌은 고개를 저으며 마구 버둥거렸다. 사방에서 팔이 달려들어 허덕이는 몸뚱이를 짓눌렀다. 억눌린 팔목과 발목이 답답해졌다. 억제대로 묶인 사지는 얼마 거동하지 못하고 팽팽해진 끈에 붙들렸다. 옴짝달싹 못하게 된 것을 깨달은 순간 팔이 따끔해지며 바늘이 꽂혔다. 주사기의 피스톤이 찰랑거리는 약물을 밀어내자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워져서, 사헌은 이내 스르륵 눈을 감아버렸다.
*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는 한낮의 방이었다. 푹신한 소파에 기대어 있던 몸을 일으키자 머리가 온통 띵했다. 사헌은 머리를 부여잡고 인상을 찌푸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따뜻한 느낌의 인테리어로 꾸민 방 벽엔 커다란 창문이 있었다. 창문을 바라보던 시선이 방 벽에 걸린 안내 문구로 향했다. 소파에 편안하게 앉아서 바깥 풍경을 구경하세요. 안내 문구를 빠르게 읽어내린 사헌은 거대한 창문으로 다시 시선을 옮겼다. 멀거니 앉아 햇살이 가득찬 한낮의 야외정원을 바라보고 있으니, 두려움으로 요동치던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 것 같았다. 짙은 탈력감에 작게 숨을 내뱉은 사헌은 고개를 숙인 채 피로에 절은 눈가를 문질렀다.
백사헌 사원님.
불현듯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사헌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창 밖에는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는 이가 앉아 있었다. 상흔처럼 남아 몇 번이고 곱씹었던 서늘한 낯을 하고서. 김, 김솔음?! 깜짝 놀란 사헌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리고 잠시 뒤 얼굴을 사정없이 일그러뜨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솔음의 낯을 한 그것은 물끄러미 자신을 올려다보더니 이내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백사헌 씨는 제가 솔음 님으로 보이나 보군요. 의외네요.
뭐, 뭐야?! 그쪽이 왜 여기에... 여긴 어디지?
여긴 여우상담실이고, 전 당신의 상담사예요.
여우상담실? 들어본 적이 있다. 오염된 사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내 심리상담실로, 주임급 이상에게는 무료로 제공되는 사내 복지 중 하나였다. 하지만 어쩌다가 자신이 여기까지 오게 됐지? 사헌은 마지막 기억을 더듬어봤다. 공황이 온 자신을 영은이 침착하게 달래며 긴급대응팀을 불렀다고 말하는 기억이 마지막이었다. 사헌은 입술을 깨물었다. 주임도 아닌 그저 평사원인 자신이 여우상담실까지 오게 되었다면, 그말인즉슨 사측에서도 여우상담실이 필요하다 판단할 정도로 자신의 정신이 오염됐다는 뜻이었다. 씨발...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한숨이 저절로 새어나왔다. 이걸 불행이라고 해야할지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푸석한 낯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는 사헌을 가만히 지켜보던 그것이 불쑥 말했다.
요 일주일 간 백사헌 씨의 어둠 탐사 참여 빈도가 현저히 줄었더군요. 최근 일신상의 무슨 변화가 있었나요?
...어둠 탐사를 배제당해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왜 배제당했을까요?
제, 제가 자꾸만 초보적인 실수를...
사헌 씨는 차석으로 입사할 정도로 능력 있는 인재인데, 왜 그런 실수를 했을까요? 업무를 원활히 수행할 수 없을 정도의 정신 상태에 봉착해 있었나요?
네.
그리고 그 정신 상태는 어둠에 노출된 이후부터 시작되었겠군요.
...네.
그러자 그것이 사헌을 찬찬히 뜯어보더니 슬쩍 물어왔다.
어둠과 얼마나 깊은 접촉을 했죠?
...꼭 대답해야 하나요?
경계심 가득한 목소리가 저절로 튀어나왔다. 사헌의 말에 솔음의 낯을 한 그것은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이내 안심하라는 듯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제 모습에 거부감을 느끼고 있군요.
......
당신의 무의식은 이 모습을 강렬하게 투영하고 있는데, 동시에 두려워하고 있어요. 그는 당신의 동기일 뿐인데. 왜일까요?
알고 싶지 않았다. 말하고 싶지도 않고.
아니에요. 사헌 씨는 이미 알고 있어요. 다만 입 밖에 내기를 꺼려할 뿐이죠.
......
그가 당신에게 무슨 짓을 했나요?
사헌은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상담사는 단 몇 마디만으로 솔음과 자신의 오염과의 연관성을 간파했다. 그런 자에게 김솔음이 제게 저지른 만행들을 털어놓는 게 꺼려졌다. 게다가 이 신용할 수 없는 미친 회사 소속의 상담사에게 늘어놓기엔 솔음과 자신의 본딩은 타인과의 대화에서 꺼내놓기엔 너무 내밀한 사정인지라 거부감이 앞섰다. 사헌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런 사헌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상담사가 입을 열었다.
지속적으로 외계인이 뇌를 조종하고 있다고 주장했던데, 단순한 망상으로 보이지는 않아요.
......
당신의 말을 믿어요. 그러니 말씀해주시겠어요?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게끔.
내 말을 믿는다고? 사헌은 입술을 달싹였다. 외계인이 제 뇌를 지배하고 조종한다는 제 주장은 터무니없는 헛소리로 취급 받은 지 오래였다. 그런데 이렇게 선뜻 자신의 말을 믿는다고 말하는 이가 제 눈앞에 나타났다. 당사자의 얼굴을 한 채로. 하지만... 그렇게 세상 일이 마냥 팔자 좋게 돌아갈 리 없었다. 솔음도 모자라 정체 모를 상담사에게까지 제 약점과도 같은 패를 까발릴 생각도 없었고. 사헌이 입을 다물자 상담사는 턱을 괴며 사헌을 바라보았다. 솔음의 낯을 한 얼굴에 의뭉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답하기 곤란하다면 질문을 바꿀게요. 사헌 씨는 뇌를 조종당하면서 어떤 느낌을 받았나요?
......
너무 경계하진 않으셨음 하네요. 전 당신을 돕고 싶고, 이건 그저 느낌을 묻는 질문일 뿐이니까요.
...불쾌했습니다. 기분 나빴고요.
왜 불쾌했을까요?
허용한 적 없으니까요! 그건... 제 멋대로 침범해서는 입맛대로 제 마음을 가지고 놀았어요.
......
그건 제가 아니었어요. 그때 제가 했던 말, 행동, 감정들... 전부.
그렇군요. 왜 자신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까요?
평소의 저였다면 느꼈을 리 없던 것들을 느꼈으니까요. 이상하잖아요, 내가...
김솔음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이렇게나 조여드는 걸 느끼다니.
솔음의 얼굴을 한 상담사를 바라보던 사헌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무릎 위에 올려둔 손에 힘이 들어가며 주먹을 꽉 쥐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기분이지? 한없이 가슴이 아프고 헛헛했다. 이런 감정을 느낄 수도, 느껴서도 안 되는 대상에게 사헌은 흔들리고 있었다. 상식적인 인간이라면 자신을 끝없이 기만하고 억압하는 잔혹한 외계인에게 이런 류의 감정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사헌은 괴로움 섞인 탄식을 뱉으며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오염에 혹사당하던 머리가 결국 고장나고 만 것이다.
솔직하게 이야기해줘서 고마워요. 그동안 아주 혼란스러웠겠어요. 하지만 정말로, 그것들이 당신의 것이 아니라고 단정지을 수 있을까요? 순전히 세뇌로 인해 유발된 착각일 뿐일까요?
...네?
떠올려 봐요. 당신의 의식이 타의에 의해 주물러지기 이전의 마음을요.
사헌은 입술을 깨물었다. 사헌은... 기억하고 있었다. 이마를 쓸어넘기던 서늘한 손의 감촉을, 업혔던 등에서 풍기던 익숙한 섬유유연제의 냄새를, 희미한 달빛이 스며든 얼굴이 짓던 미소를, 맞닿은 이마에서부터 번지던 연결된 느낌을, 그때마다 간지럽게 뛰던 심장박동의 울림을. 얼굴을 가린 손바닥 사이로 울음을 닮은 한숨이 샜다. 마주하기 싫었다. 제가 느끼는 이 끔찍한 감정의 출처가 그 무엇도 아닌 자기 자신의 의지로 시작된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사헌은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그저 참담한 표정을 지은 채 멍하니 제 손바닥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런 사헌에게 상담사는 차분히 말했다.
그런 감정들은 우발적인 사고처럼 강렬하게 일어나곤 하죠. 준비되어 있지 않은 이에겐 재난처럼 느껴질지도 몰라요.
......
하지만 당신은 살아남았어요. 언제나 그랬듯이, 악착같이.
......
그러니 그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건 살아남은 당신의 몫이에요.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나요?
속이 뒤틀려 저도 모르게 삐딱한 투가 튀어나왔다. 제가 아무리 정신이 무너질 정도로 괴로웠고 두려웠다고 한들 김솔음에게는 고려 대상조차 되지 못했다. 그러니 지금 자신이 여우상담실에 이렇게 앉아있는 것 아닌가. 김솔음과의 본딩이 지속되는 한 심장을 조여오는 이 가시덤불 같은 감정 따위로는 아무 것도 바뀌지 않을 것이었다. 사헌의 말에 상담사가 사헌을 빤히 응시했다. 그러더니 나지막이 말했다.
미봉 상태로는 언제까지나 고착될 뿐이에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직면해야 해요.
......
직면하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변화가 시작될 거예요. 어떤 형태로든 그건 당신을 송두리째 바꿔 놓을 테죠. 거부감도, 두려운 마음도 이해해요. 분명 당신 같은 이들에겐 처음일 테니까요.
......
하지만 그건 당신을 약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당신의 약점도, 결함도, 허점도 아닙니다. 오히려 당신의 고질병적인 실존적 불안을 해결할 답이 될지도 모르죠.
덤덤하게 말한 상담사가 손을 내밀었다. 손에는 탐스럽게 익은 작은 열매가 놓여 있었다. 사헌이 손을 내밀자 상담사가 사헌의 손에 열매를 쥐어주었다.
꼭꼭 씹어 드시고 가세요.
......
그리고 또렷한 정신으로 생각해봐요. 이제부터 어떻게 하고 싶은지.
♬♩♪♬~♪♪♩~
가벼운 왈츠 음악이 흘러나오자 사헌은 고개를 들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창가에 서 있던 솔음의 형상을 한 상담사는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사헌은 손에 쥔 붉은 열매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홀린 듯이 열매를 입에 넣었다. 지긋지긋한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던 불안, 공포, 혼돈이 천천히 사그라들며 장막이 걷힌 것처럼 정신이 또렷해졌다. 아. 머릿속이 맑아지자 통증과도 같은 감정이 선명해지며 사헌은 탄식을 뱉었다. 어째서인지 상담사가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
상담실의 문을 열고 나오자 사택 거실이 눈앞에 나타났다. 무심코 뒤를 돌아보자 방금 전까지만 해도 상담실의 문이었던 곳은 어느새 사택의 제 방의 문으로 변해 있었다. 사헌은 얼떨떨하게 방문을 바라보다 이물감이 드는 바지 주머니를 더듬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 보니 <여우상담실> 문패가 손에 잡혔다. 문패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사헌의 귓가에 낮은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백사헌.
사헌은 고개를 들어 거실에 서 있는 솔음을 마주했다. 늘 속모를 얼굴을 하던 솔음의 낯에,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고 하면 아직 오염의 후유증이 남아 생긴 착각일까. 하지만 솔음과 본딩을 맺은 이래로 이렇게나 맑은 정신은 처음이었다. 사헌은 굳은 얼굴로 솔음을 바라보았다. 그 어느때보다도 차갑고 고요한 분노가, 굳은 안면 근육 아래 넘실거리고 있었다.
문패, 더 쓰면 안 돼.
......
상담실이라고 해도 어둠은 어둠이야. 자칫하면...
왜요? 그쪽이 나한테 건 세뇌가 풀릴까봐요?
......
세뇌는 이미 풀렸어요. 그런데도 아직도 저를 가지고 놀고 싶으신가봐요.
사헌은 헛웃음을 지었다. 솔음으로 비롯된 그 모든 사달 후에 솔음이 선뜻 사과를 한다거나 잘못을 뉘우치는 모습을 보여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건 정말 너무하잖아. 머릿속을 곤죽으로 만들어놓고 사람을 기만하여 망가뜨려 놓은 주제에,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한결같은 고자세로 나를 통제하려 드는 게. 사헌은 탄식했다. 환멸이 났다. 제게 그 어떤 일이 벌어져도 뻔뻔하리만치 같은 태도를 취하는 솔음이, 내키지 않는다면 언젠가 또다시 그 마수를 뻗어 제 뇌를 충분히 주무를 수 있다는 사실에 숨이 막혔다. 본딩이 지속되는 한, 자신은 어쩌면 평생 존립의 위협을 끌어안고 불안에 떨며 살아가야 할 게 분명했다.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열화와 같은 감정이 불씨처럼 퍼졌다. 사헌은 주먹을 꽉 쥐며 분노를 간신히 억눌렀다.
그런 게 아니야.
......
나는 그냥 네가 걱정이 돼서...
그 말을 들은 순간 사헌은 폭발했다. 꽉 쥔 주먹을 뻔뻔한 말을 내뱉는 얼굴에 있는 힘껏 꽂았다. 갑자기 주먹에 맞은 솔음은 휘청거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멱살을 잡고 거칠게 뒤로 밀치자 솔음은 쿠당탕 소리를 내며 바닥 위로 고꾸라졌다. 사헌은 곧바로 쓰러진 몸 위에 올라타 한 손으로 솔음의 턱을 움켜쥐었다. 씨발새끼야. 거칠게 욕설을 짓씹으며 염치 없는 낯짝에 다시 주먹을 갈겼다. 퍽. 고개가 돌아가자 다시 턱을 세게 쥐어 원위치시켰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이 사헌을 마주보았다. 가차없이 다시 주먹을 꽂았다. 오래 전부터 뒤엉켜 있던 서슬 퍼런 분노가 아직 부족하다고 사헌을 부추겼다. 그래서 뭐에 씌인 것마냥 계속 주먹을 내질렀다. 하얀 얼굴이 멍자국으로 울긋불긋해지고 엎질러진 잉크처럼 번진 코피가 손등을 적실 때까지.
니가 뭔데 나를 걱정해. 씨발 니가 뭔데!
......
사람 하나 망가뜨려놓고 걱정? 지랄 마, 니가 걱정이란 걸 할 줄 알았으면 이 사달도 안 났어. 알아? 아냐고 이 싸이코패스 새끼야!
......
재밌었어? 재밌었겠지. 말 한마디 한마디에 조바심내고 살고 싶어서 벌벌 기는데 즐거워 미칠 지경이었겠지!
그렇게 말하는데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어올랐다. 삼켜내려고 노력했지만 가둔 물이 범람하듯 이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난 괴로웠어! 어떤 날은 니가 나를 위험에 빠뜨려서 좆같았고 어떤 날은 니가 나를 챙겨줘서 헷갈렸어. 도무지 니 속을 알 수가 없어서 초조했어. 늘 말을 돌릴 뿐 아무런 확신조차 주지 않아서 불안했어. 무서웠어. 잘해주다가도 언제든지 내 머릿속을 읽고 나를 죽일까봐. 넌 나를 좋아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굴다가도 필요에 의해서라면 가차 없이 죽이려 들었잖아. 또다시 나를 그 깊은 지하로 자비없이 추락시키고 나를 비웃을 생각이었잖아. 내가 얼마나 괴롭고 무서웠고 슬펐고 끔찍했는지 너는 전부 알잖아 읽고 있었잖아. 이제 알겠어. 넌 그냥 이 모든 게 즐거운 거야. 넌 나를 초라하게 만들어 놓고 비참해하는 나를 보는 게 재밌는 거야. 그 과정에서 내가 망가지든 고장나든 상관 없는 거지 어차피 난 너한테 존나 아무것도 아니니까. 그래서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거야 나에게 가혹하기만 한 이 폭력적인 연결을 영원한 종속을. 난 연결됐다는 감각만으로 자꾸만 숨막혀 죽을 것만 같은데 왜 너는 김솔음 너는 괴로워하지 않는 건데 왜 본딩을 끊어 주지 않는 건데.
불에 달군 쇠공이 목구멍에 걸린 것 같다. 자꾸만 뜨겁게 치밀어 오르는 말들을 악을 쓰며 뱉었다. 그래도 후련하지가 않았다. 갈기갈기 찢긴 마음은 여전히 괴롭기만 했다. 억울했다. 항상 이렇게 자신만 괴로워지는 게. 그러니 지금 자신이 괴로운만큼 솔음도 괴로워져야 공평한 거 아닌가. 해소되지 않는 원통함은 궤도를 바꿔 사헌의 손을 뻗게 했다. 죽어. 거칠게 목을 움켜쥐자 고통스럽게 구겨지는 얼굴. 눈을 부릅뜨며 똑바로 마주했다. 죽어버려. 기도가 틀어막히며 숨을 쉴 수 없게 된 솔음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큭, 크흑... 컥컥대는 솔음의 목을 틀어쥔 채 사헌은 손에 힘을 점점 세게 주었다. 반면 괴로운 듯 사헌의 손목을 잡는 솔음의 손에서는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 마치 의식적으로 힘을 주지 않으려는 듯한 미약한 손길이었다. 그 미묘한 움직임을 사헌은 느낄 수 있었다. 알아챈 순간 가슴께가 뻐근해지며 목을 조르던 손에 힘이 풀렸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고 물에 빠진 것처럼 일렁였다. 비탄을 품은 숨이 터지며 차오른 눈물이 흰 뺨 위로 툭 떨어졌다.
니가 죽어야 내가 숨을 쉬고 살 수 있을 것 같단 말야...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다. 사헌은 눈가를 마구 문질렀다. 무참했다. 본딩을 끊기 위해서는 둘 중 하나가 죽어야 한다. 그래서 목을 졸랐지만 차마 죽일 수 없었다. 전부 자신을 끝없이 몰락시키는 동시에 떠오르게 만드는 이 상처를 닮은 욱신거림 때문이다.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절망감에 사헌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이건 전부 가짜잖아. 기만질로도 모자라 세뇌까지 당한 후유증이 잔상처럼 남은 찌꺼기일 뿐이잖아. 사헌은 멀거니 솔음을 내려다보았다. 잔뜩 일그러진 채 연신 숨을 몰아쉬는 낯짝을 직시했다.
...왜 그딴 표정을 짓는 건데. 마치 상처받기라도 한 것처럼.
환멸이 난 사헌은 인상을 구겼다. 바닥에 널브러진 솔음을 두고 몸을 일으켰다. 소매로 거칠게 눈가를 문질러 닦으며 생각했다. 자신은 결국 망가져버린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 자신을 덮친 이 혼란스러운 감정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죽이고 싶을 만큼 증오스러운 동시에 가슴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사람의 마음이란게, 이렇게나 날을 세우면서도 한없이 나약해질 수도 있는 거였나. 사헌은 자조했다.
그러니 그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건 살아남은 당신의 몫이에요.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자신이 이 감정에 이렇게나 흔들리고 괴로워해도 솔음에겐 아무 것도 아닐 텐데. 사헌은 더이상 솔음을 믿지 않는다. 솔음이 지금 짓고 있는 표정도 순간을 모면하려는 역겨운 가면일 뿐이다. 오히려 제 이런 반응이 솔음의 유흥을 돋구는 짓일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니 꽉 쥔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역시 비합리적이고 나약해 빠진 감정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혼자 상처받게 되잖아...
그러니 사헌은 스스로를 보호해야 했다. 자신을 기만하고 뇌를 조종하려 드는 미지의 위협과 자신을 한없이 약하게 만드는 불합리한 감정으로부터 멀어져야 했다. 다시는 머릿속에 뿌리내릴 수 없게 송두리째 파헤친 뒤 빈자리엔 소금을 뿌릴 것이다. 고통스럽겠지만 사헌의 머릿속은 솔음 때문에 이미 폐허가 됐으니 이쯤이야 얼마든지 견뎌낼 수 있다. 신물처럼 올라오는 비참함을 삼켜내며 사헌은 내뱉었다.
사택, 나갈 거예요.
......
다시는 제 눈앞에 나타나지 마세요. 그쪽 얼굴 보는 것만으로도 역겨우니까.
가시 돋친 말들은 침묵 속에 가라앉았다. 눈가를 다시 한 번 거칠게 문지른 사헌은 비틀대며 방문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떨리는 한숨을 겨우 내뱉고,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문을 거세게 닫았다. 쾅! 소음 뒤 끔찍한 고요가 사택 안에 내려앉았다. 감히 입술조차 달싹일 수 없는 적막이었다.
*
사헌은 에어비앤비를 구했다. 임시 숙소에 머무르는 동안 집을 하루빨리 구해 완전히 독립할 생각이었다. 예상치 못한 지출이 생겨 불쾌했지만, 그보다 얇디 얇은 벽을 사이에 두고 제 정신을 망가뜨릴만큼 위험한 존재와 동거를 유지한다는 게 더 위협적으로 다가와 어쩔 수 없이 내린 결단이었다. 이 씨발놈의 본딩 같은 건 일단 집을 구하고 난 뒤 차근차근 생각해보기로 했다. 사헌의 삶에 부닥친 김솔음이 유발한 역경과 고난에 의한 피해를 지금이라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원인과 격리되는 게 최우선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혼자 살게 된 사헌은 때때로 낯선 부재감을 느꼈다. 아침마다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던 소리, 거실의 TV에서 흘러나오던 아동용 애니메이션의 오프닝 노래, 사택을 휘젓던 적당히 차분하고 묵직한 발걸음 소리 따위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문득 실감할 때마다 불청객처럼 불쑥 찾아온 그 느낌은 공허함이었다. 혼자 있는 숙소가 쓸쓸하고 헛헛하게만 느껴진 것이다. 외로움을 닮은 공허함에 사헌은 다시금 괴로워졌다. 본딩을 통해 찰나동안 맛보았던 완전해지는 감각이 혼자인 자신을 너무나 허무하고 헛된 존재처럼 느끼게 했다. 자신은 혼자인 채로 한평생을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는 동안에도 사헌은 회사를 꼬박꼬박 다녔다. 다시는 눈앞에 나타나지 말라는 경고를 새겨들은 모양인지 사헌은 솔음을 코빼기도 볼 수 없었다. 애초에 회사 내부에서 의도적인 만남을 갖지 않는 한, 이 거대한 회사에서 타 부서에서 근무하는 동기를 덜컥 마주칠 일은 잘 없긴 했다. 그게 현재 사헌에게 있어서 유일하게 다행인 점이었다.
병가 후 다시 사무실로 돌아온 사헌을 보고 과장은 괜스레 어깨를 두들기며 주절댔다. 사헌 씨 아팠다고 들었는데 얼굴이 해쓱해졌군 요즘 애들은 참 허약하단 말이지 나 때는 말이야 병가는 꿈도 못 꿨어 열이 40도를 찍어도 출근을 해서 사무실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이 말이야... 산업혁명 시대st 노동 착취 현장에서 근무했다는 걸 자랑스럽게 여기는 개돼지 같은 발언에 사헌은 눈을 게슴츠레 뜨며 바닥 타일의 무늬를 헤아렸다. 투쟁을 통해 겨우 얻어낸 노동자의 기본 권리를 침해하는 말들... 존나 사측이세요? 니도 노동자야 씨팔 경제위기 오면 당신부터 희망퇴직이야 미친 만년과장새끼야... 속으로 뇌까린 욕설은 언제나 마음 속 깊이 묻은 채.
출근하자마자 과장에게 바가지가 벅벅 긁힌 사헌은 제 자리로 터덜터덜 돌아가 의자에 풀썩 앉았다. 신경질적으로 컴퓨터를 킨 사헌의 눈에 반짝이는 메신저의 알림이 띄었다. 사헌은 반사적으로 메신저를 클릭했다.
17기 고영은
몸은 좀 어때요?
많이 회복돼서 오늘 출근했습니다
정말 다행이네요
혹시 점심시간에 시간 돼요? 만나서 얘기 좀 해요
키보드를 타이핑하던 손이 멈칫했다. 왜 갑자기 먼저 만나자고 하는 걸까. 입사 시기가 동일한 동기일 뿐, 그렇게 가까운 사이도 아닌 영은이. 삐뚤어진 사고방식은 제게 가장 익숙한 결론을 내렸다. 영은은 제가 세뇌를 벗어나는데 있어 가장 큰 도움을 주었으니, 그와 관련된 보상을 요구하고자 만나자는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영은은 제게 빚을 진 상태였으니 그걸로 청산하면 되는 거 아닌가? 어쩌면 영은이 이번 만남에서 자신과의 채무 관계를 확실히 정산하려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사헌은 선뜻 답장을 남겼다.
네 그렇게 해요
*
점심시간, 각자 식사를 마치고 만난 영은과 사헌은 사내 카페 구석 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단 둘이서 얼굴을 맞대고 앉아있으니 어딘가 멋쩍어진 사헌은 괜히 아메리카노를 쫍쫍 빨며 카페 내부를 두리번거렸다. 영은은 가만히 앉아 그런 사헌을 지켜보았다. 뚫어질 듯한 시선이 부담스러워진 사헌이 퉁명스레 입을 열려고 할 때쯤, 커피잔을 연신 만지작거리던 영은이 먼저 말을 꺼냈다.
너무 빤히 쳐다봐서 죄송해요. 정말로 잘 회복되었는지 제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어요.
......
마지막으로 봤던 사헌 씨가 정말 위태로워 보였어서, 걱정을 많이 했거든요.
...걱정이요.
네.
그렇게 말한 영은이 민망한 듯 뒷목을 손으로 주물렀다.
사실 그동안 사헌 씨가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오염될 수 있으리라 생각해본 적 없었어요. 사헌 씬 몸을 알아서 잘 챙기는 타입이니까.
......
그래서 더 충격적으로 다가왔었나봐요. 사헌 씨가 오염된 모습이.
...오염이야 일하다 보면 누구나 당할 수 있는 거죠. 제가 무적은 아니잖아요?
그건 맞는 말이지만, 마음에 걸리는 게 있기도 했고요.
신중하게 말한 영은이 사헌을 응시했다. 사헌은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뭐가 마음에 걸렸는데요?
...제 말에 기분 나빠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냥 걱정에서 우러나온 말일 뿐이니까.
그러니까 그게 뭔데요.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오염이 사헌 씨의 인지 기능을 완전히 망가뜨릴 정도로 착실히 진행되는 동안, 제가 옥상정원에서 사헌 씨를 발견하기 전까지 주변에 있는 그 누구도 그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게...
...팀에서는 어둠 탐사를 배제당한 상태였어요. 과장님과 대리님은 파견으로 바빠서 사무실엔 잘 들어오지도 않았고요.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제가 궁금한 건... 사헌 씨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을 사람이에요. 솔음 씨요. 같은 사택을 쓰고 있잖아요. 그리고 두 분은 제가 알기로는... 그런 사이이기도 하고요.
......
정말 솔음 씨도 사헌 씨가 오염되었다는 걸 모르고 있었나요?
사헌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 오염이 솔음에게서 비롯된 것이라는 걸 과연 영은은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잠시나마 마음 깊은 곳에 애써 묻어두었던 감정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싸늘하게 굳은 사헌의 표정에 영은은 다급히 덧붙였다. 솔음 씨를 욕하거나 이간질하려는 게 아니에요. 하지만...
어째서인지 사헌 씨가 고립되고 있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서...
그 말을 들은 순간 발을 딛고 앉은 땅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래, 자신의 뇌가 곤죽이 되는 동안 김솔음은 무얼 했지? 그저 엉망인 자신을 실컷 유린하고 관조했을 뿐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마치 <노아의 방주>에서처럼 칠흑같은 어둠 속으로 끝없이 추락하는 기분이 들었다. 아, 통증과도 같은 저릿저릿한 감각이다. 겨우 괜찮아지려고 마음을 다스리고 있었는데 다시금 엉망으로 찢기고 있다. 더이상 상처받지 않기 위해 끊어내려 하는 지금까지도 이토록 솔음은 제게 상처만을 안기고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입에서는 신경질적인 웃음이 터져나왔다.
하하! 당신이 했던 말, 이제야 알겠어요.
......
난 정말 외롭고 불쌍한 인간이었어. 멍청하게도!
보답은커녕 소중하게 여겨지지도 못하는 마음이 이리도 외로울 줄이야. 참담한 느낌이다.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을 만큼 지독하다. 끔찍한 추락감을 견디지 못한 사헌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카페 밖으로 뛰쳐나갔다. 사헌 씨! 뒤에서 들리는 영은의 외침 따위는 한 귀로 흘린 채 사헌은 계속 걸었다. 알아 안다고 내가 그 새끼한테 뭣도 아닌 건 이미 알고 있다고 근데 왜 자꾸 나한테 그 씹새끼 얘기를 못 꺼내서 안달인데 씨발... 뇌까리는 사헌의 팔목을 누군가 붙들었다.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사헌을 따라잡은 영은이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놔요. 차갑게 뱉은 사헌이 영은의 손을 뿌리쳤다.
잠깐만요. 내가 실례했어요. 미안해요.
됐어요. 붙잡지 마세요.
아직 할 말이 남았어요.
전 그쪽이랑 더 할 얘기 없으니까 서로 갈 길 가죠.
아뇨. 저는 아직 남았어요. 그러니 차분히...
그만 하라고요!
팔목을 붙잡던 영은의 손이 멈칫했다. 영은을 돌아보는 사헌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무너진 것처럼 황폐한 낯에 격렬한 감정이 스쳤다. 사헌은 영은을 돌아보며 쏘아붙였다.
왜 내게 그런 말을 해요? 김솔음 그 새끼가 나한테 뭐라도 되는 것 같아서요? 걘 아무 것도 아니에요 나한테! 그 개자식이랑 나는 사귄 적도 없는데 멋대로 착각한 건 그쪽이잖아요.
...사헌 씨.
괜한 오지랖으로 사람 짜증나게 만들지 말고 본론이나 얘기해요. 제게 진 빚, 이번 일로 청산하자고 할 생각이었죠? 제가 그쪽한테 빚을 졌으니까. 그래요, 청산해드릴게요. 그러니 좆같은 오지랖 부릴 시간에 포인트나 어떻게 긁어모을지 고민하기나 하라고요. 가만히 있던 사람 들쑤셔서 기분 잡치게 하지 말고.
쏟아지는 날선 말에 영은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씩씩대는 사헌을 가만히 바라보다, 영은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이번 일로 사헌 씨가 제게 빚을 졌다고 생각한 적 없어요. 그건 그냥 호의였어요.
...호의요?
네, 호의. 대가를 바라지도, 요구하지도 않을 거예요.
그럼 뭐, 제가 감사해하길 바라세요? 웃기지도 않네.
삐딱한 사헌의 말에 영은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러나 곧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감사할 필요는 없어요. 그런 말을 들으려고 한 행동이 아니니까.
...일전의 제 발언을 그대로 돌려준 영은에게 한 방 먹은 기분이 들었다. 어안이 벙벙해진 채 영은을 바라보기만 하는 사헌을 보며, 영은은 덧붙였다.
사헌 씬 모든 걸 이해타산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마냥 합리적일 것만 같은 그 시선이 어떻게 보면 그 무엇보다도 스스로의 시야를 좁게 가둔다는 사실은 참 역설적이죠.
......
대가를 바라지 않는 호의를 베푸는 게, 사헌 씨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나요?
......
하지만 적어도 저는 충분히 가능해요. 사헌 씨는 함께 위기를 헤쳐나간 동료니까요. 그리고 도움이 필요한 동료를 기꺼이 돕는 건, 당연한 일이잖아요.
동료. 사헌은 저도 모르게 그 단어를 혀로 굴려봤다. 익숙한 단어였지만 입에 머금는 순간 낯선 느낌으로 변모했다. 이상한 기분이 들어 멀거니 서 있는 사헌에게 영은은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선을 넘은 건 미안해요. 하지만... 이 말만은 하고 싶어요.
......
전 사헌 씨가 외롭고 불쌍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제는.
......
그냥... 이렇게 사헌 씨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걸 항상 알아주셨으면 해요.
그 말에 사헌은 멍해졌다. 영은의 단단한 눈빛이 그 말이 거짓 한 톨 없는 진심에서 흘러나온 말임을 여실히 느끼게 했다. 제 오지랖으로 더이상 사헌 씨를 곤란하게 만들지 않을게요. 그럼 다음에 봐요. 영은은 그렇게 말하고는 먼저 복도를 지나 사라져버렸다. 혼자 남은 사헌은 잠시 멍하니 서서 영은의 말들을 곱씹었다. 사헌 씨는 함께 위기를 헤쳐나간 동료니까요. 혀에서 떨어지는 동료라는 말의 어감이 어딘가 부드럽게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복잡한 머릿속을 끌어안고 사무실로 돌아와 자리에 앉는데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대리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외근 나갔다더니 방금 돌아온 모양이었다. 설마 또 짬처리? 불안한 기색을 품은 시선이 대리의 손으로 향했다. 매뉴얼이 적힌 두꺼운 서류더미 대신 유명 프랜차이즈 카페의 테이크아웃 잔이 대리의 손에 들려 있었다. 사헌의 시선을 알아챈 대리는 피식 웃으며 테이크아웃 잔을 사헌의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녹차야. 독소 배출에 효과가 좋대. 그래서 난 오염되면 녹차 마시거든.
...아, 감사합니다.
얼굴이 반쪽이 됐네. 많이 아팠어?
그냥, 뭐...
상담실은 다녀왔고?
네.
확실히 눈빛부터 다르네. 그땐 완전 흐리멍텅해가지고는... 난 사헌 씨 아닌 줄 알았다니까?
그 말에 사헌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하하 그랬나요... 그렇지만 사헌은 이내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웃어넘겼다. 암튼, 사헌 씨마저 없어서 저 과장이랑 단둘이 있는게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사헌 씨가 복귀해서 다행이야. 대리는 장난스레 말하며 사헌의 어깨를 툭 치고는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사헌은 괜스레 대리가 툭 치고 간 어깨를 매만졌다. 짜증나기만 했던 대리의 오지랖 넓은 성격이 꽤 나쁘지 않게 느껴질 때도 있다니, 참 별일이었다.
*
사택을 뛰쳐나온 지도 몇 주, 그동안 사헌은 일상을 정상 궤도에 되돌려 놓기 위해 부던히 노력했다. 그 노력은 헛되지 않았는지 사헌은 별 잡음 없이 일상으로 빠르게 복귀할 수 있었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러했다.
모든 건 김솔음과 본딩을 맺기 이전처럼 돌아갔는데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더니 늘 붙어 있던 존재감이 부재하자 허무해졌다. 억지로 도려낸 곳에서부터 번진 공허감이 뿌리를 타고 올라와 사헌을 서서히 말라붙게 했다. 텅 빈 숙소에 혼자 누워있다 보면, 마치 알맹이 없이 껍데기만 존재하는 기분이 들어 사헌은 업무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하루종일 일에 바쁘게 시달리다 귀가해 쓰러지듯이 잠들면 그런 생각 따위는 더이상 머릿속에 차지할 공간도, 곱씹을 기력도 없어졌기 때문이다.
사헌은 언제든지 사용할 준비를 마친 부품처럼 굴었다. 꿈결 수집부터 긴급 지원까지 건수만 생기면 앞뒤 잴 것도 없이 자진해서 어둠에 뛰어들다 보니 어느새 포인트는 가공할 만한 속도로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앞자리가 몇 차례나 바뀐 포인트 누적액을 볼 때면 그나마 마음이 편해졌다. 제 일상을 무너뜨린 재앙의 그림자에서 조금씩 벗어나 폐허가 된 제 머릿속을 서서히 재건해내고 있다는 증명처럼 느껴졌으니까.
그렇게 닥치는 대로 일감을 떠맡던 사헌은 어느 날 매뉴얼과 등급이 확정되지 않은 어둠 탐사를 제의받았다. 미확정 어둠일수록 보상이 짭짤하다는 걸 잘 알고 있던 사헌은 잠시 동안의 고민 후 승낙했고, 공지대로 향한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헌은 회의실에 모인 이들의 얼굴을 스캔했다. 그리고 사헌은 그중 한 얼굴을 발견하고 얼어붙었다. 꿈에서도 잊을 수 없는 얼굴, 김솔음이 보란 듯이 회의실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짙은 피로가 먹구름처럼 깔린 얼굴이다. 시선을 느낀 솔음이 고개를 돌려 사헌을 바라보았다. 사헌은 불에 데인 것마냥 황급히 고개를 돌려 솔음의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미리 와 있던 이들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며 솔음에게서 가장 멀리 떨어진 자리를 찾아 앉았다. 사헌은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면서 고개를 숙인 채 책상 위를 노려보았다. 씨발, 김솔음도 참여하는 프로젝트인 걸 알았다면 이 회의실 근처에도 오지 않았을 거다. 마음만 같으면 당장이라도 회의실을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사헌은 차마 그럴 수 없었다. 공적인 일에 사적인 감정을 끌어오는 어리석은 짓으로 제 평판을 깎아먹고 싶지 않았다.
사헌 님!
텅 비어있던 옆자리에 누군가 앉으며 말을 걸었다. 반가움이 묻어나는 목소리에 사헌은 고개를 들었다. 왜소한 체격의 소년 같은 인상의 남자. 윤조였다. 아, 오랜만이네요. 입꼬리를 애써 끌어올린 사헌이 뱉었다.
그때 이후로 이렇게 직접 만나는 건 처음인 것 같아요. 잘 지내셨어요?
그냥, 뭐... 늘 똑같죠. 윤조 씨는요?
저도 그래요. 그치만... 그때보단 어둠 탐사에 익숙해진 것 같아요.
그렇군요.
호기롭게 내뱉는 윤조를 보며 사헌은 시큰둥히 대꾸했다. 미확인 어둠 탐사에 배정된 마무리팀 초짜 사원은 또다시 저승길로 떠밀렸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그 사실을 구태여 지적하지 않은 사헌은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입사 초반 인트라넷에서 외웠던 얼굴이 둘 있었다. 이자헌과 이성해. 나머지는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다. 책상 위에 놓인 까마귀, 너구리와 코알라 가면을 훑으며, 사헌은 골똘히 생각했다. 입사 연도에 따라 가면의 테마가 결정된다고 했으니, 까마귀와 너구리, 그리고 코알라는 17기가 아니다. 애시당초 동기였다면 사헌이 얼굴을 모를 리가 없다. 그렇다고 물고기 가면인 윤조와도 별 연관성이 없어보이는 육지동물이니 18기 또한 아닐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17기보다 윗기수의 사번이겠지. 판단을 마친 사헌은 시선을 옮겨 가운데에 조용히 앉아있는 자헌을 바라보았다. 회의실이 어수선하거나 말거나 신경도 쓰지 않는 무기질적인 얼굴이었다.
이자헌, 이성해, 그리고... 김솔음. 회의실에 모여있는 8명 중 정예팀 인원이 셋이나 됐다. 그말인즉슨 앞으로 들어갈 어둠에서 별다른 상해 없이 사지육신 멀쩡하게 나올 확률이 수직하락했다는 뜻이었다. 씨발... 미확인 어둠 탐사가 쉽지 않을 건 알았지만 이 정도 급에 투입될 줄은 몰랐다고! 앞으로의 탐사가 험난할 것 같아 사헌은 속으로 욕을 씹었다. 그런 사헌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려 회의실에 앉아 있는 인원을 살펴보던 윤조가 목소리를 낮춰 슬쩍 말했다. 좋으시겠어요. 네? 뭐가요? 윤조는 사헌의 물음에 대답 대신 조심스레 멀찍이 떨어져 앉은 솔음을 가리켰다.
애인이랑 탐사하면 의지도 되고...
싸늘하게 식은 사헌의 표정에 윤조가 몸을 흠칫 떨었다.
아, 죄송, 죄송합니다. 비밀 지켜드리겠다고 했었죠...
......
제가 배려가 없었어요. 모른 척 할게요.
이어지는 어처구니 없는 말들에 표정관리가 잘 안 됐다. 실시간으로 썩어들어가는 사헌의 안면근육을 보던 윤조가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그딴 거 아니니까 오해 좀 그만 하세요. 사헌이 차갑게 뱉었다. 아, 네. 그럼요. 윤조가 군기 바짝 든 채 대답했지만 사헌의 말을 썩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 미심쩍은 표정과 대답에 사헌이 한소리 하려는 찰나, 회의실에서 사원들이 제각기 떠들거나 말거나 시종일관 무표정하게 앉아 있던 자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풍채가 좋은 몸은 존재감도 커서, 자헌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잡담은 일제히 끊기고 주의가 집중됐다. 회의실 중앙에 선 자헌의 머리 위로 벽에 걸린 시계가 정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설마 정각까지 기다리고 있었던 건가. 사헌은 생각했다.
브리핑 시작하겠습니다.
.....
추정 등급은 B에서 C등급 사이, 여객선 형태의 어둠으로 짝수 인원일 때 지금 배부하는 탑승권의 절취선을 찢으면 진입할 수 있습니다.
자헌의 설명에 맞은편에 앉아 있던 솔음이 자리에서 일어나 탑승권을 각자에게 배부하기 시작했다. 회의실을 돌며 탑승권을 나눠주던 솔음은 사헌의 옆에 앉은 윤조에게도 탑승권을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두 손으로 탑승권을 받은 윤조가 조그맣게 말하는 동안에도 사헌은 솔음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오직 앞만을 응시했다. 그런 사헌의 시야에 탑승권이 내밀어졌다. 사헌은 탑승권을 내미는 솔음의 손을 발견했음에도 무시로 일관했다. 그런 사헌의 시건방진 태도를 솔음은 지적하지 않았다. 그저 사헌이 앉아있는 책상에 탑승권을 올려두고는 제자리로 돌아갔을 뿐이었다. 의아한 윤조의 시선이 사헌과 솔음을 번갈아가며 살폈다.
옆얼굴에 달라붙는 시선을 무시하며, 사헌은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인 탑승권을 집었다. 가까이 가져가 살펴보니 이렇게 적혀 있었다.
탑승권(여객용)사바 ▶ 탐라
선박명: 그랜드 아비댜 호
등급/객실: 사트바/B741Paramita Corp.
탐라? 제주행인가? 불쑥 든 의문은 사헌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는지 누군가 손을 번쩍 들었다. 이성해 주임이었다.
이거 타면 제주도로 가는 건가여?
모릅니다.
그럼 여기 적힌 등급은 뭡니까?
모릅니다.
예의 그 무표정으로 모른다는 말만 기계적으로 뱉는 자헌에 일동이 술렁였다. 그때까지 잠자코 대화의 흐름을 지켜보던 솔음이 손을 들어 질문했다.
어둠에서 탈출한 생존자가 있습니까? 현재까지의 생환율이 궁금합니다.
현재까지 어둠에서 탈출한 생존자는 총 4명으로, 전부 민간인입니다.
어떻게 탈출했대여? 민간인인데 대단하네~
모릅니다.
엥?
......
그럼 이자헌 과장님은 알고 있는 게 도대체 뭔가여?
또 튀어나온 모른다는 말에 성해가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헉. 성해가 툭 뱉은 하극상 발언에 윤조가 입을 떡 벌렸다. 코알라 가면은 헛웃음을 지으며 이마에 손바닥을 탁 짚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자헌은 태연한 얼굴로 대꾸했다.
없습니다.
회의실에 싸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할 말을 잃은 사람들 틈에서, 멀뚱멀뚱 서 있는 자헌을 보던 솔음이 침착하게 질문했다.
생존자의 증언 중 탈출 방법에 관한 증언이 없었기 때문에 모른다고 말씀하신 겁니까?
예.
그럼 생존자의 증언에 관한 추가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생존자들은 중등도의 정신착란과 PTSD 증상을 겪어 제대로 된 증언이 어려운 상태였습니다. 그들의 지리멸렬한 증언을 취합하여 분석하였을 때 나타난 공통적인 핵심어는 <밀항자> 였습니다.
밀항자? 여객선에 숨어든 밀항자를 찾아내는 어둠인 걸까. 술렁대는 일동을 보며 자헌은 평이한 투로 덧붙였다.
이상입니다. 5분 뒤 어둠으로 진입하겠습니다. 질문 있습니까?
어... 여전히 아무 것도 모르겠는데 말이죠. 정말 이대로 진입해도 되는 건가...
진입해도 됩니다.
아니! 제 말은 주어진 정보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겁니다, 과장님. 이건 뭐 죽으라고 떠미는 것과 다름없잖습니까!
? 아닙니다.
......
변칙적인 어둠의 특성상 정보가 주어져도 안전하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자헌의 대답에 너구리 가면이 환장하겠다는 듯 머리를 싸맸다. 인간형 AI라는 소문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입력값 그대로 출력하는 화법에 사헌은 벌써부터 정신이 아찔해졌다. 하지만 한치 앞도 모르는 어둠에서 이자헌 과장 같은 파워 몰빵형은 훌륭한 탱커가 될 거다. 사헌은 어수선한 회의실을 가만히 살피며 탐사팀의 밸런스를 따져보았다. 정예팀인 이자헌, 이성해, 김솔음은 분명 큰 전력이다. 그리고 17기 중 김솔음 다음으로 괜찮은 성과를 내고 있는 자신도 나쁘지 않은 인력이다. 하지만 로우리스크 하이리턴을 추구하는 사측에서 이렇게나 마냥 좋은 패만을 꺼냈을 리가 없다. 한 어둠에 정예급 인재들을 몰아넣었다가 몰살당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니 아마도... 사헌의 시선이 제 옆에 있는 윤조를 향했다. 시선을 느낀 윤조가 사헌을 마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윤조는 말간 미소를 지었다. ...제 옆에 있는 송윤조를 포함해서, 나머지 인원에게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필요하다면, 가장 먼저 잘라내어야 할 꼬리겠지. 윤조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사헌을 낮은 목소리가 일깨웠다.
질문은 더 이상 없는 것 같으니 이만 진입 준비를 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모두 탑승권을 준비해 주십시오.
솔음의 말에 자헌이 가면을 쓰며 말했다. 사헌도 자헌을 따라 가면을 쓰고 탑승권을 손에 쥐었다. 자헌의 신호에 맞춰 탑승권의 절취선을 찢으려는 순간, 우습게도 사헌은 망설였다. 이대로 탑승권을 찢게 된다면 솔음과 어둠에서 얼굴을 맞대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불편하게 다가왔다. 여기서 자신만 절취선을 찢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하는 어처구니 없는 생각이 떠오르는 동시에 서늘한 시선과 눈이 마주쳤다. 솔음이 자신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아. 흠칫 떨리는 손길에 직, 하고 절취선이 힘없이 뜯어졌다. 그러자 사방이 일그러지며 어딘가로 훅 빨려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헉! 다시 눈을 뜨자 무미건조한 회의실의 흰 벽은 처음 보는 낯선 공간으로 탈바꿈해 있었다. 고급스러운 호텔 로비를 닮은 화려한 공간 한가운데에는 거대한 샹들리에가, 그 아래에는 양측으로 늘어뜨려진 나선형 계단이 있었다. 우와... 주위를 두리번대는 사헌의 옆에 선 윤조가 입을 헤 벌린 채 감탄했다. 사헌은 살면서 이렇게나 사치스러운 공간에 발을 들이민 적이 없었다. 게다가 이렇게 화려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한 어둠에는 더더욱. 아니, 비슷한 어둠에 들어가 본 적이 있긴 했다. <눈먼 자들의 저택>이 떠오른 사헌은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을 주었다. 손에 느껴지는 이물감에 사헌은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힘없이 찢겨졌던 탑승권은 어느새 딱딱한 플라스틱 카드로 변해 있었다.
승선 카드네요.
승선 카드요?
네. 크루즈 안에서는 일종의 신분증 같은 역할이에요. 객실 키로 쓰이기도 하고, 신용카드랑 연동해서 쓰기도 하는데... 여기서 돈 쓸 일이 있을진 모르겠네요.
코알라 가면이 설명했다. 과연, 코알라 가면의 말대로 카드를 뒤집어 보니 객실 번호가 나와 있었다. B741. 객실 번호를 확인한 사헌이 고개를 들자, 자헌이 사무적인 투로 지시했다.
각자 부여받은 객실 번호를 보고하십시오.
B744입니다.
솔음이 말했다. 씨발 존나 다행이다! 사헌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같은 어둠에 배정된 것만으로도 스트레스인데 만약 같은 객실까지 배정받았다면 사헌은 윤조를 협박해서라도 방을 바꿨을 것이다. 사헌이 안도하는 틈을 타 다들 배정받은 객실 번호를 말했다. 마지막으로 사헌이 객실 번호를 보고하자, 가만히 듣고 있던 솔음이 자헌에게 물었다.
조장님의 객실 번호는 무엇입니까?
B743입니다.
각자 밝힌 객실 번호를 종합해보면 각 객실은 2인실로 추정되며, 사헌과 윤조가 B741호, 성해와 너구리 가면은 B742호, 자헌과 까마귀 가면이 B743호, 그리고 솔음과 코알라 가면이 B744호에 배정 받았다. 모르는 속 시커먼 사람보다는 성가시지만 속 뻔히 보이는 아는 사람이 낫다. 윤조와 룸메이트가 되어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사헌에게, 윤조가 쭈뼛거리더니 사헌에게 귀를 대보라고 손짓을 했다. 허리를 숙여 윤조에게 귀를 대자 윤조는 작은 목소리로 사헌에게 속삭였다.
염소 님이 원하시면 방 바꿔드릴 수 있으니까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네? 방을 왜 바꿔요. 저랑 방 쓰기 싫으세요?
아뇨! 저야 염소 님이랑 쓰면 든든하고 좋죠...!
아님 뭐, 같이 쓰고 싶은 사람이 있어요?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럼 굳이 바꿀 필요가 있나... 귀찮게.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꼭 방을 바꾸지 않으면 사헌의 손해인 것 같은 투였다. 의아해진 사헌은 윤조에게 물었다. 왜 자꾸 방을 바꾸겠다고 하는 건데요? 그러자 윤조는 조용히 손가락을 들어 한 곳을 가리켰다. 윤조의 손가락 끝이 가리키고 있는 곳엔 솔음이 서 있었다. 윤조가 가리키는 대상이 솔음임을 알아챈 사헌의 표정이 걷잡을 수 없이 싸늘해졌다. 아니 씨발 안 사귄다니까 자꾸...
지랄말고 저랑 같이 쓰세요.
넵.
살벌한 사헌의 말투에 윤조가 입을 다물었다. 한편, 승선 카드의 객실 번호를 확인하느라 어수선해진 틈을 타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성해가 메인 홀의 한구석을 가리켰다. 저것 좀 봐여. 성해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돌려보니 안내데스크가 있었다. 뭔가 도움이 될 만한 정보가 있을지도 몰라여. 성해의 말에 사헌은 언제 그랬냐는 듯 싹싹하게 웃으며 재빨리 발걸음을 뗐다. 제가 가서 확인해보겠습니다. 그리고는 멀뚱멀뚱 서 있던 윤조에게 눈짓했다. 눈이 마주친 윤조는 퍼뜩 움직여 사헌의 뒤를 종종걸음으로 따라오며 물었다.
저는 왜...?
탐사해야죠. 엉덩이 무거운 것도 생신입 때나 참아주지. 언제까지 초짜처럼 있으려고?
아...!
사헌의 지적에 윤조의 어리벙벙한 얼굴이 붉어졌다. 죄, 죄송합니다. 금새 시무룩해져서는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사헌은 윤조를 힐끗 쳐다봤다. 사실 현재 탐사팀의 구성원 중 연차가 낮은 편에 속한다는 이유로 어둠 탐사 최전방에 나서고 싶지 않았던 사헌은 윤조의 빠릿빠릿하지 못한 태도를 지적하기보단 그저 윤조를 정찰에 이용할 생각으로 따라오게 했을 뿐이다. 그런 사헌의 속을 알 리 없는 윤조는 슬금슬금 사헌의 눈치를 봤다. 저렇게 맹해서는 지금까지 살아남은 게 기적이다. 진작에 정예팀의 고기방패로 쓰일 것 같았는데. 사헌은 뒤따라오던 윤조에게 물었다.
정예팀이랑 같이 탐사 나간 적 있어요?
아, 아니요... 이번이 처음이에요.
...아.
그래서 그랬구나. 마무리 팀치고 유난히 천진난만했던 게. 사헌의 시선이 윤조를 위아래로 훑었다. 정예팀의 명령 한마디면 꼼짝없이 고기방패가 된다는 사실을 몰랐던 거야. 이걸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지 나빴다고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사헌은 고개를 돌려 로비 한가운데에 모여 있는 탐사팀을 바라보았다. 이자헌, 이성해 그리고... 김솔음. 현재 이곳에 모인 정예팀 인원이다. 이 셋 중 송윤조 같은 애송이를 가차없이 미끼로 집어던질 타입이 있다면...
'재밌잖아, 네가 살려고 아득바득대는게. 대답이 됐으려나?'
...씨발, 역시 김솔음 쪽이려나. 떠오르는 기억에 인상을 구긴 사헌은 이마를 짚었다. 자신을 세뇌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두뇌를 마구잡이로 잔뜩 헤집어놨던 싸이코패스가 마무리 팀 신입 같은 다루기 좋은 말을 가만히 내버려 둘 리가 없다. 하지만, 같은 정예팀인 이성해와 이자헌 쪽도 마무리 팀을 적극적으로 이용할 가능성을 무시할 순 없었다. 사헌은 생각했다. 역시 정예팀들이 수작 부리기 전에 송윤조를 내 편으로 끌어들이고 존나 뽑아먹은 뒤 버려주마. 판단을 마친 사헌은 이전보다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정예팀이랑 일할 땐 더더욱 주의하세요. 자칫하면 험한 꼴 보거든요.
아, 아, 네...
애초에 안 엮이는 게 가장 좋아요. 마무리 팀 소모품으로 대하는 건 그쪽이 제일 심하니까.
그 말에 윤조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 그럼 전 어떻게...
쓰임새를 증명하면 되죠.
아...
물고기 씨 이 어둠이 마지막 탐사 아니잖아요. 앞으로도 계속 어둠에 투입될 텐데, 이렇게 계속 소극적으로 나오면 물고기 씨만 손해죠. 이런 것도 경험을 해야 느는 건데. 안 그래요?
...네, 맞아요.
혼내는 거 아니고, 그냥 좀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경험을 쌓아봤으면 해서 하는 말이에요. 물고기 씨가 걱정돼서요.
감, 감사합니다.
언제 뒤질지 모르는 파리목숨한테 경험은 무슨... 윤조에게 그럴듯한 궤변을 늘어놓던 사헌은 속으로 빈정댔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표정은 친절한 웃음을 표방하고 있어서, 윤조는 감동받은 얼굴로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사헌은 그런 윤조를 힐끗 보고는 안내데스크 앞으로 걸어갔다. 안내데스크에는 흰색의 커튼이 안내데스크의 안쪽을 둘러싸고 있어 내부를 볼 수 없었다. 사헌은 안대를 옆으로 살짝 젖혀 왼쪽 눈으로 커튼을 바라보았다. 노란 빛에 가까운 헤일로가 눈을 따끔하게 찔렀다. 괜히 들쑤셨다가는 피만 볼 것 같아 사헌은 안대를 다시 고쳐쓴 뒤 시선을 내렸다. 마침 내부를 가린 커튼의 앞에는 팻말이 걸려 있었는데,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니 안내문이 적혀 있었다.
안내데스크 운영시간 안내
안내데스크 운영시간을 아래와 같이 안내 드립니다.
아래 사항을 참고하시어 이용에 불편 없으시기 바랍니다.
정규 운영시간
08:00~17:00
※ 안내데스크는 비상 시 24시간 운영 상태로 전환됩니다.
※ 크레딧 교환은 24시간 언제든지 가능하며, 교환을 원하는 승객의 경우 데스크 좌측에 위치한 수화기에 교환 의사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운영시간이 아닌 건가? 가만히 서서 커튼을 살펴보던 사헌의 옆에 까치발을 든 채 안내데스크를 보고 있던 윤조가 불쑥 시야를 가린 커튼을 향해 손을 뻗었다. 사헌은 재빨리 팔을 뻗어 윤조의 손목을 잡아챘다. 의아한 눈빛으로 올려다보는 윤조에게 사헌은 말했다.
안에 뭐가 있을 줄 알고 손을 뻗어요.
그치만 적극적으로 나서 보라고 하신 건...
이건 무모한 거고. 먼저 눈으로 관찰한 뒤에 괜찮겠다는 판단이 서면 그때 움직여요. 무턱대고 손부터 뻗다간 다치니까.
네, 주의하겠습니다...
의기소침하게 대답한 윤조가 손을 거뒀다. 사헌은 속으로 한숨을 삭히며 데스크 주변을 둘러보다, 곧 책자가 꽂힌 가판대를 데스크 우측에서 발견했다. <탑승객 이용 가이드>, <탐라관광지도>, <아비댜 투데이>... 여러 책자들이 있었지만 그중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탑승객 이용 가이드>라는 제목의 책자였다. 사헌은 곧바로 책자를 집어들었다.
탑승객 이용 가이드
삼계 최고의 해운 회사, 바라밀 코퍼레이션의 특급 여객선 12종 중 첫 번째 선박인 그랜드 아비댜 호(無明)에 탑승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쾌적한 여정을 위해 아래의 이용 안내를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1. 크루즈 이용 안내
승선 카드
승선카드는 크루즈에서 선실 키와 신용카드, 신분증의 역할을 합니다. 승선 카드를 지참하는 모든 이는 탑승객으로 간주되며 신분증은 반드시 본인이 지참하셔야 합니다. 승선 카드를 지참하지 않았을 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불이익에 대해 당사는 책임지지 않습니다. (※ 승선카드 분실 시 재발급은 불가능합니다.)선상 신문(아비댜 투데이)
매일 저녁 다음날의 일정이 담긴 선상신문이 객실로 배달됩니다. 선상신문에는 해당일의 일출·일몰 시간, 재 승선 시간, 주요 행사 등 선상 생활의 모든 정보가 담겨 있는 가이드입니다. 선상신문으로 알찬 크루즈 여행 일정을 짜보시기 바랍니다.고객 안내데스크
5층 메인 홀에 위치하며 선상생활에 대해 문의를 하시거나 도움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크루즈 내에서 진행하는 이벤트에 참여하면 받을 수 있는 다양한 보상을 크레딧으로 교환해주는 크레딧 교환 서비스를 24시간 제공하고 있습니다.크레딧 상점
5층에 위치하며 그랜드 아비댜 호만의 특별한 상품 및 서비스를 판매하는 상점입니다. 바라밀 코퍼레이션 소속 6인의 전문가가 까다롭게 선정한 삼계의 진귀한 상품들은 탑승객 여러분의 즐거운 추억이 될 뿐만 아니라 주변인에게 선물하기 좋은 기념품이 될 것입니다.
2. 크루즈 이용 시 주의사항그랜드 아비댜 호의 모든 승무원은 탑승객의 즐거운 여행을 위해, 당사 승무원 또는 회사 측의 부주의로 발생할 수 있는 상해 행위를 엄격히 금지하며, 탑승객을 그러한 위험으로부터 철저히 보호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모든 탑승객 여러분께서는 크루즈 이용 시 승무원의 요청에 따라 반드시 주의사항을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 큰 소리로 대화하는 것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선실에 계실 때에는 선실 문을 항상 닫아주시기 바랍니다.
• 탑승객 간 불쾌감을 유발할 수 있는 행위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승객 여러분들께서는 상호 간의 예의를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 쾌적한 환경 유지를 위해 여객선 내부에서 쓰레기(유기물 포함)를 무단으로 투기하는 행위, 여객선을 포함하여 선내 기물을 파손하는 행위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행위가 적발될 시에는 행위자는 탑승객의 쾌적한 여행을 위해 그 즉시 여객선 밖으로 추방됩니다.
• 비상/재난 상황 시 안전을 위해 탑승객은 배정된 객실을 제외한 다른 공간으로의 이동이 제한됩니다. 상황이 해결되었다는 안내 방송 전까지 모든 탑승객 여러분께서는 직원의 통솔에 따라 침착하게 행동해주시기 바랍니다.
• 정당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부정한 방법으로 탑승한 승객이 있을 경우, 해당 탑승객은 <여객선 운항관리규정>에서 명시한 절차에 따라 처리됩니다.
※ 본 여객선은 탐라행 직통 여객선으로, 중간 기항지에 정박하지 않습니다.Paramita Corp.
정당한 절차. 사헌의 시선이 그 단어에 길게 머물렀다. 뒤 구린 블랙기업을 통해 입수한 티켓으로 크루즈에 승선한 건 과연 정당한 절차일까? 하지만 승선하고 시간이 꽤 지난 지금까지도 특별한 안내방송이나 별다른 조짐이 없는 것을 보면 사측에서 제대로 된 티켓을 입수한 것일지도 몰랐다. 빠르게 <탑승객 안내 가이드>를 훑는 사헌의 옆에서 작은 머리통이 기웃댔다. 사헌은 속으로 짜증을 삼키며 윤조에게 안내 책자를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작게 중얼거린 윤조가 뒤늦게 안내 책자를 읽기 시작하는 사이, 사헌은 눈을 돌려 나머지 책자들을 인원수만큼 챙겼다. 따라와요. 툭 뱉은 사헌이 성큼 발을 내딛자 책자를 덮은 윤조가 황급히 사헌의 뒤를 쫓았다.
사헌이 가져온 책자 중 탐사팀이 읽을 수 있는 건 <탑승객 이용 가이드>와 <아비댜 투데이> 뿐이었다. 그나마 시각적인 정보를 담고 있을 것 같았던 <탐라관광지도> 마저도 지도는커녕 알 수 없는 글로 가득 차 있었다. 지도를 건성으로 넘겨보던 코알라 가면이 중얼거렸다. 순 외계어 뿐이네요. 도무지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이 하나도 없어요. 외계어라는 말에 사헌은 무의식적으로 솔음을 쳐다보았다. 어쩌면 같은 외계인이니까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문득 스치는 동시에 눈이 마주쳤다. 솔음이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솔음이 책자를 해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처럼. 사헌의 안색이 창백해지며 몸이 움찔 떨렸다. 씨발... 여전히 솔음은 제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리도 뻔뻔스럽게! 몸의 떨림을 숨기며 미묘하게 일그러진 사헌의 얼굴을 옆에 선 윤조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정당한 절차라는 게 뭘까요?
티켓을 소지한 채 탑승하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보통은 그런 의미니까요.
과연 그럴까여?
코알라 가면과 너구리 가면의 대화에 불쑥 성해가 끼어들었다. 의아함 섞인 시선을 한눈에 받은 성해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얻은 티켓이라면 어떨까여? 콘서트나 스포츠 경기의 암표를 생각해 보자구여.
...아.
만약 불법적인 방법으로 입수한 티켓이라면, 그 또한 정당하지 않은 절차에 해당하겠군요.
성해의 말에 솔음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헌은 동요하는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생각했다. 수상한 티켓의 출처가 과연 정당한지를 따져보기 위해선, 여기 모인 이들 중 티켓을 사측으로부터 제공받아 배부한 이에게 티켓의 출처를 물어보는 게 지금 할 수 있는 최선 아닌가. 그리고 그에 해당하는 인물은... 윗선의 지시를 받고 TF팀을 구성한 이자헌이다. 생각을 마친 사헌은 자헌에게 물었다.
과장님, 저희가 사용한 탑승권 말인데요. 과장님께서 정당한 절차를 통해 입수한 것이 맞습니까?
예.
정, 정말인가요? 그럼 안심하고 크루즈를 이용하면 되는 건가...?
딱 떨어지는 간단한 대답에 윤조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미확인 어둠이 매우 위험할 것만 같다는 사헌의 예상과는 다른 전개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랜드 아비댜 호의 모든 승무원은 탑승객의 즐거운 여행을 위해, 당사 승무원 또는 회사 측의 부주의로 발생할 수 있는 상해 행위를 엄격히 금지하며, 탑승객을 그러한 위험으로부터 철저히 보호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탑승객 이용 안내>에서 탑승객은 위험으로부터 보호되고 있다고 명시했기 때문이다. 정말로 사측에서 정당한 절차로 얻은 티켓을 제공한 걸까? 사헌은 자헌의 무표정한 얼굴을 응시했다. 도무지 속을 알 수가 없는 부류의 인간이다. 김솔음의 상사라서 그런지 그런 모습마저도 솔음과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어딘가 석연치 않다. 그렇게 일이 쉽게 풀릴 리가 없다. 어둠을 구르며 벼려진 날카로운 감이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게 했다. 사측이 에티켓만 준수하면 안전한 미확인 어둠에, 탐사팀의 정예 인력들을 괜히 배치하지는 않았겠지. 현재로썬 알 수 없지만 분명 이 어둠엔 함정이 있을 게 분명했다. 석연치 않은 건 솔음도 마찬가지인 모양인지 솔음도 생각에 빠진 얼굴이었다. 그러다 솔음이 무어라 말하려 입을 여는 순간, 까마귀 가면의 목소리가 한 박자 먼저 빠르게 끼어들었다.
저, 저게 뭐죠?
까마귀 가면이 손가락으로 메인 홀의 반대 방향을 가리켰다. 손가락이 가리킨 곳에는 발끝까지 내려오는 시커먼 천을 뒤집어 쓴 인영들이 있었다. 흡사 유령 같은 모습에 겁에 질린 윤조가 숨을 삼키며 사헌의 옆에 가까이 붙었다. 사헌은 가까이 붙은 윤조를 힐끗 쳐다보고는 이내 그것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마를 짚는 척 안대를 살짝 젖혀 그것들을 보니 헤일로는커녕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수상쩍은 외양이지만 그다지 위협적인 존재는 아닌 모양이었다. 그것들은 탐사팀을 발견했음에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저 각자의 용무가 있는 듯 제각기 메인 홀을 돌아다닐 뿐이었다. 메인 홀의 계단을 오르고, 곳곳에 위치한 의자에 삼삼오오 앉아 있는 모습은 수상쩍은 외양을 제외하면 평범한 탑승객들 같았다. 얼핏 보면 부르카를 착용한 사람들이라 착각할 수 있을 정도로. 탐사팀이 숨을 죽인 채 그것들을 바라보는 사이,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인영 하나가 성해의 옆을 스쳐지나갔다. 성해는 그것을 힐끗 쳐다보더니 재빨리 손에 쥐고 있던 책자로 부채질을 하며 작은 바람을 일으켰다. 그 바람에 그것이 덮고 있던 시커먼 천이 펄럭거리며 천 아래에 있던 다리가 얼핏 드러났다. 작은 구슬로 엮은 발찌가 걸린 발목 아래, 새하얀 발이 바닥을 딛고 있었다. 명백한 사람의 것이었다.
사람 같은데여? 탑승객인가?
점점 멀어지는 그것의 뒷모습을 보며 성해가 덧붙였다. 뭐, 다리만 사람인 키메라일수도 있고. 그 말에 윤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럼 한번 벗겨보는 게 어떻습니까? 물끄러미 인영을 바라보던 너구리 가면이 한 마디 했다. 그 말에 모두가 너구리 가면을 쳐다보았다.
딱히 공격성은 없는 것 같은데, 천을 벗기는 것 쯤이야 어려운 일은 아닐 것 같은데요.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습니다.
왜요?
탑승객 이용 가이드의 내용을 생각해보십시오.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려던 너구리 가면을 솔음이 제지했다. 의아함 섞인 시선을 마주한 솔음은 차분히 설명했다.
저것들이 쓴 천을 함부로 벗기는 행위가, 탑승객 간 불쾌감을 유발할 수 있는 행위로 해석될 충분한 여지가 있습니다.
아! 이용 가이드에서, 탑승객 간 불쾌감을 유발할 수 있는 행위는 금지된다고 했죠.
예. 운이 나쁘다면 여객선에서 어떤 조치를 취할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 조치가 어떤 형태를 취했든 간에 이곳에 떨어진 우리에게 긍정적인 방향은 아닐 거고요.
그러게요. 괜히 잘못 건드렸다가 공연히 피 볼 일을 만들고 싶진 않네요.
까마귀 가면이 동의했다. 반대하는 여론이 커지자 너구리 가면은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럼 뭐 어쩔 수 없고요. 그렇게 툭 뱉는 목소리가 조금 작아진 채였다. 별 소득 없는 대화에 사헌은 시큰둥한 얼굴로 <탑승객 이용 가이드>의 페이지를 넘겨보았다.
그랜드 아비댜 호 층별안내(DECK PLAN)
DECK 3(3층): 대극장(1층), 아이스링크
DECK 4(4층): 대극장(2층), 정찬 레스토랑(1층), 카지노, 영화관, 클럽
DECK 5(5층): 정찬 레스토랑(2층), 메인 홀, 안내데스크, 크레딧 상점, 카페24, 라운지, 아웃도어덱, 전망대
DECK 6(6층) ~ DECK 10(10층): 투숙용 객실(1,843실)
DECK 11(11층): 스파 & 피트니스 센터(1층), 메인 수영장, 야외 스크린
DECK 12(12층): 스파 & 피트니스 센터(2층), 조깅트랙, 아케이드 게임룸
DECK 13(13층): 암벽등반, 스포츠코트, 골프존, 인공파도풀, 전망대※ DECK 11~13은 야외공간입니다(스파 & 피트니스 센터 제외).
※ 각 공간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에 관한 정보는 <아비댜 투데이>를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Paramita Corp.
규모가 생각보다 컸다. 층별안내 옆에는 각 층별 시설 위치가 그려져 있는 지도가 첨부되어 있었다. 한 면을 빽빽히 채우는 크기에 사헌은 기가 질린 얼굴을 했다. 다른 시설들을 차치하고서라도, 1800개가 넘는 객실들을 하나하나 뒤지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됐다. 2인 1조로 나누어서 4팀이 하루종일 이 크루즈를 휘젓고 다닌다고 해도 일주일은 족히 걸릴 것 같았다. 그렇다고 객실의 문이 전부 열려있지도 않을 거고 그 안을 이용하는 투숙객이 침입자에게 호의적일 리도 없다. 씨발... 얼마나 이 곳을 헤매고 다녀야 탈출구를 찾을 수 있을까? 사헌은 제 가방 속에 있는 비상 식량의 양을 가늠해봤다. 크루즈의 규모로 보아 예상 가능한 활동량으로는 겨우 이틀 정도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예상치 못한 규모에 당황한 건 사헌 뿐만이 아니었는지, 이용 가이드를 읽던 코알라 가면이 중얼거렸다. 규모가 생각보다 너무 큰데... 고작 이 인원으로 탐사하라고 하다니 말이 안 돼요. 그래, 그 말이 맞다. 사측과 최대한 타협한다면 최소한 4명은 더 투입시켰어야 할 규모의 어둠이다. <눈 먼 자들의 저택>에서는 실컷 갈아넣더니 이 망할 크루즈에서는 왜 이렇게 인색한 건데? 미확인 어둠 탐사는 인해전술로 해결해야 뭐라도 나오지 않겠냐고... 사헌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갈 무렵, 그때까지도 별 말이 없던 자헌이 불쑥 입을 열었다.
4인 1조로 움직이겠습니다. 객실이 위치한 6~10층은 금일 탐색 대상에서 제외합니다.
음, 과장님. 4인 1조보다는 2인 1조가 좀 더 효율적이지 않겠습니까? 시간도 단축될 거고요.
아닙니다.
......
너구리 가면의 질문에 자헌은 딱 잘라 말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잠시 뻘쭘한 침묵이 흘렀다. 주변의 눈치를 슬금슬금 보던 윤조가 쭈뼛쭈뼛 자헌에게 물었다.
왜, 왜인가요?
예상할 수 없는 위험이 닥칠 경우, 4인 1조일 때 부상자를 돌볼 인원과 도움을 요청할 인원이 동시에 확보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다양한 의견을 모을 수 있고, 더 나은 결정을 내릴 확률이 높습니다.
아, 그렇군요...!
윤조가 깨달음을 얻은 듯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윤조가 그러거나 말거나, 자헌은 고개를 돌려 성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말했다.
돌고래 씨, 동행할 사원을 고르십시오.
엇, 저여?
과장 직급인 자헌을 제외한 7인 중 직급이 가장 높은 건 C팀 주임 이성해다. 자헌은 그런 성해를 다른 팀에 보내서 형평성을 맞출 생각인 모양이었다. 흐음... 자헌의 말에 성해는 팔짱을 끼더니 잠시 고민했다. 그러더니 가벼운 말투로 경쾌하게 내뱉었다.
염소 씨와 까마귀 씨랑 동행할게여.
아직 한 명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흐음.
고민하는 성해의 눈이 선택받지 못한 나머지를 예리하게 훑었다. 그 날카로운 시선에 움츠러든 윤조는 옆에 서 있던 사헌에게 슬금슬금 붙었다. 그런 윤조를 뚫어져라 응시하던 성해가 씩 웃으며 말했다.
물고기 씨도 같이 가여.
아, 네!
사헌과 동행할 수 있게 된 윤조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작게 내뱉었다. 사헌은 그런 윤조를 곁눈질했다. 성가시게도 어쩌다보니 윤조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버린 모양이었다. 무슨 놀이터에 동생 데려가는 형도 아니고... 사헌은 잇새로 빠져나오려는 한숨을 간신히 삼켜냈다. 그래도 솔음과 동행하는 불상사가 벌어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했다. 성해가 동행할 인원을 고르고 나자, 자헌은 잠시 탐사팀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무미건조한 낯이 잠시 생각에 빠진 듯하더니 이내 말했다.
5인 1조로 움직이십시오.
예?
돌고래, 까마귀, 노루, 염소, 물고기 씨. 5인 1조로 움직이십시오.
왜, 왜요?
불쑥 닥친 날벼락 같은 말에 사헌은 저도 모르게 자헌에게 물었다. 형평성 따질 땐 언제고 갑자기 왜 5인 1조라는 건데 씨발! 사헌의 동요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자헌은 차분히 입을 열었다.
현재 돌고래 씨 소속 팀에는 입사 1년 미만의 사원이 2명 배치되어 있습니다. 총 인원 3명은 저의 관리 가능 범위 내로 판단되며, 주임급 인력인 노루 씨의 추가 배치는 형평성 기준에 부합합니다.
...자존심 상했다. 따지고 보면 김솔음과 나는 같은 연차인데. 사헌은 일그러지는 표정을 겨우 갈무리했다. 그말인즉슨 업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 자신의 능력을 신뢰할 수 없다는 소리 아닌가? 억울해진 사헌이 자헌에게 항변하려던 그때, 잠자코 서 있던 솔음이 먼저 말을 꺼냈다.
그럴 필요까진 없을 것 같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염소 사원은 입사 당시 차석이었던데다가 저와 같은 17기 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좋은 실적을 내고 있는 사원 중 하나입니다. 그의 능력에 대해서는 염려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까.
솔음의 말에 자헌이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헌은 동요했다. 항상 제게 각박하던 솔음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도대체 왜? 무슨 바람이 들어서? 갈피를 잃은 사헌의 시선이 방황했다. 고작 그따위 말로 내 분노가 풀릴 거라고 생각한 건가. 누굴 등신으로 보는 것도 아니고... 헛웃음을 간신히 삼켜낸 사헌은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며 자헌을 바라보았다. 자헌의 시선은 여전히 윤조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여기서 자헌을 납득시키지 못하면 꼼짝없이 솔음과 어둠을 헤집고 다녀야 한다. 상상만 해도 속이 거북해졌다. 어쩌지. 사헌은 입술을 초조하게 짓씹으며 고민하다, 결국 말을 꺼냈다.
물고기 사원은 비록 마무리 조 소속이긴 하지만... 그에게도 한 사람의 몫을 해낼 능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
제가 물고기 사원과 D급 어둠에 파견되었을 때, 물고기 사원은 꽤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었거든요. 충분히 잠재력 있는 사원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물론 어둠에 혼자 풀어놓는 순간 곧바로 비명횡사할 잠재력이다. 사헌은 뻔뻔한 얼굴로 구라를 쳤다. 뭐, 사지가 묶인 채 사시미 칼 앞에서 눈물만 펑펑 흘리던 모습이 인상적이긴 했으니까.
그리고 잠재력이라는 불확실성만을 믿고 섣불리 말씀드리는 게 아니에요. 어둠이 실전이라는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더더욱 경험이 중요하다는 것도.
......
저는... 돌고래 주임님이 가진 경험과 능력을 믿고 이렇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정예팀인 돌고래 주임님이라면 충분히 저희를 잘 이끌어주실거라고 생각해요.
흐음.
사헌의 말에 성해가 턱을 문지르며 침음을 냈다. 턱을 문지르는 손가락 사이로 미미한 호선을 그린 입꼬리가 보였다. 객관적으로 마무리팀 신입에 불과한 윤조의 실력을 어필하는 건 한계가 뚜렷했다. 그러니 윤조를 두둔하는 동시에 팀 구성의 결정권을 쥐고 있는 성해를 치켜세워 성해가 자신의 쪽에 우호적인 인상을 갖게 만드는 게 효과적이다. 성해는 의뭉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사헌과 윤조를 번갈아 훑었다. 사람을 꿰뚫어보는 듯한 시선에 사헌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말없이 둘을 빤히 바라보다, 성해는 이내 씩 웃었다.
아잇, 참! 쑥스럽네여. 어쩔 수 없지. 처음 제가 선택한 대로 가는 게 어때여, 과장님?
알겠습니다.
좋아여. 그런데 있잖아요...
성해가 사헌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유리알처럼 빛나는 눈의 총기가 조용히 사헌을 압박했다.
염소 씨는 그 말을 책임져야 할 거예요.
...네?
물론 만약의 일이지만여! 설마 물고기 씨가 우리 모두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짓을 하겠어여?
...이미 한 적 있다. 먹은 음식을 토하면 죽이려 드는 미친 요리사의 식당에서 보란 듯이 구토했었지. 사헌은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대꾸했다. 그, 그렇죠... 그져? 겁 먹고 염소 씨 옆에 찰싹 달라붙어서 벌벌 떨기만 하는 신입이 그럴 리가 없져? 말 한마디 한마디가 서늘한 칼을 품고 있다. 씨, 씨발... 역시 정예팀은 정예팀인가. 윤조를 두둔하며 성해를 은근슬쩍 치켜세우는 화법이 먹히긴 무슨, 그냥 넘어가준 거다. 제가 무슨 꿍꿍이인지 떠보려고. 그럼 여기서 중요한 건 일관성이다. 판단을 마친 사헌은 선량해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물론 물고기 씨가 겁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겁이 많다는 건 결국 신중함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의 신중함을 높이 사고 있어요. 물론 그 외에도 부족한 점이 많겠지만... 그건 제가 물고기 씨를 전담으로 맡아 앞으로의 탐사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노력하면 될 일이라고 생각하고요.
음, 그래여?
......
뭐, 농담이었어여! 처음부터 물고기 씨를 선택한 건 저였잖아여? 제 말은 신경쓰지 마세요.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다. 성해는 긴장한 사헌을 보며 어깨를 으쓱하고는 고개를 돌려 자헌을 바라보았다. 성해의 시선에서 벗어난 사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윤조를 쳐다보았다. 신중과는 거리가 먼 순진하기 짝이 없는 말간 얼굴을 보니 담배부터 말렸다. 들었지... 이제부터 존나 빠릿빠릿하게 처신 잘해야 한다... 안 그러면 지도 편달 똑바로 못한 죄로 욕 처먹는 건 나다... 그런 복잡한 마음을 담은 눈빛을 보내니 윤조는 입술을 앙다물며 결심한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인지 제 무덤을 제 손으로 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김솔음 달라고 할까? 얼굴 마주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거북해지고 토할 것 같이 역겨워지며 한없이 괴로워지긴 했지만 함께 있으면 적어도 목숨은 보전할 수 있을 것 같긴 했다...
아니! 사헌은 의식적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나를 세뇌하고 망가뜨린 놈한테 또다시 의지할 셈이야? 고작 칭찬 몇 마디 들은 것 갖고 등신처럼 구는 거냐고! 뒷통수를 제대로 처맞고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거지! 김솔음 그 새끼가 마음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나를 죽일 수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잖아... 오직 본인의 유희를 위해서라는 사소한 이유 하나로 이토록 나를 괴롭게 한 주제에, 내 뇌를 고장내서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만든 주제에, 저 뻔뻔한 낯짝을 보고도 이딴 생각이 드는 나는...
아, 사헌은 저도 모르게 숨을 뱉었다. 긴장의 끈을 놓으면 이딴 생각이 스멀스멀 드는 것도 망할 본딩 때문이다. 역시 욕을 처먹는 한이 있더라도 김솔음이 있는 이상 이 어둠에 들어와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얼굴을 마주보는 것만으로도 강렬한 기억에 젖은 몸과 마음이 통제를 벗어나고 있다. 끊임없이 동요하고 가슴이 옥죄여온다. 그게 김솔음이 선사한 트라우마인지, 제 마음 속에서 자라난 역겨운 감정인지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괴롭다. 그 둘 모두. 사헌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니 이 둘은... 다른 감정이 아니라 애시당초 하나였던 거다. 괴로움이라는 하나의 뿌리에서 자라나서 오직 상처만을 제게 새겨넣고 있으니까.
입술을 짓씹던 사헌은 불현듯 시선을 느꼈다. 사람을 꿰뚫어보는 듯한 성해의 시선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그보다 고요하고, 집요하며, 속내를 낱낱이 훑어보는 듯한. 제 밑바닥까지 더듬어대는 그런 진득함이 있는 시선. 사헌은 그 시선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그리고 홀린 듯 고개를 들어 솔음을 마주봤다. 새까만 동공 아래 자리한 새빨간 감정. 마주친 그것을 도대체 뭐라고 일컬어야 한단 말인가. 사헌은 불에 덴 듯이 움찔하며 시선을 피했다.
그럼 4인 1조로 인원을 나누어 탐사하도록 하겠습니다. 탐사 구역은 객실 구역인 6층~10층을 제외하고, 실내 공간인 3층~5층과 야외 공간인 11층~13층입니다.
좋아여. 탐사팀 구성원은 제가 골랐으니 탐사 구역은 과장님이 선택하시져.
실내 공간을 맡겠습니다. 노루, 코알라, 너구리 씨는 저를 따라 3층으로 갈 겁니다.
예.
3시간 뒤, 이곳 메인 홀에서 집합하도록 하겠습니다.
자헌이 한쪽 벽면에 걸린 시계를 가리키며 말했다. 시계바늘은 오후 7시를 조금 넘기고 있었다. 3시간 뒤면, 10시까지 메인 홀로 돌아오라는 소리였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자, 자헌은 자신의 탐사팀을 데리고 메인 홀 저편으로 사라졌다.
메인 홀이 위치한 곳은 5층이었기 때문에, 야외 공간이 밀집되어 있는 층으로 가려면 엘레베이터를 타야 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엘레베이터처럼 생긴 픽토그램이 그려진 안내판이 곳곳에 세워져 있어, 안내판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가다 보니 손쉽게 엘레베이터를 찾아낼 수 있었다. 엘레베이터 앞에 선 성해가 올라가는 버튼을 누르자 잠시 후 띵 소리와 함께 엘레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엘레베이터 내부에는 검은 천을 뒤집어 쓴 탑승객 서너 명이 타 있었는데, 입구에 서 있는 탐사팀을 발견하고는 스르륵 몸을 움직여 공간을 내주었다. 감사해여. 고개를 작게 끄덕인 성해가 가벼운 말투로 내뱉고는 별 망설임 없이 엘레베이터에 탑승했다. 사전 정보 하나 없는 미확인 어둠임에도 성해는 어딘가 여유로운 구석이 있었다. 역시 정예팀은 정예팀인가. 사헌은 엘레베이터 문 앞에 선 성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올라가는 동안 엘레베이터는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아무도 구태여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정체 모를 탑승객들과 부대낀 이 몇 평방미터 남짓의 좁은 공간에서 함부로 입을 놀렸다가 무슨 일이 벌어질 줄 알고. 그렇게 입을 꾹 다문 채 눈알만 굴리던 사헌의 머리 위로 띵, 하는 소리가 나며 엘레비터가 멈췄다. 고개를 들어 표시기를 보니 8이라는 숫자가 떠 있었다. 스스륵 열린 문 사이에는 수많은 방들이 즐비한 복도가 길게 늘어져 있었는데, 엘리베이터를 스스륵 빠져나온 탑승객들이 제각기 다른 방으로 흩어지는 걸 끝으로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방이 참 많네요.
엘리베이터에 탐사팀만 남게 되자 까마귀가 중얼거렸다. 그러게요. 윤조가 동의했다. 기어들어가듯 작은 목소리라 사헌은 윤조의 말을 다시 곱씹은 다음에야 무슨 말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저 수많은 방들을, 언젠가는 하나씩 다 뒤져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벌써부터 진이 빠졌다. 아니, 살 수만 있다면 뭔들 못 해? 살 수 있다는 확신만 있다면 방이야 얼마든지 뒤질 수 있다. 문제는 전부 잠겨있을 각각의 방을 어떻게 열며 만약 연다 하더라도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을 지 전혀 알 수 없다는 점이겠지만.
사헌이 생각에 빠진 사이, 엘리베이터는 순조롭게 11층에 도착했다. 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성해가 가장 먼저 엘리베이터 바깥으로 발을 디뎠다. 그 뒤를 따라 나머지 사람들도 슬그머니 나와 주변을 둘러보았다. 11층은 실내 공간과 실외 공간이 유리창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탁 트인 옆면의 통창 너머, 밝은 조명이 켜진 갑판의 수영장 위로 온통 새까만 어둠이 사방을 감싸고 있었다. 사헌의 옆에 서 있던 윤조가 천천히 유리창으로 다가가 창 밖을 빤히 바라보았다. 수영장이네... 작게 읊조리며 바깥을 바라보는 얼굴에는 알 수 없는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수영 좋아하세여?
아, 아뇨. 전 딱히...
음, 그래여?
네. 저보다는 제... 아.
말끝을 흐린 윤조가 황급히 사헌에게 물었다. 염소 님은 수영 좋아하세요? 윤조의 물음에 사헌은 잠시 고개를 돌려 윤조를 바라보았다. 급하게 말 돌리는 티가 났다. 어색한 미소를 마주보던 사헌은 그걸 지적하는 대신 어깨를 으쓱였다. 수영이야 할 줄 알았지만 좋고 싫고의 여부를 생각해본 적 없었다. 그냥 할 줄은 알아요. 대충 대답한 사헌은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키며 주제를 돌렸다. 근데 어디부터 갈 거예요?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에는 스파 & 피트니스 센터라고 적힌 데스크가 자리해 있었다. 실내부터 돌아보는 게 어떨까요? 까마귀 가면의 제안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데스크에는 직원 대신 키오스크 몇 대가 서 있었다.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키오스크 앞으로 다가가자 메인 화면이 떴다.
La Mer Spa & Fitness Center
운영시간 07:00 ~ 익일 00:00>> 입장권을 구매하려면 승선 카드를 인식시켜주세요 <<
성해가 주머니를 뒤적였다. 승선 카드를 주머니에서 꺼낸 성해가 키오스크에 카드를 꽂으려는데, 한발 먼저 카드를 꺼낸 윤조가 키오스크에 카드를 꽂았다. 순식간에 갈피를 잃은 성해가 카드를 쥔 채 눈을 동그랗게 뜨자, 윤조는 황급히 변명하듯 빠르게 내뱉었다.
제, 제 카드로 먼저 시험해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그래요? 별 일 없을 것 같긴 한데. 뭐, 맘대로 하세여.
넵, 감사합니다...!
군기가 잔뜩 들어가 뻣뻣해진 윤조의 어깨를 성해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성해의 시선을 의식한 모양인지 카드 끝을 쥔 윤조의 손이 애처롭게 벌벌 떨리고 있었다. 정예팀 앞에서 처신 잘해도 모자랄 판에 초짜처럼 벌벌 떨고 있으니 실력 보증 서준 자신만 우스운 꼴이 되고 있었다. 사헌은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눈치 없는 척 성해와 윤조 사이에 끼어들었다. 와, 어둠에도 키오스크가 있네. 일부러 호기심 가득한 목소리를 꾸며냈다. 성해의 시선을 물리적으로 차단시키자 윤조는 그제야 긴장이 조금 가신 얼굴을 했다. 사헌은 그런 윤조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고는 태연하게 키오스크 화면을 터치했다. 키오스크 화면에 세 가지 옵션이 떴다. 스파 입장권, 피트니스 입장권, 스파 & 피트니스 입장권. 탐색을 위해선 스파와 피트니스 두 곳을 전부 입장할 수 있는 옵션을 구매하는 게 맞을 것 같았다. 별 고민 없이 스파 & 피트니스 입장권을 터치하고 개수를 4개로 설정하자 하단에 지불해야 할 최종 금액이 떴다.
[특별 이벤트] 첫 이용시 무료 입장
합계: 0 credit
결제를 계속하려면 입장하려는 인원의 승선 카드를 투입구에 넣어 주세요
0 크레딧? 화폐 단위인가? 잠시 주저하는 사헌의 옆으로 손가락이 스쳤다. 사헌을 지나친 손가락은 주저 없이 결제 버튼을 터치했다. 깜짝 놀란 사헌이 고개를 돌려 손가락의 주인을 확인해보니 성해였다.
공짜라니 좋네여. 얼른 들어가져?
태연하게 말한 성해는 손을 슥 내밀었다. 다들 눈치껏 주머니 안에 넣어두었던 승선카드를 성해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자, 성해는 신속하게 키오스크에 각자의 승선카드를 인식시키고는 돌려주었다. 이윽고 키오스크가 팔찌 4개를 뽑아내자 성해는 빠른 손놀림으로 팔찌를 뜯어가 하나씩 배부했다. 각자의 팔목에 팔찌를 매는 것을 확인하기가 무섭게 성해는 스파 출입구로 성큼 걸었다. 성해가 개찰구 앞에 멈춰서고는 팔찌의 바코드를 인식기에 대자 출입구의 문이 열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머지 사원들도 헐레벌떡 그 뒤를 쫓았다.
스파 내부 통로를 따라 곧장 걸으니 수많은 캐비닛들로 빽빽히 채워진 락커룸이 나왔다. 락커룸에 들어서자 차가운 공기가 사위를 감싸며 저벅대는 발걸음 소리만이 고요한 공간을 울렸다. 바깥 공기가 섞인 신선한 찬기와는 다른, 밀폐된 공간에 온기를 뿜어내는 존재의 부재로 차갑게 식어 눅눅해진 공기였다. 사헌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용객으로 북적여야 할 공간은 텅 비어 있어 어딘가 을씨년스럽게 느껴졌다. 사방을 둘러싼 캐비닛 때문에 락커룸 안은 마치 미로처럼 보였다. 시선을 저편으로 돌리자 시야 끝 소실점까지 캐비닛이 늘어서 있었다. 밖에서 봤을 땐 이렇게 커다란 공간이 아니었는데... 어딘가 오싹해져 사헌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성별 구분이 따로 없네요. 다 같이 쓰는 건가봐요.
으음, 이용 대상이 사람이 아닌데 성별을 나눌 이유가 없지 않을까요...?
윤조의 중얼거림에 까마귀 가면이 대꾸했다. 조심스레 뱉는 목소리에 어처구니 없는 기색이 묻어났다. 빠릿하게 하라니까 바보 같은 말이나 해대고 있는 윤조를 보니 한숨이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왔다. 사헌은 속으로 한숨을 삭히며 주의를 돌리기 위해 바로 앞에 있던 캐비닛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잡이를 잡아당겼지만 철컥철컥 소리만 날 뿐 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 옆에 있는 캐비닛도 마찬가지였다. 사헌의 행동에 성해도 제 앞에 있던 캐비닛의 손잡이를 잡아당겨 보았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배정받은 캐비닛만 열 수 있나 보네여. 성해가 중얼거리며 손목에 찬 팔찌를 살폈다. 사헌도 소매를 걷어 팔찌를 보니 자그마한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1일권 / 스파 & 피트니스 / 1765
각자의 번호를 확인해보니 성해가 879, 윤조가 2136, 까마귀 가면이 1324로 배정받은 캐비닛이 전부 달랐다. 보통은 입장권을 함께 구매하면 가까운 자리로 붙여주지 않나. 물론 상식이 통하지 않는 어둠에서 평범한 세상의 일반적인 상식을 기대하는 게 바보 같은 일이긴 했다.
그럼 일단 각자 배정받은 캐비닛을 열어보러 가여.
네.
그리고 30분 뒤 스파 입구 앞에서 집합. 어때여?
좋습니다.
성해는 가장 먼저 자리를 떠났다. 까마귀 가면도 먼저 가보겠다며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성해가 사라진 곳 반대편으로 사라졌다. 얼떨결에 둘만 남게 되자 사헌은 가만히 서 있는 윤조를 두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그때까지 잠자코 서 있던 윤조가 슬금슬금 사헌의 뒤를 쫓았다. 사헌이 고개를 돌려 윤조를 바라보자 윤조가 변명하듯 내뱉었다. 같은 방향이라서요. 귀찮게 안 할게요. 그 사헌은 대꾸하지 않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캐비닛이 들어찬 락커룸은 아무리 걸어도 비슷한 풍경이 계속 나왔다. 길을 잃기 쉬운 구조였지만 다행히도 복도 벽에는 캐비닛 번호대와 화살표가 그려진 안내표가 걸려 있었다. 확인해 보니 윤조의 말대로 1000~2000번대와 2000~3000번대 캐비닛으로 향하는 방향이 같았다. 아까 지나가다가 안내판을 봤거든요. 윤조의 말에 사헌은 말없이 고개를 대충 끄덕였다.
끝없이 이어진 미로같은 락커룸을 걷는 동안 사헌과 윤조는 탑승객은커녕 쥐새끼 한마리도 발견할 수 없었다. 이 기묘한 공간 어딘가에 성해와 까마귀 가면이 배정된 캐비닛을 찾아 하염없이 걷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로 인기척이 없었다. 여기서 길을 잃어버린다면 그대로 행방불명되겠지. 그렇지만 락커룸 곳곳 비치된 안내판 사이의 간격이 짧아 길을 잃을 염려는 없어 보였다. 사헌은 팔찌에 적힌 숫자를 다시 한번 머릿속에 되새기며 눈앞에 보이는 캐비닛의 숫자들을 확인했다. 이제야 1000번대에 접어들고 있었다. 윤조는 사헌의 시선을 따라 캐비닛의 숫자를 읽다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정말 감사해요.
네? 뭐가요?
아까 과장님이랑 돌고래 주임님 앞에서 저를 두둔해주신거요. 사실 <심야일미식당>에서 도움은커녕 짐만 되다 염소 님께서 구해주신 거였는데...
아.
저 때문에 염소 님께서 공연히 저를 책임지게 된 것 같고... 죄송해요.
시무룩한 어조에 사헌은 뒤돌아 윤조를 바라보았다. 윤조는 풀 죽은 얼굴로 바닥을 쳐다보고 있었다. 윤조의 생각과는 달리, 윤조가 이야기하는 것 모두 사헌이 특별히 그를 위해서 한 행동은 아니었다. <심야일미식당>에서는 그 순간 떠오른 방법이 그것 뿐이었고 윤조를 두둔한 건 단지 김솔음과 같이 탐사하고 싶지 않아서였을 뿐이다. 단지 상황에 맞게 자신에게 최대한 유리한 판단을 했던 거였지 사헌이 윤조에게 특별한 호감이나 호의를 베풀려고 한 행위는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꿈에도 모르겠지. 바보같을 정도로 순진한 인간. 사헌은 잠시 윤조의 말간 얼굴을 바라보다 툭 뱉었다.
됐어요.
그치만 제가 염소 님께 빚도 졌잖아요. 시키실 일이나 제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무조건 도울게요. 제발 돕게 해 주세요.
아, 그거. 아직은 딱히 없는데. 나중에 생기면 그때 말할 테니까 일단 그런 거 신경쓰지 말고 탐사에 집중하세요. 그게 도와주는 거니까.
네...
거짓말은 아니었다. 윤조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들 중 사헌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일은 바로 빠릿한 업무수행으로 윤조를 두둔한 사헌의 얼굴에 먹칠을 하지 않는 것이다. 애초에 마무리팀 신입인 윤조가 제게 도움을 줄 수는 있을 지가 미지수였지만. 뭐, 까딱하면 자신 대신 희생하라고 등 떠밀 수도 있는 거고. 마무리팀은 그러라고 있는 거니까. 하지만 사헌은 정예조가 아니었으니 단순히 명령만으로는 윤조를 조종할 수 없다. 그러니 서서히 신뢰를 쌓아 자신을 의지하게 해 자발적으로 따르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팔자에도 없던 사수질이었지만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생각 끝에 사헌은 부드럽게 말하며 지그시 미소지었다.
그러니까 잘 해 봐요. 여기서 같이 살아서 나가보자고요.
네...!
시종일관 어둡던 윤조의 낯이 그제야 조금 밝아졌다. 사헌은 피식 웃고는 천천히 앞서 걷기 시작했다. 그런 사헌의 뒤를 졸졸 따라가며, 윤조는 조곤조곤 말을 꺼냈다. 대충 들어보니 사헌이 있어 정말 다행이고 큰 행운이라며 앞으로도 열심히 하겠다는 류의 이야기였다. 예, 예. 간단히 대꾸하며 계속 앞서 걷다 보니 문득 윤조의 말소리가 끊겼다. 황급히 뒤돌자 어느새 윤조는 사라지고 끝없이 펼쳐진 캐비닛만이 가득했다. 이상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윤조는 자신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는데... 물고기 씨? 윤조를 불러 보았지만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물고기 씨! 목소리 크기를 좀 더 높여 다시 한 번 외쳤지만 사위는 소름끼칠 정도로 적막하기만 했다. 사헌은 잠시 멈춰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미로처럼 사방을 에워싼 캐비넷들 사이엔 비슷한 생김새의 공간이 끝없이 반복되고 있었다. 윤조를 찾겠답시고 이렇게 복잡하고 드넓은 공간을 헤메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애시당초 가려고 했던 방향으로 쭉 가는 게 합리적이었다. 어차피 락커룸 내부에 비치된 안내판도 많으니 바보가 아닌 이상 윤조도 알아서 자신의 캐비닛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빠른 판단을 마친 사헌은 걷는 속도를 높였다.
계속 걷다 보니 캐비닛에 적힌 숫자가 어느새 1700번대에 접어들었다. 수많은 캐비닛들 중 1765번을 찾아낸 사헌은 캐비닛에 가까이 다가갔다. 손잡이 부분에는 잠금 장치가 걸려 있었는데, 작은 글씨로 승선카드와 입장권의 바코드를 인식하라고 쓰여 있었다. 시키는 대로 승선카드와 입장권의 바코드를 갖다대자 삐빅 하는 소리와 함께 캐비닛의 잠금 장치가 철컥 풀렸다. 손잡이를 당겨 문을 열어보니 캐비닛 내부는 겉모습보단 훨씬 컸다. 사헌 같은 성인 남성이 몸을 구긴다면 충분히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캐비닛 내부에는 수건 2개와 반팔과 반바지로 구성된 무채색의 찜질복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아무래도 스파인데 정장에 구두까지 신고 들어가기엔 좀 그렇지. 침수되었던 워터파크 어둠 이후 옷차림에 신경쓰게 된 사헌은 기다렸다는 듯 옷을 갈아입고 캐비닛의 문을 닫았다.
한결 편해진 옷차림으로 주위를 둘러보니 [스파 & 피트니스 센터 입구] 라고 적힌 안내판이 눈에 들어왔다. 안내판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줄곧 걸으니 탁 트인 공간이 나왔다. 왼편에는 스파 입구로 향하는 출입구가, 오른 편에는 피트니스 센터로 향하는 출입구가 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샤워장으로 통하는 입구와 편하게 누울 수 있는 소파베드와 의자들이 자리했다. 의자들이 바라보고 선 벽면에는 커다란 모니터가 걸려 있었는데, 넓은 공간이었지만 인영은커녕 인기척 하나 느껴지지 않은 공간을 채우는 건 모니터 속 스파 내부 시설을 안내해주는 영상에서 흘러나오는 소리 뿐이었다. 그게 이 공간을 공허하고 기묘하다고 느끼게 했다. 꺼림칙한 기분을 애써 몰아내며, 사헌은 아무 소파베드에 기대고 앉아 모니터를 응시했다.
각종 이벤트 자쿠지와 찜질방을 닮은 스파 시설의 모습이 담긴 영상이 흘러갔다. 스파 시설 소개 영상이 끝나자 화면이 잠깐 암전되더니 새로운 영상이 나왔다.
스페셜 메인 이벤트까지 D-4
대공연장에서 열릴 특별한 이벤트에 탑승객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스페셜 메인 이벤트? 무슨 퍼레이드라도 하는 걸까. 사헌은 무심코 주머니를 뒤져보았다. 텅 빈 주머니 속을 더듬어보고 나서야 안내 책자를 정장과 함께 캐비닛 안에 넣어두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아직 내용을 확인해보지 않은 <아비댜 투데이> 정도는 챙겼어야 했나. 작은 아쉬움이 일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머지 팀원들이 스파 입구에 도착할 때까지 모니터에 나오는 영상이나 꼼짝없이 보고 있어야 했다. 오늘 자정 정찬 레스토랑에서 열리는 갈라 나이트 파티를 즐겨보세요! 몇 가지의 영상이 무한히 반복되는 모니터를 지루하게 감상하던 사헌의 귀로 인기척이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까마귀 가면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사헌과 마찬가지로 까마귀 가면도 검은 정장에서 찜질복으로 갈아입은 채였다. 탁 트인 공간에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소파베드에 앉아 있던 사헌을 발견한 까마귀 가면이 사헌의 옆에 앉으며 말했다.
빨리 오셨네요. 제가 두 번째인가요?
네. 근데 혹시 안내 책자 가지고 있으실까요?
아 이런, 캐비닛에 두고 왔어요. 중요한 건이에요?
아뇨. 그냥 기다리는 동안 읽어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여쭤봤어요. 저도 캐비닛에 두고 왔거든요.
사헌은 부러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아아. 작게 수긍한 까마귀 가면이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벽에 걸린 모니터에서는 스파 홍보 영상이 나오고 있었다. 스파 & 피트니스 특별 회원권을 구매하여 월 5500 크레딧에 모든 시설을 즐겨보세요. 자세한 사항은 피트니스 센터 카운터에서 문의... 지루하게 앉아 아까부터 반복되는 영상을 한 귀로 대충 흘려보내고 있는데, 정적 사이로 까마귀 가면이 불쑥 입을 열었다.
물고기 씨랑은 원래부터 아는 사이였어요?
원래부터? 그게 무슨 뜻인지...
아, 제가 말을 헷갈리게 했나봐요. 제 말은, 여기 입사하기 전부터 아는 사이였는지 묻는 거예요.
그건 아닌데요. 왜요?
두 분, 많이 가까운 것 같아서요.
사헌은 그 말에 동의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았다. 그저 아, 하고 짧게 뱉고는 고개를 돌려 까마귀 가면을 바라보았다. 까마귀 가면은 은은한 미소를 띄우며 말을 이었다.
정예팀 앞에서 물고기 씨를 두둔해주는 거 보고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여기서 마무리팀에 신경 써주는 사람은 솔직히 아무도 없잖아요.
사헌은 까마귀 가면 아래 품은 눈동자를 가만히 응시하다, 시선을 옮겨 까마귀 가면의 외양을 슥 훑었다. 자신과 엇비슷한 성인 남자의 건장한 체격. 키가 작고 비실비실한 윤조와는 달랐다. 전체적인 인상은 20대 후반의 평범한 회사원에 가까웠다. 적당히 성격 좋고 서글서글한 타입인가. 지금 자신에게 하는 말도 다른 팀원들이 도착하는 걸 기다리는 동안 아이스 브레이킹용으로 분위기를 풀려는 칭찬인 것 같고. 속내를 가늠하던 사헌은 이내 고개를 저으며 머쓱하게 웃었다.
그런가요? 사실 걱정하고 있었어요. 제 욕심 때문에 팀원 구성에 피해가 간 건 아닐까 하고요. 아무래도 정예팀 주임이 한 명 더 있는 상태로 탐사하는 게 더 나을 테니까...
음, 아니라고는 말 못하겠죠. 그치만 인상 깊었어요. 아무리 그래도 마무리팀 사원도 사람인데, 없는 인력 취급을 하는 건 너무한 것 같다고 생각하던 참이었거든요. 물론 물고기 씨는 뭐랄까, 이런 곳에 투입되기엔 좀 앳되어 보이긴 하지만.
아, 저도 모르게 말이 많아졌네요. 집에 딱 저만한 동생이 있어가지고 제가. 까마귀 가면이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괜찮다며 고개를 젓자 까마귀 가면은 살가운 투로 사헌에게도 형제자매가 있냐고 물어왔다. 아... 훅 치고 들어오는 사적인 질문에 사헌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떨떠름한 미소를 지으며 대충 둘러대려는데, 반가운 기색을 띤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염소 님!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윤조가 서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빠른 발걸음으로 다가오던 윤조는 사헌의 옆에 앉아있던 까마귀 가면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받아준 까마귀 가면이 말했다. 마침 물고기 씨 얘기 중이었는데, 딱 왔네요. 저, 저요? 윤조가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자 까마귀 가면이 씩 웃었다.
염소 씨랑 많이 친해보여서 궁금했거든요. 어떻게 알게 된 사이인가 해서.
아, 전에 같은 어둠에 투입됐는데 그때 알게 됐어요.
그래요?
네. 물론 전 거기서 민폐만 끼쳤지만요... 정말 감사하게도 염소 님이 제 목숨을 구해주셨어요. 지금 여기 이렇게 서 있는 것도 다 염소 님 덕분이에요.
윤조와 자신을 번갈아 쳐다보는 까마귀 가면의 시선이 느껴졌다. 됐다니까요. 사헌은 뒷목을 긁적이다 툭 뱉었다. 진짜 감사하면 어리버리하게 굴지 말고 빠릿빠릿하게 알아서 잘 처신하든가... 덧붙이고 싶은 말은 목구멍 아래로 삼킨 채, 사헌은 주제를 돌렸다. 근데 아까 잘 따라오다가 갑자기 어디로 갔던 거예요? 뒤돌아보니까 사라져 있던데. 사헌의 말에 윤조는 도리어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네? 제가요? 사라진 건 염소 님이시잖아요...!
네?
의아한 기색을 내비치는 사헌에게 윤조가 설명했다. 사헌의 뒤를 따라가던 중 손에 쥐고 있던 승선 카드를 바닥에 떨어뜨렸고, 허리를 숙여 줍는 사이 사헌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고 했다. 사헌을 찾기 위해 주변을 한참 헤맸지만 아무도 없어 결국 혼자 배정받은 캐비닛으로 가서 옷을 갈아입고 스파 입구까지 온 것이라고 말하는 윤조의 표정은 정말로 당혹스러워 보였다. 뭐, 이곳이 평범한 스파도 아니고 사람 잡아먹는 어둠 속 수상한 스파 아닌가. 장소가 장소다 보니 이런 괴현상은 충분히 일어날 만도 했다. 별 탈 없이 셋이서 스파 입구에서 합류한 것만으로도 다행인 일이다. 하지만 의아한 점이 하나 있다면... 사헌은 캐비닛이 늘어선 구역으로 시선을 옮겼다.
돌고래 주임님이 늦네요.
사헌의 중얼거림에 그제야 성해의 존재를 상기한 듯 윤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차, 찾으러 가야 할까요? 만약 길을 잃으신 거라면...
음, 굳이 그럴 필요 있을까요?
네?
정예팀이잖아요. 정말 길을 잃었다 해도 금방 알아서 찾아오시겠죠.
까마귀 가면의 말에 사헌도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였다. 정예팀이라는 직책은 아무한테나 주는 게 아니다. 그만큼 수많은 어둠 속에서 지독하게 살아남았을 증명하는 칭호에 가깝다. 도대체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건지. 한심한 소리나 하는 윤조를 마땅찮은 눈빛으로 바라보던 사헌은 곧바로 표정을 갈무리했다. 한 10분 정도만 더 기다려보고 그래도 오지 않으면 남은 사람들끼리 탐사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그 말에 까마귀 가면과 윤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지 않는 성해를 기다리는 시간은 무료했다. 벽에 걸린 모니터에서 반복되어 흘러나오는 스파 홍보 영상에 이제는 신물이 날 지경이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옆에 앉은 윤조에게 안내 책자가 있냐고 묻자, 놀랍게도 윤조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머니에서 구깃구깃한 안내 책자를 꺼냈다. 윤조가 가지고 온 것은 <아비댜 투데이>였다. 어둠에 투입된 이후 처음으로 도움이 되는 일을 한 윤조에게 사헌이 작게 미소지으며 고맙다고 말하자 윤조는 아니라고 손사래를 쳤다.
안내 책자를 건네받은 사헌은 곧바로 책자를 펼쳐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수많은 컨텐츠와 시설 소개글이 눈에 들어왔다.
Avidyā Today
DAY 那由他
엔터테인먼트
크루즈 곳곳에서 열리는 각종 어드벤처와 게임에 참여하고 크레딧을 받아가세요! 획득한 크레딧은 5층의 크레딧 상점에서 다양한 물품과 교환할 수 있습니다.
🎮 [상시운영] 크루즈 온보드 게임 부스
크루즈 곳곳에 준비된 미니 게임 부스에서 가볍고 유쾌한 파티 게임을 즐겨보세요! 친구, 가족, 혹은 처음 만난 승객들과 함께 웃고, 경쟁하고, 소소한 상품도 받아가세요. 폭탄 돌리기, 픽셔너리, 룰렛 퀴즈부터 카드 게임까지 다양한 게임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 운영 장소: 선상 로비, 대극장 옆, 데크, 카페 등
✔️ 운영 시간: 자유 참여형 (일정 시간대 마다 진행)
✔️ 경품: 소정의 기념품 또는 크레딧 제공
🌟 갈라 나이트 파티 (매일 00:00~)
크루즈 여행의 하이라이트, 갈라 나이트 파티에 초대합니다. 고급 정찬과 함께 우아한 드레스코드, 아름다운 선상 야경 속에서 특별한 밤을 매일 경험하세요.
✔️ 드레스코드: 포멀(정장 또는 이브닝드레스)
✔️ 장소: 정찬 레스토랑 (4~5층)
나이트 파티라는 단어에 사헌은 위대한 개츠비 영화 따위를 떠올렸다. 살면서 이런 사치스럽고 포멀한 행사를 살면서 가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한 적 없었다. 그것도 언제 죽을 지도 모르는 미확인 어둠 속에서 열리는 파티라면 더더욱. 이런 방식으로는 경험해보고 싶진 않았는데. 정장을 입은 채로 어둠에 진입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일단 드레스코드는 맞췄으니까... 사헌이 속으로 한숨을 삭히는데, 갑자기 뒷편에서 인기척이 들리며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졌다.
다들 벌써 와 계셨네여?
성해가 저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성해 또한 찜질복을 입고 있었는데, 머리에 야무지게 수건으로 양머리까지 한 채였다. 오래 기다리셨져? 미안해여. 고개를 꾸벅 숙이며 사과하는 성해에게 탐사원들은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다. 고맙다며 씩 웃는 성해에게 윤조가 조심스레 말했다. 사실 걱정했어요. 길이라도 잃으신 게 아닐까 하고... 그 말에 성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절 걱정했어요?
...네.
으음, 그렇구나... 사실 길 잃은 거 맞아여.
예? 어쩌다가요?
어리둥절해하는 탐사팀원들에게 성해가 설명했다. 별 건 아니구, 내부 구조를 좀 파악하고 싶어서 주변을 좀 둘러봤어여. 제 캐비닛에서 다른 조원의 캐비닛까지의 거리를 좀 파악해볼까 하구여. 잠깐 떨어진 사이에 혹시 무슨 일이 생길 수도 있는 거잖아여? 그래서 일단은 제 캐비닛에서 제일 가까운 까마귀 씨의 캐비닛이 어디 있는지 한번 찾아보려고 했져. 그런데...
찾을 수 없었어요.
찾을 수 없었다고요? 그게 무슨 뜻인지...
말 그대로에여. 까마귀 씨의 1324번 캐비닛에 도달할 수 없었어여. 물리적으로.
네? 하지만... 락커룸엔 안내판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데다가 879번에서 1324번으로 가려면 숫자가 커지는 방향으로 걷기만 하면 되잖아요?
까마귀의 질문에 성해는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저도 처음엔 안내판을 따라 움직였어여. 하지만 같은 공간을 계속 빙글 돌더라고여. 그래서 숫자가 커지는 방향으로 걸어봤져. 하지만 어떻게 걸어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879번으로 다시 돌아왔어여.
아.
결국 그냥 포기하고 스파 입구를 찾으면서 걸으니까 이렇게 금방 도착하게 되더라고여. 어쩌면 캐비닛의 정해진 주인이 아닌 타인이 캐비닛에 접근하는 걸 제한하려고 하는 걸지도 모르겠어요.
그럴 지도 모르겠네요. 왜냐면 저희도 유사한 경험을 했거든요. 우연일지도 모르지만.
사헌은 윤조와 함께 걷다 윤조가 갑자기 사라진 일에 대해 언급했다. 성해는 가만히 사헌과 윤조의 설명을 듣더니, 설명이 끝나자 이렇게 말했다.
이 공간, 의도적으로 혼자 움직이게 만드는 것 같네여.
왜, 왜일까요?
음, 글쎄여. 아마 혼자 움직이면 습격하기 더 편할 테니까?
히익. 사색이 된 윤조의 얼굴을 본 성해가 싱긋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농담이에여. 그리고는 차분해진 얼굴로 덧붙였다.
특정 캐비닛에 도달할 수 있는 게 그 캐비닛의 주인 뿐이라면, 주인과 주인이 아닌 사람을 구별하는 명확한 기준이 있을 거예여.
입장팔찌 말씀이시군요.
넹. 아니면 승선카드일 수도 있져. 어쩌면 둘 다거나. 그런고로, 우리가 알아봐야 할 건 세 가지에여.
......
첫째, 특정 캐비닛의 주인과 주인이 아닌 사람이 함께 이동하며 떨어지지 않을 경우, 해당 캐비닛 앞까지 도달하는 것이 가능한지. 둘째, 특정 캐비닛의 주인이 아닌 사람이, 해당 캐비닛 주인의 입장 팔찌와 승선 카드를 소지하고 있을 경우, 그 캐비닛 앞까지 도달할 수 있는지. 셋째, 주인이 아닌 사람이 해당 캐비닛의 잠금을 해제할 수 있는지.
손가락을 펼친 성해가 손가락을 차곡차곡 접으며 말했다. 그리고는 캐비닛이 광활히 펼쳐진 락커룸을 바라보았다. 다들 얌전히 앉은 채 성해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음. 짧은 침음 후에 성해가 말했다. 방금 전까지 저기서 헤매고 나왔더니 좀 지겹네여. 락커룸 뒤지는 건 돌아가는 길에 하져. 일단은 새로운 공간부터 살펴보자구여. 그 말에 모두 군말없이 동의했다.
샤워장은 별달리 특별할 게 없었다. 빠르게 샤워장을 훑은 탐사팀은 스파 내부로 이동했다. 스파 내부에는 락커룸과 마찬가지로 아무도 없었다. 알 수 없는 성분의 물만 보글보글 끓는 탕들이 즐비한 공간에는 희뿌연 수증기가 두터웠다. 숨을 들이쉬는 것만으로도 뜨겁고 축축한 솜이 기관지를 틀어막는 듯 갑갑한 느낌이 들어 사헌은 어서 빨리 이 장소를 벗어나고 싶어졌다. 뒤에 서 있는 사헌이 그러거나 말거나, 빠른 걸음으로 거침없이 앞서 나가던 성해의 발걸음이 불쑥 멈췄다. 맨질맨질한 상아색 대리석으로 둘러싸인 탕 앞이었다. 뜨거운 김이 몽글몽글 솟아나는 탕 안에는 속을 들여다 볼 수 없을 정도로 짙은 색의 시커먼 물이 가득 차 있었다.
이벤트 탕인가봐여. 색이 특이하네. 들어가 보실래여?
예? 당황한 사헌이 되물었다. 흔들리는 동공이 원산지가 불분명한 탕을 재빨리 훑었다. 방황하던 시선은 발치에 세워져 있는 푯말을 발견하고 탕의 이름을 읽었다. <속죄의 연못>. 아니 무슨 탕 이름이 이렇게 불길하냐... 사헌은 억지웃음을 지으며 시선을 옆으로 옮겼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성해의 뒤로 빨간 불이 켜진 온도계가 시야에 들어왔다. 108°C. 씨발 끓는점을 돌파했잖아!
주, 주임님. 저거 108도인데요?
그래요? 살균도 되고 좋네여. 회사 다니면서 그동안 지은 죄를 이참에 깨끗하게 씻어내봐여.
......
까마귀 씨? 도망가지 말고 이리 오세여. 어라, 물고기 씨는 왜 도망가여? 물고기 씨는 아직 신입이니까 면제해 드릴게여.
조용히 기둥 뒤로 몸을 숨기던 까마귀 가면의 어깨가 움찔 튀었다. 반면 물고기를 언급하는 성해의 목소리만큼은 부드러워서, 사색이 되어 뒷걸음질치던 윤조는 안도한 얼굴로 슬금슬금 다가왔다. 사헌과 까마귀 가면이 당황해 식은땀만 흘리고 있자, 둘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성해가 내뱉었다. 농담이에여. 목소리는 가벼웠으나 빤한 얼굴로 보아 진의를 알 수가 없었다. 그치만 저 탕을 사내 복지 시설로 설치하면 참 좋을 텐데 그져. ...아니, 그냥 진심 같기도 하고. 사헌은 자꾸만 송글송글 배어나오는 땀을 팔로 대충 훔쳐내며 생각했다.
욕탕 탐사는 별 소득이 없었다. 정체 모를 액체들이 훈기를 내뿜고 있는 탕들 사이를 돌아다니다 보니 숨이 저절로 턱 막혔다. 괜히 가슴을 주먹으로 쿵쿵 때리며 갑갑함을 해소해보려는 사헌의 뒤로 힘없는 발걸음이 따랐다. 발걸음을 질질 끌던 윤조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며 숨을 가쁘게 뱉었다. 억눌린 한숨이 작게 샜다. 그 소리에 사헌은 고개를 돌렸다. 열기에 붉어진 얼굴을 발견한 사헌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괜찮아요?
네, 그냥 조금 더워서...
전혀 안 괜찮아 보이는 얼굴로 괜찮다 말하니 신빙성이 없었다. 영 미심쩍은 얼굴로 윤조를 바라보던 사헌의 옆에 성해가 불쑥 끼어들었다. 온도랑 습도가 높은 환경이라 숨이 막혔나봐여. 공기가 잘 통하는 곳에서 잠깐 쉬면 괜찮아질 거예여. 그렇게 말한 성해는 잠시 팔짱을 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목욕탕이 즐비한 공간에는 딱히 앉아서 쉴 만한 공간도, 공기가 잘 통하는 공간도 없어 보였다. 마땅한 공간이 없네. 성해의 혼잣말에 윤조가 위축됐다. 죄, 죄송합니다... 식은땀을 흘리면서 연신 고개를 숙여 사과하는 등이 유독 작아 보였다. 아니에여. 충분히 그럴 수 있져.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한 성해가 고개를 돌려 사헌을 바라보았다.
염소 씨. 물고기 씨를 데리고 피트니스 센터로 먼저 가 있으세여.
네?
아직 탐사 못한 나머지 공간은 저랑 까마귀 씨가 탐사할 테니까, 피트니스 센터에서 기다리고 계시면 나중에 합류할게여.
아, 네. 알겠습니다.
사헌은 비틀대는 윤조에게 다가가 윤조의 팔을 어깨에 둘렀다. 윤조를 부축한 채 뒤돌아 멀어지는 사헌의 등 뒤로 성해가 외쳤다. 깊게 들어가지 말고 엇갈리지 않게 입구 쪽에서 대기하고 계세여. 사헌은 알겠다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헌은 기억을 되짚어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락커룸으로 돌아가는 내내 윤조는 말이 없었다. 대신 가쁜 숨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어깨에 걸친 팔의 무게감이 어쩐지 익숙하게 느껴졌다. 그러고보니 심야일미식당에서 윤조를 구출할 때도 이렇게 부축했었지. 사헌은 일촉즉발의 상황에도 망설임 없이 윤조를 부축했던 영은을 떠올렸다. 도움이 필요한 동료를 기꺼이 돕는 건, 당연한 일이잖아요. 흔들림 없던 영은의 말. 영은은 윤조마저도 동료로 생각했던 걸까? 아무런 쓸모도, 도움도 되지 못했던 무력한 마무리팀 신입 따위도.
죄송해요...
뭐가요.
자꾸 이렇게 민, 민폐만 끼치고 제가...
......
잘, 잘하고 싶었는데...
사헌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계속 걸었다. 삭막한 정적 속, 윤조는 잔뜩 주눅들어 고개를 떨궜다. 그 작은 움직임에 사헌은 옆을 곁눈질했다. 새까만 머리칼 사이로 붉어진 코끝이 눈에 들어왔다. 사헌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왜 입사했어요?
......
혼내는 거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예요. 소원권으로 뭘 하려고?
...형이 아파요.
......
윤조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말을 이었다. 눅눅한 목소리가 사헌의 귓가에 침잠했다. 형은... 수영선수였는데, 사고를 당해 어깨를 다쳐서 은퇴했어요. 어깨 부상 정도면 복지몰에서 파는 재생 물약으로 해결할 수 있을 텐데요. 사헌이 대꾸했다. 윤조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어깨는 재활까지 다 끝났어요. 근데...
수영을 그만 둔 뒤로 방 밖으로 안 나와요. 형이.
......
가족이라고는 형밖에 없는데 저는...
......
그냥 형이 예전처럼 행, 행복했으면 좋겠어서...
사헌은 입을 다물었다. 몇 문장만으로 윤조가 가진 사연이 짐작이 됐다. 백일몽에서 파는 재생 물약으로는 소용 없었을 것이다. 재생 물약은 외과적 상처에만 효과가 있지 마음의 상처에는 효과가 없으니까. 윤조를 바라보던 사헌은 눈을 내리깔았다.
형을 위해서라도 잘해야 하는 게 맞는데... 자, 자꾸 짐만 되고...
......
이런 거 하나 제대로 못 하는 제가 너무 한심해서...
조언 하나 해줄까요.
물기 어린 목소리를 잠자코 듣던 사헌이 불쑥 말을 끊었다.
이 어둠에서 나가게 되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퇴사하세요.
...네? 왜, 왜요?
하인리히 법칙이라고 들어봤어요? 어떤 대형 사고가 발생하기 전에는 같은 원인으로 수십 번의 경미한 사고와 수백 번의 징후가 반드시 발생한다는 법칙이에요. 그럼 어디 한번 생각해보자고요. 물고기 씨가 입사한 이후로 어둠을 적어도 수십 번 이상은 탐사했을 거예요. 그렇죠?
...네.
수십 번의 탐사에서 물고기 씨가 다칠 뻔한 적은 얼마나 되나요? 부상을 입은 적은요? 더 나아가 죽을 뻔한 위기를 겪은 게 몇 차례일까요? 일단 죽을 뻔한 적은 적어도 한 번 이상이겠네요. 제가 한 번 구해드린 적이 있으니까.
......
그동안 물고기 씨가 어둠을 탐사하면서 겪었던 크고 작은 위기들은 전조에 불과해요. 운좋게 넘긴 수차례의 위기들이 언젠가는 물고기 씨의 죽음으로 연결되겠죠. 사실 알고 있지 않아요? 어둠에서 살아남는 건 잘해보겠다, 노력하겠다 따위의 기세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물고기 씨는 단지 운이 좋아서 지금 여기에 서 있는 거예요.
......
능력 밖의 일에 욕심내지 말고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하세요. 불가능한 걸 알면서도 뛰어드는 건 용기가 아니라 만용이니까.
쏟아지는 말에 윤조는 잠시 멍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곧 울듯말듯 인상을 구겼다. 사헌은 그런 윤조를 달래지도, 다그치지도 않았다.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윤조를 부축한 채 다시금 발걸음을 내딛을 뿐이었다.
둘이 몸 담고 있는 곳이 일반적인 회사였다면, 윤조에게 신입이 아무 것도 모르는 건 당연하고 그런 건 시간이 해결해줄 문제라며 통상적인 위로를 건네고 어영부영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백일몽 주식회사에서 현장탐사팀으로 일하며 어둠을 탐사한다는 건 목숨이라는 크나큰 리스크를 짊어졌음을 의미한다. 특히 마무리팀이라면 더더욱. 소원권은커녕 재생 물약조차 구경도 못하고 죽겠지. 그런 상황에서 노력하면 할 수 있다며 등 떠미는 것이야말로 희망고문 아닌가. 형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는 소원은 굳이 소원권이 아니어도 충분히 이룰 수 있을 텐데. 형은 적어도 살아있으니까...
그러니 이건 사헌이 건넬 수 있는 최대의 호의였다. 현재 자신에게 필요한 건 소원권 따위의 거창한 것이 아닌 현실을 직시하는 것임을 윤조는 알 필요가 있었다. 아무리 거창한 소원이어도 죽어서 누리지 못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니까. 묵묵히 걷는 사헌의 귀에 작게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윤조가 팔로 얼굴을 벅벅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염소 님. 물기를 머금은 볼품없는 목소리였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사실 전 그냥... 막연하게 소원권이라면 다 나아질 거라고 믿고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었던 걸지도 몰라요.
......
하지만... 제게 이런 말씀을 하신다는 건, 염소 님도 언젠간 그런 생각을 해보셨다는 거겠죠.
......
염소 님이 목숨을 걸어서까지 이루고 싶은 소원, 뭔지 여쭤봐도 되나요...?
예상치 못한 윤조의 질문에 사헌은 잠시 멈칫했다. 목숨을 걸어서까지 이루고 싶은 소원. 사헌은 오래 전부터 품고 있었던 소망을 떠올리려고 했다. 그러나 머릿속을 스친 건 솔음의 얼굴이었다. 아. 본딩. 그래, 본딩을 끊고 싶었다. 오직 죽음만이 끊을 수 있다는 영원한 족쇄를. 하지만... 그 많은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소원권을 그런 일에 쓰는 건 여전히 아깝게 느껴졌다. 사헌은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소원권으로는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본딩 따위는 소원권이 아니라도 어떻게든 끊어낼 수 있을 것이다.
아니, 반드시 끊어낼 것이다. 그 어떤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어두운 사헌의 얼굴에 윤조의 걱정스러운 시선이 닿았다. 사헌은 곧바로 표정을 갈무리했다. 그리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비밀이에요.
*
피트니스 센터 입구로 들어가니 곧바로 데스크가 보였다. 무인으로 운영하는 것인지 데스크는 텅 비어 있었고 그 옆에 키오스크 몇 대가 자리했다. 데스크 뒷편의 반투명한 유리벽 너머로 운동기구들이 늘어선 공간이 보였다. 스파와 마찬가지로 피트니스 센터도 텅 비어 있었다. 피트니스 센터 로비로 들어선 사헌은 윤조를 부축한 채 로비 가운데에 놓인 의자로 향했다. 아무 자리를 골라 윤조를 앉힌 뒤 그 옆에 앉아 배어 나오는 땀을 닦았다.
그렇게 얼마인지 모를 시간이 흐르고, 현기증과 가슴 답답함을 호소하던 윤조의 상태가 괜찮아지자 사헌은 윤조와 함께 로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겉보기엔 그저 평범한 피트니스 센터와 별 다를 바가 없었다. 사헌은 유리벽 너머를 보며 생각했다. 스파와 마찬가지로 딱히 탐사할 만한 건덕지도, 위험 요소도 없는 것 같다고.
이상했다. 추정 등급이 B~C 정도면 반드시 인명 피해가 따를 수밖에 없는 구조의 어둠일 게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 크루즈를 뒤져본 결과, 그저 특이한 형태의 탑승객들이 존재할 뿐 사헌이 여지껏 들어간 그 어떤 어둠보다 위험 요소가 없었다. 뭐, 끝없이 캐비닛이 늘어진 기묘한 락커룸이 존재하긴 했지만, 그건 길만 잘 찾는다면 문제 없었다. 아니, 섣불리 판단하기엔 이르다. 탐사는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니까. 아직 탐사해야 할 공간은 한참이나 남아 있었다. 까마득하게.
염소 님, 이것 좀 보세요.
키오스크를 들여다보던 윤조가 사헌을 불렀다. 가까이 다가간 사헌은 윤조가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EVENT>
★ 스파 & 피트니스 특별권 월99005500 credit
- 특별 회원 키트(고급 어메니티)
- 원하는 캐비닛 지정 사용, 아로마 풀코스 무료 이용 등 다양한 옵션 포함★ 스파 & 피트니스 정기권
65004500 credit
- 정기 회원 키트(일반 어메니티)
- 스파 & 피트니스 내 모든 시설 무제한 이용, 아로마 마사지 1회 무료 등 다양한 옵션 포함
특별권과 정기권을 할인 판매하고 있었다. 사헌의 시선이 하단에 있는 크레딧이라는 단어에 길게 머물렀다. 승선 카드가 크루즈에서는 결제수단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던 코알라 가면의 말이 떠올렸다. 사헌은 키오스크에 승선 카드를 꽂고 특별 회원권을 선택했다. 결제 버튼을 누르자 다음과 같은 화면이 떴다.
카드의 잔액이 부족합니다.
역시 예상했던 바였다. 아마 크루즈 곳곳에 이런 유료 서비스들이 존재할 것이고 그걸 이용하기 위해선 크레딧을 지불해야 할 것이 분명했다. <아비댜 투데이>와 <탑승객 이용 가이드>의 내용대로, 크루즈에서 열리는 각종 이벤트에 참여하여 크레딧을 얻으면 될 것 같았다. 그렇게 얻은 크레딧으로...
크레딧 상점
5층에 위치하며 그랜드 아비댜 호만의 특별한 상품 및 서비스를 판매하는 상점입니다. 바라밀 코퍼레이션 소속 6인의 전문가가 까다롭게 선정한 삼계의 진귀한 상품들은 탑승객 여러분의 즐거운 추억이 될 뿐만 아니라 주변인에게 선물하기 좋은 기념품이 될 것입니다.
아이템을 교환할 수 있겠지. 사헌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어둠의 등급이 낮은 편은 아니니 제법 쓸만한 아이템들이 있을 것이다. 야외 공간 탐사를 마치면 곧바로 게임 부스로 가서 크레딧을 획득해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헌의 뒤로 인기척이 들렸다.
아, 여기 계셨네여.
어느새 나타난 성해와 까마귀 가면이 피트니스 센터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위협이 될만한 특이 현상은 딱히 없었는지 성해와 까마귀 가면은 멀쩡해 보였다. 다만 이전과 비교해 보았을 때, 성해의 몰골은 진입 시점 그대로인 반면 까마귀 가면의 머리카락과 찜질복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불가마 사우나 안에 들어가기라도 한 모양새였다. 사헌의 의아한 눈길을 알아챈 까마귀 가면이 보란 듯이 팔뚝을 내밀었다. 사헌이 차고 있는 종이 팔찌와는 달리, 글씨가 음각된 어두운 색의 고무 팔찌가 까마귀 가면의 팔목에 걸려 있었다. 정기권 / 스파 & 피트니스 / 1324. 사헌의 시선이 빠르게 팔찌를 훑었다.
짠. 정기권을 받았어요.
정기권이요? 어떻게요?
이벤트에 참여했거든요.
이벤트요?
여전히 어리둥절한 윤조와 사헌을 보며 까마귀 가면은 설명했다. 윤조와 사헌이 피트니스 센터로 떠난 뒤, 스파 구역을 마저 탐사하다 사우나를 발견했는데, 사우나 입구에는 기간 한정 이벤트로 사우나에서 10분 이상 버티면 무료로 입장권을 정기권으로 업그레이드 시켜준다는 안내문이 붙어있었다고 했다.
제가 몸 지지는 걸 좋아하거든요.
까마귀 씨가 더위에 강한 줄 몰랐져. 대단했어여.
아, 돌고래 주임님도 까마귀 씨랑 함께 정기권을 받으신 거예요?
아뇨. 전 그런 건 딱 질색이에여. 돌고래는 온도에 민감하잖아여.
당신이 돌고래는 아니잖아... 사헌은 목끝까지 올라온 말을 삼켜내고는 가만히 까마귀 가면의 팔목에 걸린 정기권 팔찌를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무모한 면이 있잖아. 사헌은 생각했다. 아무리 여지껏 별다른 위험이 없었다 하더라도, 수상쩍은 사우나 안에서 10분이나 버틸 생각을 한 정신머리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아니면, 정기권에 그 정도 가치가 있나? 사헌은 키오스크에 적혀있던 설명을 떠올렸다. 아로마 마사지, 모든 시설 무료 이용 가능 옵션은 넘어가자. 아무 쓸모도 없어 보이니까. 역시 정기 회원 키트 쪽인가? 뭔가 쓸모 있는 아이템이 있었을지도 모르지. 사헌은 사근사근한 미소를 띄웠다.
키트도 받으셨어요? 설명 보니까 정기 회원 키트도 준다던데.
아, 네. 근데 뭐 별 거 없더라고요. 사실 그걸 받으려고 참여한 건데 말이죠.
까마귀 가면이 가방에서 파우치를 꺼냈다. 스파 & 피트니스 센터의 로고가 새겨진 천 파우치를 열자 그 안에는 샘플 크기의 목욕용품들이 들어있었다. 여느 호텔 어메니티와 다를 바 없는 생김새였다. 만져 봐도 되나요? 사헌의 물음에 까마귀 가면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을 받은 사헌이 파우치 안으로 손을 넣었다. 물품들을 집어 내용물을 찬찬히 살펴봤다. 바디워시, 로션, 샴푸, 린스... 정말로 평범한 목욕 키트였다. 흥미를 잃은 사헌은 파우치에 물품을 다시 넣었다. 그 사이 성해가 윤조에게 물었다. 몸은 괜찮아여? 네. 좀 앉아있으니까 괜찮아졌어요. 다행이네여.
빠르게 살펴보고 나가자구여. 갈 길이 머니까여.
네.
성해는 이전보다 빠른 속도로 앞장섰다. 나머지 이들도 그 뒤를 따랐다. 스파와 마찬가지로 피트니스 센터도 별달리 특별한 구석이 없었다. 이용객이 없다는 점을 제외하면 평범한 피트니스 센터라고 봐도 무방했다. 별다른 소득 없는 탐사를 마치고, 락커룸으로 향하는 길목 앞에서 성해는 탐사원들을 둘씩 나눴다. 번호가 가까운 순으로 성해와 까마귀 가면이, 윤조와 사헌이 함께 움직여보기로 했다. 30분 뒤에 출구에서 만나여. 벽에 걸린 시계를 가리킨 성해는 곧 잰걸음으로 까마귀 가면과 함께 캐비닛 사이로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가만히 보던 사헌이 말했다. 우리도 가죠. 아, 네. 허겁지겁 대답한 윤조가 한 발짝 정도 떨어진 채 뒤에서 종종걸음으로 사헌을 쫓았다. 그런 윤조를 알아챈 사헌은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잡아요.
네, 네? 뭘요?
사헌은 손을 내밀었다. 그 행동에 윤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서로 붙어있는 채로 이동해보기로 했잖아요. 아까 락커룸에서 방심한 사이에 엇갈렸으니까.
아, 네. 그랬었죠.
정 부담스러우면 옷을 잡든가 알아서 하세요.
아, 아뇨! 부담스럽지 않아요. 정말로요.
다급히 뱉은 윤조가 사헌의 손을 붙잡았다. 따뜻한 온기를 품고 있는 작은 손이었다. 사헌은 잠시 잡은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툭 뱉었다. 누구 캐비닛으로 갈까요. 저, 전 염소 님이 편하신 대로요. 그럼 물고기 씨 캐비닛으로 가요.
손을 잡은 채 이동하는 내내 둘 중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캐비닛만이 늘어선 삭막한 풍경은 영상을 끊임없이 되감기하는 화면처럼 반복됐다. 그렇게 묵묵히 걷기만 하다, 불현듯 락커룸 곳곳에 설치된 번호 안내판을 보니 1900번대에 도달해 있었다.
← 1 ~ 1800
2000 ~ 9999 →
윤조의 캐비닛은 2136번이니, 오른쪽으로 가면 될 것 같았다. 사헌은 주저하지 않고 발걸음을 옮기려고 했다. 그런데 한 박자 늦게 움직인 윤조에 의해 팔이 조금 당겨졌다. 고개를 돌려 윤조를 보자 윤조가 심각한 얼굴로 안내판을 응시하고 있었다.
왜요?
제 기억으로는 이 방향이 아니었던 것 같아서...
윤조가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천편일률적으로 빼곡히 늘어선 캐비닛들을 유심히 살피던 윤조는 곧 끙, 소리를 냈다. 죄송해요. 착각한 것 같아요. 그래요? 그럼 일단은 안내하는 대로 가보죠. 사헌의 말에 윤조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둘은 한참을 내리 걸었다. 지루하리만치 반복되는 캐비닛을 배경으로 걷다 보니 마치 같은 곳을 빙빙 도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사헌은 제자리에 멈춰 서서 눈앞에 있는 캐비닛의 번호를 확인했다. 1921. 아직도 1900번대였다. 100의 간극이 이렇게나 컸었나. 사헌은 인상을 찌푸렸다. 윤조의 걱정스러운 시선이 따라붙었다. 일단 좀 더 걸어보죠. 사헌이 말했다.
아무리 걸어도 2000번대의 캐비닛은 나타나지 않았다. 1900번대 캐비닛이 계속 반복되고 있었다. 이 공간의 어떤 기묘한 힘이, 일부러 길을 잃게 만드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같은 구간을 돌고 돌다, 처음 보았던 안내판 앞에 다시금 도달했을 때, 사헌은 제안했다.
이번엔 반대 방향으로 가보는 게 어때요?
네? 왜요?
아까 기억으로는 이쪽 방향이 아니었다고 했잖아요? 그럼 안내판이 잘못된 걸지도 모르잖아요.
아하...
그대로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사헌은 발걸음을 재촉하며 눈앞에 보이는 캐비닛의 숫자들을 빠르게 훑었다. 1891, 1883... 캐비닛의 숫자가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반대 방향으로는 진입해도 상관 없다는 건가? 원래 목적지에서 점점 멀어지는 걸 느낀 사헌이 발걸음을 멈추려던 순간이었다.
어? 염, 염소 님, 이것 좀 보세요.
윤조의 손가락 끝이 가리킨 방향으로 사헌은 고개를 돌렸다. 9999. 1800번대에서는 나올 수 없는 숫자의 캐비닛이었다. 사헌은 발걸음을 천천히 옮겨 9999번 캐비닛 앞에 섰다. 이상했다. 분명 1800번대를 헤매고 있었는데. 사헌은 황급히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1871, 6910, 7743, 1492, 2052, 3263... 캐비닛의 번호들이 마구잡이로 섞여 있었다. 흡. 윤조가 작게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지? 좌우로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펴 봤지만 락커룸 곳곳에 서 있던 친절한 안내판은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앞으로 계속 나아가야 할까? 사헌은 고민했다. 아니. 이렇게 뒤죽박죽으로 숫자가 섞인 공간보다는 차라리 같은 구간이 반복되는 공간이 덜 위험했다. 1900번대는툭 신물이 날 정도로 돌고 돌아서 위험 요소가 없다는 걸툭 이제는 알고 있툭으니까. 이렇게 정상적툭인 락커룸의 형태를 벗어난 장소에툭서는 어떤 위협이 도사툭툭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 왔던 길을 되툭툭툭돌아가자. 그게 합툭툭툭툭리적이니까.
...물고기 씨, 소리 좀 그만 내고 조용히 있을 순 없어요?
네? 전 소리 낸 적이 없는데요...?
그럼 이 툭 소리는 뭔데. 짜증이 난 사헌이 윤조를 돌아보려는 그 순간,
툭
툭
툭
쾅!!!!
눈앞에 있던 9999번 캐비닛의 문이 거세게 열리는 동시에 락커룸의 불이 일순 탁 꺼졌다. 순간 싸늘한 소름이 등골을 타고 흘러내렸다. 뭔가 있다. 이 텅 빈 것만 같았던 을씨년스러운 공간 내부의 공기의 흐름이 바뀌었다. 스산한 바람이 식은땀이 흐르는 목덜미를 스쳤다. 사헌은 본능적으로 땅을 박찼다. 잡고 있던 손을 있는 힘껏 당기며 윽박질렀다. 뛰어 빨리! 이윽고 엉거주춤한 발걸음이 사헌의 뒤를 쫓았다.
어디를 달리고 있는지, 어디로 향하는지는 알 겨를이 없었다. 눈앞은 온통 어두컴컴했고 캐비닛을 두들기는 듯한 툭툭 소리가 온 사방을 울렸다. 그에 헉헉대며 터져나오는 숨소리가 절로 샜다. 맞잡은 손이 땀에 젖어 미끌거렸다. 자꾸만 뒤로 늘어지려는 손이 금방이라도 어둠 속으로 빨려들 것만 같아서, 사헌은 있는 힘껏 윤조를 끌어당겼다. 휘청대는 가벼운 몸이 손쉽게 끌려왔다. 사헌은 여전히 손을 잡은 채 윤조의 등을 선두로 떠밀었다. 빨리 뛰라고! 사헌의 말에 윤조는 헐떡이며 달리기 시작했다. 사헌은 그 뒤를 따르며 힐끗 뒤를 돌았다. 깜깜한 어둠 속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수상한 공기가 숨결처럼 불어오고 있었다. 서슬 퍼런 바람이 사헌의 식은땀 어린 살갗을 어루만졌다. 저절로 몸서리가 처졌다.
그렇게 달리고 있으니 저 멀리 희미한 빛이 보였다. 누가 뭐랄 새도 없이 둘은 그 빛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빠르게 달리는 동안 스쳐지나가는 캐비닛들의 형태는 서서히 뭉개졌다. 분명 네모반듯한 캐비닛들이었는데, 희미한 빛에 가까워질수록 녹아내린 얼음처럼 무너진 형상을 띠고 있었다. 바닥을 박차는 맨발이 양초처럼 바닥으로 흘러내린 캐비닛 번호판을 밟았다. 살갗에 닿는 철제 번호판은 차가웠다. 촉각을 찌르는 위기감 아래 까닭모를 아득함이 고개를 들었다. 초현실적이었다.
저, 저기예요!
사헌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윤조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100m가 채 되지 않는 거리. 온통 깜깜한 공간 속 유일하게 켜진 조명 하나와 그 아래 세워진 안내판. 사헌은 무심코 뒤를 돌았다. 어둠에 삼켜진 락커룸 내부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날카롭게 벼려진 감이, 뒷통수에 도사리던 위협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끼게 했다. 사헌은 뛰던 속도를 부쩍 낮췄다. 느려진 사헌의 속도에 윤조가 고개를 돌렸다.
이제 괜찮아요. 안 뛰어도 될 것 같아요.
그 말에 윤조도 뛰는 걸 멈췄다. 둘은 안내판이 서 있는 곳까지 천천히 걸었다. 안내판에 가까이 다가가자 눈부신 조명이 어깨 위로 쏟아졌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을 날카롭게 찌르는 밝기에 사헌은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가물거리는 눈으로 안내판을 더듬더듬 읽었다. 잔상으로 얼룩진 시야에 글씨가 마구잡이로 번져 보였다.
← 999999 ~ 999999
999999 ~ 999999 →
※ 모든 이용객 여러분께서는 서로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입장하기 ↓
예상치 못한 숫자에 당황하기도 잠시, 사헌은 아래 적힌 문장을 발견했다. 프라이버시라는 뜬금없는 단어는 둘째치고, 다시 입장하기라는 단어와 그 옆에 있는 화살표의 방향이 이상했다. 다시 입장하기. 사헌은 무심코 중얼거렸다.
어, 어디로 가야 할까요?
...글쎄요.
사헌은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거대한 손이 공간을 꽉 쥐어 구겨놓은 것처럼 일그러진 캐비닛으로 둘러싸인 장소였다. 사헌의 시선이 숫자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구겨진 캐비닛의 번호판에 닿았다. 이곳을 더 둘러보는 게 과연 옳은 선택일까? 아니. 0.1초만에 대답이 떠올랐다. 본능과도 가까운 감각이었다.
공간이 의도한 올바른 루트를 벗어난 것 같아요. 이건 그 행위에 관한 경고문이고요.
아...
다시 입장하죠?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는 것 같은데.
네,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렇지만 다시 입장하려면 어떻게 해야하지. 사헌은 안내판을 노려보았다. 아래를 향하고 있는 가증스러운 화살표. 땅으로 꺼지라는 건지 뒤로 가라는 건지 그 방향을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사헌은 허리를 숙였다. 부드러운 카펫 재질의 회색 바닥을 손으로 쓸어봤다. 그 사이, 윤조는 주변에 있는 캐비닛의 문고리를 잡아당겨 봤다. 당연하게도 열리지 않고 찰칵찰칵 소리만 났다. 뒤로 가라는 거야 아래로 가라는 거야... 사헌의 중얼거림에 윤조가 하던 행동을 멈췄다. 그리고 사헌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센터 측에 도움을 요청해 보는 게 어떨까요...?
도움 요청? 뭔 소리예요 그게.
운영 측이면 이용객이 시설을 충분히 이용할 수 있게끔 도와주지 않을까요...
네?
...탑승객 이용 가이드도 그렇고, 기본적으로 이 어둠은 탑승객에게 적대적이진 않은 것 같아서요.
황당해하는 사헌의 눈치를 보던 윤조가 입 주변으로 손동굴을 만들었다.
저, 저기요...! 락커룸에 새로 입장하고 싶은데 좀 도와주세요!
물고기 씨, 지금 도대체 뭐하는...
그때였다. 철컥. 발치에서 소리가 났다. 사헌과 윤조가 딛고 선 바닥이 갈라졌다. 엥. 반응할 새도 없이 몸이 쑥 꺼졌다. 시야가 깜깜해지며 하강감이 일었다. 세찬 공기가 얼굴을 때렸다. 이 감각을 알고 있었다. 불쑥 치미는 기억에 발끝부터 저릿한 느낌이 번졌다. 손끝이 차가워지며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누군가 숨통을 조르는 것처럼 숨이 가빠져 왔고 시야에 노이즈가 끼기 시작했다. 머릿속이 오그라드는 느낌이 엄습하며 바글거리는 노이즈가 눈앞을 덮었다. 토할 것 같은 기분에 사헌이 눈을 질끈 감으려는 순간, 누군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헉! 눈을 뜨자 몸에 푹신한 감촉이 닿았다. 사헌의 떨리는 눈이 주변을 훑었다. 익히 알고 있는 공간이었다. 탁 트인 공간 안, 소파베드와 벽면에 걸린 모니터. 성해를 기다리던 스파 & 피트니스 센터 입구였다. 커헉. 사헌은 거칠게 기침했다. 속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했다. 끅, 커헉, 큭... 헛구역질하며 수그린 등을 작은 손이 두들겼다. 고개를 돌려 옆을 보니 윤조였다. 괘, 괜찮으세요?! 당황한 안색이 창백했다. 사헌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입가를 아무렇게나 문질러 닦고는 소파베드에서 몸을 일으켰다.
다시 돌아왔어요. 다시 입장한다는 게 이런 의미였나봐요.
사헌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새하얗게 질린 사헌의 얼굴에 윤조의 걱정스러운 시선이 닿았다. 사헌은 그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윤조의 뒤에 걸린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모니터는 이전과 같은 화면이 반복해서 나오고 있었다.
스페셜 메인 이벤트까지 D-4
대공연장에서 열릴 특별한 이벤트에 탑승객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잠시 화면을 응시하던 사헌이 고개를 돌렸다. 한쪽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니 성해와 약속했던 30분이 가까워져 있었다. 아무래도 둘이서 함께 이동하는 건 이 기묘한 공간의 특성상 불가능한 일인 모양이었다. 사헌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일단은 각자의 캐비닛으로 가서 옷을 갈아입은 뒤 성해와 까마귀 가면을 바깥에서 기다리자고 했다. 윤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 락커룸으로 들어가 1765번 캐비닛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윤조와 함께 다니며 헤맸던 시간이 허무할 정도로 순조로웠다. 빠르게 환복한 사헌은 캐비닛에 넣어두었던 가방을 챙기고 센터 출구로 빠져나왔다. 출구 앞에는 까마귀 가면과 윤조가 사헌을 기다리고 있었다. 까마귀 가면은 그새 샤워라도 하고 온 모양인지 머리카락이 흠뻑 젖어 있었다. 사헌은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물었다.
돌고래 주임님은요?
다시 안으로 들어갔어요. 제 정기권으로 주인이 아닌 사람이 잠금을 해제할 수 있는지 확인해 보겠다고 하더라고요.
아.
그쪽은 어때요? 수확이 있었어요?
사헌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락커룸 내부에서 윤조와 겪었던 일을 설명했다. 사헌의 설명을 잠자코 듣던 까마귀 가면은 안내판의 프라이버시 부분에서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니까, 락커룸의 기묘한 현상이 결국은 탈의할 때의 프라이버시 때문이라는 거죠?
그런 것 같아요. 언제까지나 추측일 뿐이지만.
저희도 기묘한 경험을 했어요. 수건으로 돌고래 주임님과 제 손목을 묶었는데...
까마귀 가면은 성해와 떨어지지 않기 위해 수건으로 서로의 손목을 연결하여 묶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락커룸을 헤매고 다녔는데, 갑자기 사이렌이 울리더니 반대편에서 엄청난 양의 물이 쏟아졌다고. 그대로 물살에 휩쓸려 정신을 차려보니 혼자였고, 자신의 캐비닛인 1324 앞이었다고 했다. 일단은 어쩔 수 없이 옷을 갈아입고 출구로 향한 까마귀 가면은 출구 앞에서 성해와 마주쳤다. 그리고 성해는 확인을 위해 까마귀 가면의 정기권을 빌리고는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는 것까지가 그의 설명이었다.
샤워를 하고 싶긴 했는데 이런 식으로 물폭탄을 맞고 싶은 건 아니었어요. 까마귀 가면의 말에 윤조가 작게 웃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성해가 출구 밖으로 나왔다. 물살에 휩쓸렸다는 까마귀의 말이 사실이었는지 성해의 머리도 젖어 있었다. 성해의 머리카락에서 떨어지는 물이 성해의 정장 자켓을 적시고 있어, 윤조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성해에게 내밀었다. 성해는 가만히 윤조가 내민 손수건을 내려다보다, 손수건을 건네받고 물기를 닦아냈다. 손수건은 빨아서 돌려줄게여. 성해의 말에 윤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성해까지 일행과 합류하자 본격적으로 중간 보고가 시작됐다. 성해가 승선 카드와 정기권 팔찌를 까마귀 가면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참 요상한 곳이었어여. 다시는 들어가고 싶지 않아여.
왜요?
탈의실에 물이 넘치는 스파가 어디 있어여? 전 새것처럼 깨끗하고 뽀송뽀송했는데 이렇게 쫄딱 젖어버렸잖아여.
......
아무튼, 아무리 걸어도 까마귀 씨의 1324번 캐비닛이 안 나오더라고여. 그래도 계속 걷고 있는데 갑자기 안내판의 글씨가 이상해지더니 주변 풍경도 막 일그러지고...
변하기 시작한 공간을 헤매던 성해가 발견한 건, 외딴 곳에 우두커니 서 있는 안내판이었다고 했다.
※ 모든 이용객 여러분께서는 본인 소유의 입장권을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입장하기 ↓
그렇게 성해는 다시 입장하는 것을 선택했고, 더이상의 탐사는 소득이 없다고 판단, 그대로 출구로 빠져나왔다고 말했다.
그런고로, 결론은 이거네여. 특정 캐비닛에 도달할 수 있는 건 그 주인 뿐이고, 타인이 주인의 승선카드와 입장권을 소지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 캐비닛의 잠금을 해제할 수 있는 건 역시 주인 뿐이라는 거죠.
네, 그런 것 같아요.
이만하면 충분히 둘러본 것 같으니, 다음 장소로 가여.
스파 & 피트니스 센터 옆에는 야외 공간으로 가는 문이 있었다. 문으로 성큼 다가간 성해는 문을 열어젖혔다. 짠기를 품은 서늘한 공기에 코가 시큰거렸다. 칠흑처럼 새까만 하늘 아래에는 조명이 켜진 수영장과 야외 자쿠지, 그 가운데 커다란 스크린이 걸려 있었다. 스크린에는 시계가 띄워져 있었는데, 오후 10시가 가까워져 있었다. 시간을 확인한 사헌은 난간 앞에 섰다. 온 사방이 까만 도화지를 붙인 것 같았다. 마치 이 배가 허공을 부유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만큼. 여객선의 불빛마저도 금방이라도 집어삼킬 것만 같은 어둠이었다. 사헌은 고개를 숙였다. 여객선의 하부에 부딪힌 파도가 하얗게 부서지고 있었다. 물거품을 보니 그제서야 까마득한 망망대해 위에 있다는 게 실감이 났다.
염소 님!
멀리서 윤조가 사헌을 불렀다. 퍼뜩 정신을 차린 사헌은 난간에서 손을 놓고 일행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야외 공간 또한 스파 피트니스 센터와 마찬가지로 별 소득이 없었다. 이전의 공간과 마찬가지로, 이용객이 없는 공간은 텅텅 비어 있었다. 게임룸에는 이용객이 두어명 있었지만 별다른 위험 요소나 특색을 찾지 못했다. 겉보기엔 전부 평범한 여객선의 시설과 비슷했다. 결국 별 소득을 얻지 못한 채 야외 공간 탐사는 마무리됐다. 야외 공간을 나와 다시 안으로 들어가는 길에 본 시계는 오후 9시 5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다시 돌아온 메인 홀에 자헌은 없었다. 대신 스쳐지나가는 인파가 왕왕 있었다. 탐사원들은 라운지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자헌의 탐사팀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자헌은 메인 홀의 시계가 10시 정각을 가리키자마자 칼같이 나타났다. 두 탐사팀의 대표는 각자 탐사한 내용을 보고했다. 객실을 제외한 실내 공간의 탐사를 맡은 자헌의 말에 따르면, 탐사는 현재 보수 중이라 문을 닫은 카지노를 제외하고 이루어졌으며, 대부분의 공간에는 탑승객이 없었고 바, 클럽 등의 특정 공간에만 탑승객들이 존재했다고 한다. 또한 탐사가 이루어진 모든 공간에는 위험 요소나 이레귤러 현상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설명을 잠자코 듣던 성해가 뒤이어 외부 공간을 탐사했던 내용을 보고했다. 락커룸의 이상현상을 두고 자헌은 이렇게 말했다.
비정상적 현상으로 분류되나, 위협적 의도는 감지되지 않습니다. 본 현상은 이용객의 규칙 준수를 유도하기 위한 개입으로 판단됩니다.
그런가여.
관측된 구조 및 특성을 기반으로 분석한 결과, 본 선박은 표준 여객선과 외형 및 기능 면에서 높은 유사성을 보입니다. 그러나 해당 구조는 통상적인 여객선의 외형을 모방한 것으로 판단되며, 본질적으로 동일한 체계인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
이에 따라, 추가 탐사 작업이 필요합니다.
첫술에 배부를 수 없는 법이었다. 메인 홀에 모인 탐사원들의 얼굴이 실망감에 젖었다. 그럼 이제 어떡하면 됩니까. 객실을 하나하나 전부 뒤져보면 되는 건가요. 너구리 가면이 툴툴댔다. 객실이요? 1800개가 넘는 걸 언제 다... 코알라 가면이 우울한 목소리로 중얼댔다.
객실이 위치한 6~10층은 금일 탐색 대상에서 제외입니다.
자헌은 그렇게 말하고는 고개를 돌려 시계를 바라보았다. 인간형 AI도 버퍼링이 있나? 잠시 뜸을 들이는 모양새에 사헌은 무심코 생각했다.
현재 시각은 오후 10시 30분으로, 갈라 나이트 파티가 열리는 자정까지는 90분이 남아 있습니다. 해당 시간을 자유 활동 시간으로 지정하겠습니다.
엇, 정말인가요?
예. 현재까지의 탐사 활동을 기준으로 분석한 결과, 본 어둠은 규칙을 준수하는 한 위협 수준이 낮은 것으로 평가됩니다. 따라서 제한 시간 동안 이곳 메인홀에서의 휴식과 개인 단위 탐사 활동 모두 허용하겠습니다. 단, 탐사팀과 분리되어 개별 행동을 할 시에는 안전 확보를 위해 반드시 탐사 장소는 객실 구역을 제외한 장소일 것, 2인 1조로 활동할 것을 권고합니다.
자헌의 말에 가장 먼저 반응한 건 너구리 가면이었다. 어휴, 다리 아파서 죽을 뻔 했네. 한숨을 내쉰 너구리 가면이 벤치에 늘어지듯 기대자 코알라 가면이 쭈뼛대며 그 옆에 앉았다. 그러자 성해도 기지개를 키며 하품을 했다. 어쩐지 다들 휴식을 취하려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하지만 사헌은 추호도 그럴 생각이 없었다. 우선 크레딧을 모아 아이템을 획득해야 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헌의 머릿속에 생각 하나가 스쳤다. 아, 2인 1조로 움직이라고 했는데. 사헌의 시선이 윤조를 향했다. 아무래도 윤조를 데려가는 게 편하겠지.
염소 씨. 개인 탐사 활동을 할 생각입니까?
네. 실내 구역이 궁금해서요.
그렇다면 2인 1조로 움직이는 것을 권고합니다.
그러면 전 물고기 씨와 함께...
...염소 님, 죄송해요.
윤조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은 조금 쉬고 싶어요. 그렇게 말한 윤조가 덧붙였다.
대신 노루 주임님이랑 가시는 건 어떠세요...? 어차피 저는 별로 도움이 안 될 거예요. 하지만 정예팀인 노루 주임님이라면 정말 큰 도움이 될...
네? 뭐, 뭐라고요?
타당한 제안입니다.
......
노루 씨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상관없습니다.
사헌은 입을 떡 벌렸다. 기껏 도와줬더니 뒷통수치는 발언을 한 윤조를 용서할 수 없었다. 기가 막혀 어버버대는 사헌의 옆에 솔음이 다가섰다. 뭐해, 가자. 자신을 향한 차분한 목소리에 소름이 우수수 돋았다. 사헌은 차마 솔음 쪽을 바라보지 못하고 연신 뒤를 돌아보며 솔음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점점 작아지는 윤조가 입모양으로 주절댔다. 꼭 화해하세요. 씨발!
벤치에 앉은 윤조는 멀어지는 사헌과 솔음의 뒷통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옆에 앉은 성해가 그런 윤조를 가만히 지켜보다 말했다.
걱정돼여?
걱정... 이요?
넹.
네, 물론 걱정되죠. 제가 남 걱정할 처지는 아니지만...
왜여?
윤조는 잠시 입술을 달싹였다.
...형 같아서요. 물론 많이 다르긴 하지만요.
......
염소 님은... 이곳에서 저를 걱정해준 유일한 사람이에요.
그렇군여.
......
사실, 따라가고 싶었죠?
윤조의 얼굴에 민망한 미소가 번졌다. 윤조는 조금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작은 목소리가 나직하게 성해의 귓가로 흘러들어왔다. 전 제 분수를 잘 알고 있어요. 더이상 민폐끼치고 싶지 않아요. 그 말에 성해는 고개를 돌려 멀어지는 두 사람의 모습을 빤히 응시했다. 흐음. 턱을 괸 채 침음을 흘리다, 성해가 불쑥 뱉었다.
그럼 같이 가드릴까여?
네?
탐사, 저랑 같이 하자구여.
그, 그래도 괜찮으시다면... 정말 감사합니다.
뭐, 별것도 아닌데요.
어쩔 줄 몰라하는 윤조를 보며, 성해는 정장 주머니에 있는 손수건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는 싱긋 웃었다.
전 제게 주어진 호의를 외롭게 만들지 않는 사람이거든여.
*
젠장.
사헌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상황이 눈앞에 닥치니 평정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옆에서 걷고 있는 솔음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존재감만으로도 사헌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아니, 이래서는 안 돼. 사헌은 파르르 떨리는 주먹을 꽉 쥐었다. 사사로운 감정 따위에 휩쓸릴 때가 아니었다. 겨우 얻은 자유 시간을 십분 활용해야 했다. 이렇게나 한심하게 솔음을 의식한 채 벌벌 떨며 동요할 게 아니라. 마음을 다잡고 있는 사헌에게 솔음이 물었다.
어디로 갈 건데.
말 걸지 마세요.
싸늘한 어조에 솔음은 순순히 입을 다물었다. 그나마 다행인 일이었다. 불편한 침묵, 거북한 정적. 짓눌릴 것 같았지만 사헌은 애써 무시한 채 엘레베이터로 향했다. 아래층으로 가는 버튼을 누르니 마침 5층에 이미 도착해있던 엘레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엘레베이터에 탑승한 사헌은 어느 층을 눌러야 할 지 고민했다. 게임 부스는 크루즈 곳곳에 있다고 했으니까, 3층부터 거슬러 올라가며 부스를 찾아보면 될 것 같았다. 사헌이 3층을 누르려는 순간, 솔음의 손이 불쑥 끼어들어 4층을 눌렀다. 움찔 몸을 떤 사헌이 황급히 고개를 돌려 솔음을 바라보았다.
4층 대극장 옆에 게임 부스가 있어. 탐사하다가 봤거든.
게임 부스에서 크레딧을 획득할 생각 뿐이었던 제 머릿속을 들여다본 것 같은 말이었다. 또다시 속내를 읽히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찐득하고 음습한 느낌이 발밑에서부터 척추를 타고 온몸으로 번졌다. 불쾌감을 닮은 감각이었다. 사헌은 바싹바싹 마르는 입으로 간신히 내뱉었다. 읽지 말라고 했잖아.
읽지 않았어.
거짓말.
거짓말이 아니라...
닥쳐! 닥치라고!
......
도대체 언제까지 나를 기만할 생각이야? 읽었잖아! 몇 시간 전에도 나랑 눈 마주쳤을 때, 고개 저었잖아! 나,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
왜, 왜 자꾸 읽는 거야? 내가 말했잖아. 끔찍하다고. 무섭다고. 싫다고!
말을 덧붙일수록 목이 메였다. 심장이 죄어드는 동시에 예의 그 두통이 심술궂은 손을 뻗어 뇌를 서서히 압박하기 시작했다. 사헌은 신경질적으로 두통이 이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날카로운 두통은 뒷목을 타고 청신경까지 번졌다. 심장이 귓속에서 마구 쿵쾅대며 고막을 발길질하는 것 같았다. 비행기가 이륙할 때처럼 고막이 찢어질 것만 같은 팽팽한 통증이 일었다.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씨발 역시 원인을 제거해야 했다 뇌실 안에 보란듯이 박힌 기관이 없으면 피 말리는 본딩도 사라질 텐데 왜 나는 이렇게 괴로워하고 있지 지금 그냥 깔끔하게 없애면 되는 건데 안 그래?
백사헌!
정신 차려. 사헌은 물에 잠겼다 겨우 수면에 도달한 것처럼 허겁지겁 숨을 들이마셨다. 허억. 온통 뿌옇게 이지러진 시야 틈으로 일그러진 솔음의 얼굴이 보였다. 식은땀에 젖은 뺨에 낯선 감촉이 느껴졌다. 솔음의 손이 두 뺨을 힘주어 감싸고 있었다. 꺼져... 힘겹게 뇌까리는 순간 이마에 욱신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사헌은 손을 들어 제 이마를 더듬었다. 축축한 액체가 손에 묻어났다. 피였다. 사헌의 시선이 엘레베이터 벽면으로 향했다. 거울처럼 매끄러운 벽면에 보란듯이 번진 피가 묻어 있었다. 또다시 발작을 일으켜 자해를 한 모양이었다. 솔음이 숨을 가쁘게 쌕쌕대는 사헌의 이마에 손바닥을 덮었다. 거부하면 안 된다고 몇 번을 말해. 막막한 목소리였다.
읽지 않았어. 정말이야.
......
단순한 추론이었어. 평소 백사헌 네가 아이템에 관심이 많다는 점을 고려하면, 크레딧 상점에도 관심을 가질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거든. 그리고 크레딧은 게임 부스를 통해 획득할 수 있으니까, 네가 가장 먼저 게임 부스를 찾아갈 거라고 예상한 거야. 고개를 저은 건, 맥락을 읽어냈을 뿐이고.
......
네 허락 없이는 더 이상 읽지 않을게. 불쾌하다는 거, 이제는 알고 있어.
그렇게 말한 솔음이 손을 떼어냈다. 사헌은 떨리는 숨을 뱉으며 솔음의 손이 닿았던 자리를 손등으로 문질렀다. 두통이 떠나간 자리엔 후들거리는 탈기만이 남았다. 사헌은 대꾸하지 않았다. 자꾸만 솔음의 앞에서 이렇게 속절없이 무너지기만 하는 자신이 한심했다. 사헌은 평정을 되찾기 위해 조용히 심호흡을 했다. 그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는 엘레베이터는 고요하기만 했다.
띵. 적막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어느새 4층에 도착한 엘레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사헌은 문이 열리자마자 밖으로 뛰쳐나갔다. 솔음은 사헌을 쫓지 않았다. 그저 사헌이 이동하는 방향을 따라 걸을 뿐이었다.
방황하는 사헌의 시선이 눈앞에 펼쳐진 4층의 전경을 훑었다. 메인 홀보다는 화려하지 않지만 여전히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였다. 엘레베이터 맞은 편에는 대극장으로 향하는 입구가 있었고, 그 오른편에는 정찬 레스토랑으로 향하는 입구가, 왼편에는 카지노와 영화관이 보였다. 부스는 어디 있지. 사헌이 두리번거리자 뒤에서 솔음이 말했다. 영화관 옆에 있어. 그 말에 사헌은 흠칫 몸을 떨다, 이내 주먹을 꽉 쥐며 마음을 다스리고는 영화관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솔음의 말대로 게임 부스는 영화관 바로 옆에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부스는 닫혀 있었다. 부스 문에 걸린 팻말에는 금일 운영 시간이 종료되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오후 10시를 넘은 시각이니, 충분히 문을 닫을 만했다. 사헌은 상시 운영이라는 선상신문의 내용을 떠올렸다. 부스 운영 시간 정도는 적어줘야 헛걸음을 안 할 거 아냐. 고객 서비스가 아주 엉망이었다. 이 여객선 형태의 어둠에도 고객의 소리함이 존재한다면 강력하게 항의하고 싶었다. 짜증이 난 얼굴로 팻말을 노려보는데 옆얼굴에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 솔음을 바라보자 솔음이 말했다. 시간이 늦어서 아마 다른 부스도 문을 닫았을 것 같은데.
영화라도 볼래?
제가 왜요?
냉기 어린 목소리에도 솔음은 차분했다.
크레딧 얻고 싶은 거 아냐? 영화 보면 크레딧 받을 수 있는데.
그걸 그쪽이 어떻게 아는데요?
티켓박스에 적혀 있어. 최초 관람객 대상으로 3000 크레딧 상품권을 지급한다고.
3000 크레딧. 스파 피트니스 센터의 할인된 특별권의 가격이 5500 크레딧임을 감안하면, 꽤 짭짤한 금액이었다. 그래서 사헌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영관이 하나 뿐인 영화관은 단촐했다. 티켓박스에도 직원은 없고 키오스크 뿐이었다. 상영작이라고는 읽을 수 없는 문자로 표기된 제목의 영화 하나 뿐이라, 무엇을 봐야 할지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키오스크를 터치한 솔음이 영화표를 2장 선택했다.
그쪽은 이미 본 거 아니에요? 왜 2장을 사요?
탐사할 땐 상영 시간이 아니었어. 나도 처음 보는 거야.
티켓은 장당 500 크레딧이었다. 사헌은 자신이 가진 크레딧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난 크레딧이 없는데. 사헌이 멈칫하거나 말거나, 솔음은 태연하게 승선 카드를 키오스크에 꽂았다. 결제가 완료되었다는 창이 뜨는 동시에 티켓 두 장이 인쇄됐다. 인출구에서 티켓을 꺼낸 솔음이 사헌에게 티켓 한 장을 내밀었다.
그냥 봐. 너한테 티켓값 청구할 생각 없으니까.
...크레딧은 어디서 얻었어요?
아까 너랑 갔던 게임 부스. 탐사할 땐 운영 중이었거든.
아. 납득할 만한 사유였다. 할 말이 없어진 사헌은 입을 다물고 티켓을 살폈다. 알 수 없는 언어가 인쇄된 티켓의 뒷면에는 간단한 안내 사항들이 있었다. 낙상 사고 발생 예방을 위해 상영 중에는 자리를 벗어나 이동하는 행위 금지, 상영 중 안전 상의 이유로 상영관의 문을 잠그고 있으니 미리 화장실 다녀오기, 화재 시 비상 대피로까지 확인한 사헌은 솔음을 따라 상영관으로 통하는 문 앞에 섰다.
문을 열자 고요한 상영관 내부에 끼익 소리가 울렸다. 내부에 발을 딛자 음산한 공기가 훅 끼쳤다. 뭐지? 순간 사헌은 멈칫했다. 그 사이 솔음은 상영관 안으로 거침없이 들어갔다. 자리를 찾는 솔음의 뒤를 쫓으며, 사헌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상영관은 영화관의 구색을 갖추고 있긴 했으나 세미나실에 가까운 규모였다. 어두운 천을 뒤집어 쓴 탑승객 대여섯 명이 얼마 안되는 좌석을 드문드문 채우고 있었다. 솔음은 단차가 있는 통로를 계속 거슬러 올라갔다. 발걸음이 멎은 곳은 가장 맨 뒷자리의 중앙 좌석이었다. 왜 하필 맨 뒷자리를 예매한 거냐는 사헌의 물음에, 솔음은 전체적인 상황을 파악하기에는 맨 뒷자리가 좋다고 답했다. 역시 틀린 말은 아니어서, 사헌은 반박하지 않고 좌석에 앉았다. 솔음이 자리에 앉는 사이, 사헌은 정면에 걸린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영화관이 아니라 대학 강의를 들으러 온 느낌마저 들었다. 다만 꺼림칙한 점이 있다면...
추워?
솔음이 불쑥 물어왔다. 저도 모르게 팔짱을 낀 채 몸을 웅크리고 있던 사헌이 흠칫했다. 신경 끄세요. 차갑게 쏘아붙이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사헌은 애꿎은 스크린만 노려봤다. 빨리 영화가 시작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던 찰나, 상영관의 불이 꺼지더니 스크린이 켜졌다.
스크린은 온통 새하얗기만 했다. 눈이 부실 정도로 강한 명도에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과연 이 희여멀겋기만 한 영상이 영화는 맞는지 의구심이 들 때쯤, 탁 하는 소리가 났다. 드르륵. 드르륵. 그 뒤를 이어서 무언가 돌아가는 소리가 나며 노이즈 낀 회색빛의 화면으로 전환됐다. LED 화면 위로 떨어뜨린 물방울의 표면처럼 알 수 없는 빛깔들이 주변시야에서부터 바글거리기 시작했다. 그 존재감을 알아챈 순간, 몸뚱이가 아래로 꺼지는 듯한 느낌이 드는 동시에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머리를 통째로 잡아 뽑는 감각을 닮은 현기증이 일면서 기묘한 부유감이 찾아왔다. 본능에 가까운 직감이 경고등을 울리고 충격에 젖은 입이 다급히 뻐끔거리기 시작했다.
S# 1. 상영관 내부 / 밤
사헌: (솔음을 보며) 이 영화, 뭔가 이상해요. 그만 보고 싶어요.
솔음: 그냥 나가자. 느낌이 좋지 않아.
사헌: 네. 그러는 게 좋겠어요.다시 화면 전환. 섬광처럼 번쩍이기 시작하는 스크린.
사헌: (바르작대며) 모, 몸이 안 움직여...!
솔음: (동요하며) 이, 이건...물소리, 짐승이 우는 소리, 바람 소리, 타는 소리, 비명 소리, 싸우는 소리, 죽어가는 소리, 태어나는 소리, 합창하는 소리, 불협화음의 소리, 신음 소리, 거친 쇠의 표면을 갉아내는 소리, 흘러가는 세월에 나이테가 깊어지는 소리, 비탄에 젖은 눈물의 소리, 경계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
화면 암전.
S# 2. 상영관 내부 / 밤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어두운 천을 뒤집어 쓴 인영들.
어두운 천은 곧 마야이고 마야는 이 존재들의 눈을 가리고 있다.
혼돈에 젖어 상영관의 출구로 달리기 시작하는 마야를 쓴 존재들. 출구의 문고리를 잡아당겨보지만 문은 열리지 않는다.한편 스크린에서는 무수히 많은 장면들이 흘러가고 있다. 장면 전환 속도가 너무 빠른 나머지 각각의 장면들은 마치 강렬한 느낌을 품은 사진처럼 보인다.
소용돌이처럼 요동치는 우주의 모든 현상과 땅위의 만물이 뒤섞인 형이상학적 이미지.사헌: (괴로워하며) 그, 그만. 그만해 제발! 우우욱!
S# 3. 상영관 내부 / ?
쿵쿵쿵. 상영관의 문을 거͐칠͕̅게̨ 두들기는 소?리.
계속해서 문͎̕으로 돌진하는 마야의 Ωëß들. 불나̌방͕̊처̣럼 문에 뛰어드는 몸뚱이를 덮은 천이 붉게 젖어들기 시͠작̄ͅ한̞다.
반복되는 행위 끝에 형태가 으스러져 바닥에̦͋ ̪풀썩 쓰러진 존재 하나. 그 위를 짓밟는 ̨̅§̐͟다̀ͅ른̰̀ ̗͌발͉. 바닥의 경사를 따라 흐̅르̝̂기͇ 시작하는 새빨간 피를 따라†ï‘ǵ 화면 ́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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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 암전
헉! 정전기가 통한 것처럼 몸이 퍼뜩 경련하는 동시에 눈이 번쩍 뜨였다. 흐윽. 헐떡이던 입술 새로 축축한 무언가가 흘러들어왔다. 따뜻하고 비릿한 맛. 사헌은 거칠게 인중을 문질렀다. 손가락에 붉은 피가 묻어났다.
내가 도대체 뭘 본 거지? 삼라만상의 수많은 이미지들이 뇌에 새겨지는 동안 사헌은 사헌이 아니었다 낙하하는 육신은 벗겨진 허물처럼 부유하는 영혼은 흘러가는 바람처럼 수천 갈래로 수만 알갱이로 흩어진 자아는 시간 본성 필요성 우연 물질 자연 호흡 그 모든 곳에 존재하고 있으나 존재하고 있지 않았다 이 육체는 껍데기였다 마치 이 배처럼 그래 이 배는 감옥이었다 영혼을 가두는 감옥이었다 눈을 가리는 베일이었다 무한한 번뇌였다 탈출해야 한다 탈출해야 돼 탈출을 탈출 탈출...
괜찮아?
커헉. 참았던 숨이 일순 터지며 뇌를 주무르는 것만 같던 끔찍한 장면들도 사라졌다. 사헌은 헐떡이며 고개를 돌렸다. 솔음이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안색은 평소보다 창백했다. 까맣게 가라앉은 눈동자에 엉망으로 흐트러진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이마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이 눈가에 고였다가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솔음이 인상을 찌푸렸다.
백사헌. 내가 누구야?
김, 김솔음...
여기가 어딘지 알겠어?
네, 네...
여기가 어딘데. 어, 어둠 속이요. 시간, 시간은... 사헌은 무의식적으로 자켓 주머니를 더듬었다. 수첩을 찾아 시계를 그려야 했다. 메인 홀에서 마지막으로 확인했던 시간은 오후 10시 30분이었으니, 3층 영화관까지 도달하고 상영관에 앉아 흘려보낸 시간을 감안하면 대략 11시를 넘었으려나. 시간을 가늠하며 주머니를 뒤지던 사헌이 멈칫했다. 내가 왜 시계를 그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지. 자각하는 순간 뒷목이 싸늘해졌다. 씨발 도대체 왜...
그리지 않아도 돼.
잠깐 실례할게. 작게 읊조린 솔음이 손을 뻗었다. 뒷목을 감싼 손이 몸을 확 끌어당겼다. 솔음의 얼굴이 부쩍 가까워졌다. 사헌은 무의식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이마에 부드러운 무언가가 잠깐 닿았다 떨어졌다. 낯설지 않은 감촉. 닿았던 부분에서부터 영문 모를 감각이 퍼졌다. 혼곤한 머릿속을 어루만지는 안온함을 닮은 온기. 흐릿했던 의식 틈마다 닿았던 접촉을 모를 수가 없었다. 모호한 형태의 감정이 울컥 치밀며 속이 뻐근해졌다. 정신을 차린 사헌은 솔음의 어깨를 거칠게 밀어내며 주먹을 날렸다.
허락없이 접촉하지 말라고 했잖아!
......
이딴 게 그쪽이 허락을 구하는 방식이야?
퍽. 고개가 돌아갈 정도의 충격이었음에도 솔음은 신음 하나 뱉지 않았다. 솔음이 말없이 얻어맞은 뺨을 어루만지자 사헌은 움찔 몸을 떨었다. 눈앞의 외계인이 마음만 먹으면 제 목숨줄을 쥐고 흔들 수 있다는 사실에 덜컥 겁이 났다. 그러나 솔음은 잠잠했다. 그저 다시금 고개를 돌려 사헌을 바라보다,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알겠어.
......
앞으로 유의할게.
...유의? 지랄 마.
......
그쪽은 말이면 다 되는 줄 알지. 사실 내 마음, 아니, 입장은 관심도 없잖아. 애초에 생각조차 해본 적 없었겠지. 그쪽이 조금이라도 나를 생각했다면 이딴 식으로 나올 수가 없으니까. 뻔뻔하게 또다시 날 입맛대로 주무르려는 걸 내가 모를 것 같아? 그런 식으로 나를 망가뜨렸잖아!
백사헌.
왜? 가지고 놀아야 하는데 장난감이 말을 안 들어서 짜증나? 멍청하게 주임님 주임님 하면서 빌빌 기어야 하는데 주제도 모르고 기어올라서 열받아?
말 조심해.
씨발 너나 말 조심해! 날 배려하는 척 역겨운 위선질은 집어치워. 수틀리면 뇌 망가뜨리는 싸패인 주제에.
......
왜 그딴 표정을 지어? 내 말에 상처받기라도 했어? 그쪽이 그런 걸 느낄 수 있긴 해? 내 말이 꼬우면 세뇌시켜 보든가! 니가 제일 잘하는 거잖아.
잠자코 쏟아지던 말을 감내하고만 있던 솔음이, 마지막 문장을 듣는 순간 싸늘하게 말했다.
선 넘지 마.
......
널 가지고 놀려던 것도, 뇌를 망가뜨리려는 것도 아니었어.
그럼 뭔데. 그쪽이랑 이 씨발놈의 본딩을 맺은 뒤부터 나타난 이 좆같은 현상들은 대체 뭔데. 뇌종양, 의식 소실, 인지기능 저하... 이래도 나를 망가뜨리려던 게 아니냐고!
아니라고 했잖아.
그럼 설명해 씨발새끼야! 자세하게 설명하라고 내가 납득할 수 있게!
정적이 흘렀다. 솔음은 잠시 입술을 달싹이다, 이내 참는 듯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왜 네가 같은 답을 가진 질문들을 반복하는지 모르겠어.
뭐?
난 분명 네게 수도 없이 말했어. 본딩에 대해, 일어날 수 있는 신체적 변화에 대해. 그리고 부작용 없이 변화를 수용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그런데 아무리 말해도 넌 내 말을 듣지 않고 믿지 않았잖아.
......
의미 없는 논증을 계속하고 싶은 거야? 아니면 그냥 나한테 화를 내고 싶은 거야?
논점 흐리지 마! 난 그쪽의 기만질을 이야기하고 있었어.
......
난 분명 싫다고 말했어. 당신과의 본딩도, ...접촉도. 근데 나를 세뇌해서 거부할 수 없게 만들었잖아!
의미 없는 논증을 계속하고 싶은 거구나.
닥쳐! 회피하지 말고 제대로 대답해. 거부하지 마라 받아들여라 따위의 개소리는 집어치워. 니 레퍼토리 이제 뻔하니까. 진실을 말하라고!
그러자 솔음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솔음은 복잡한 얼굴로 잠시 뜸을 들이다, 이윽고 말을 꺼냈다.
...거부할 수 없게 만든 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
지랄하지 마! 그딴 게 어떻게 어쩔 수 없는 선택 따위로 포장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거부하면 죽을 테니까.
뭐?
솔음의 말을 듣는 순간 사헌은 숨이 턱 막혔다.
본딩이 뭐라고 생각해? 단순히 서로의 정신을 연결해 심상을 읽게 만드는 작용? 그건 본딩의 피상적인 면일 뿐이야. 넌 본질을 파악조차 못하고 있어.
그, 그럼 뭔데 씨발!
본딩은... 각각 독립된 두 주체의 합일을 의미해. 서로의 심상을 읽을 수 있게 된다는 건, 곧 두 정신이 각각 존재하는 동시에 하나이기 때문에 가능한 거야. 본딩을 거부한다는 건, 곧 자기 자신의 일부분를 거부하는 것과 같아. 그리고 그런 사고는... 자가면역 질환과 비슷하게 작용하거든.
뭐, 뭐라고?
넌 본딩을 맺은 이래로 쭉 본딩을 거부해왔잖아. 본딩을 거부한다는 그 생각만으로도, 심신은 타격을 입어. 비록 일부분일지라도 자기 자신의 존재를 거부하는 건, 곧 존재하길 거부한단 뜻이나 다름없으니까.
......
그럼 너에게 존재 자체를 거부당한 나는, 어땠을 것 같아?
쏟아지는 무거운 말들의 파도. 심장이 철썩 내려앉았다.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충격에 사헌은 멍하니 솔음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거기까지 말한 솔음은 고개를 살짝 떨궜다. 그림자가 깃든 얼굴이 어두웠다. 잠시 동안의 침묵 뒤 이어진 설명은 이러했다. 사헌의 지속된 거부로 본딩이 매우 불안정해졌을 때, 사헌이 어둠에 오염되면서 그 영향이 본딩에도 끼쳤다고 했다. 사헌의 정신은 오염에 침식되는 동시에 본딩을 거부하여 타격을 받고 있었으므로, 본딩을 어떻게든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거부감을 낮추었지만 위태로웠던 정신이 어느 순간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는 건 순식간이었다고.
미봉책이었던 건 인정해. 하지만 그건 너, 아니, 우리 모두를 위한 선택이었어.
......
합일은 완전한 안정을 가져다 줘. 그리고 합일의 매개는 기본적으로 접촉이야. 그래서 네가 본딩을 거부할수록 네게 접촉해야만 했어. 그래야 조금이나마 고통스럽지 않을 수 있으니까. 그렇게라도 해야만... 네가 내세운 단절에 우리가 무너지지 않을 수 있으니까.
...왜...
왜 미리 말하지 않았냐고? 네가 알았다면 뭔가 달랐을까? 오히려 내면의 거부감만 더욱 촉발시키지 않았을까 하는데. 넌 죽는 걸 무엇보다 두려워하니까. 게다가 쉽사리 믿지도 않았을 테고. 그런 너한테 내가 여기서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었겠어.
......
백사헌 넌 나를 신뢰하지도, 좋아하지도 않는데.
거기까지 말한 솔음이 돌연 말을 멈추고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얼굴을 덮은 손바닥 사이로 작은 한숨이 샜다.
...이제는 알아. 나로부터 비롯된 네 모든 고통을. 문제는 거기서부터 시작됐던 거겠지.
.....
미안해. 믿지 않을 테지만 이 말만큼은 진심이야.
그렇게 말한 솔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가자. 상영관 문 닫기 전에. 그 말만 남기고 솔음은 먼저 통로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느새 불이 켜진 상영관은 솔음과 자신을 제외하고 텅 비어 있었다. 정면에 걸린 스크린은 언제 그랬냐는 듯 새까맣기만 했다. 그 가운데 솔음이 천천히 내딛는 발걸음 하나하나가 무겁게 상영관 내부를 울렸다. 사헌은 여전히 멍하니 좌석에 앉은 채 솔음의 뒷통수를 응시했다.
감당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도저히. 이게 도대체 무슨 기분이지. 이 감정을 무어라 형용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분노일까? 그래, 분노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을 숨긴 것도 모자라, 그것만이 유일한 선택이었다고 말하고, 끔찍한 진실을 이제서야 알려준 솔음에게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다. 동시에 이루 말할 수 없는 무력감이 들었다. 존립을 위협하는 솔음으로부터 자아를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는데. 하지만 '백사헌'은, 어느 순간부터 독립된 주체가 아닌, 본딩을 통해 통합된 존재의 일부였고, 그것도 모르고 나는 여태껏 그 사실을 있는 힘껏 부정하고 있었으니까...
아, 나는 나를 죽이고 있었던 거구나.
토할 것 같았다. 형편없이 떨리는 숨이 터져나와 사헌은 입을 틀어막아야 했다. 속이 메스꺼운 것 같은데 이상하게 가슴께가 쿡쿡 쑤셨다.
그럼 너에게 존재 자체를 거부당한 나는, 어땠을 것 같아?
몰라. 그딴 걸 내가 왜 알아야 하는데. 그딴 걸 내가 어떻게 알아. 말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아냐고! 그럼 나는. 원치 않은 본딩으로 시작된 그 모든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던 나는! 미안하면 다야? 사과하면 내가 받았던 고통들이 전부 사라지냐고. 이러면 내가 느낀 괴로움 슬픔 끔찍함은 뭐가 돼. 김솔음 너는 가해자잖아. 그래야 맞는 거잖아. 그래야 내가 덜 억울하잖아.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모든 상처와 기억들은 상흔으로 남아 아직도 마음을 이렇게 괴롭게만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솔음은 정말이지, 무엇 하나 쉽지 않았다. 심지어는 마음 편히 증오하는 것마저도. 길을 잃은 기분이었다. 너무나도 무력해진 나머지 다시금 걸을 기력조차 나지 않는, 아득한 느낌. 사헌은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더이상 아무것도 느끼고 싶지 않았다.
일단, 일단은 생각을 하지 말자. 생각을 할수록 고통스러워지는 건 자신이었다. 간신히 생각을 끊어낸 사헌은 기진맥진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솔음이 기다리고 서 있던 스크린 앞까지 천천히 걸어갔다. 사헌이 가까워지자 솔음은 말없이 출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출구로 향하는 통로는 빛이 들어오지 않아 어두웠다. 어두운 통로 끝자락에는 가느다란 실선의 빛이 새어들어오고 있었다. 출구로 향하는 두 사람의 발걸음 소리만이 텅 빈 공간을 울렸다. 출구가 가까워질수록 출구 앞에 쌓여있는 물체들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포대자루를 쌓은 더미 같기도, 엉망으로 널브러진 마네킹 같기도 했다. 모호한 형태를 눈대중으로 가늠하던 사헌은 이내 고개를 숙였다. 바닥만 보며 걷던 사헌의 구두에, 어느 순간 어두운 색의 웅덩이가 밟혔다. 어? 의아해진 사헌이 허리를 숙이려던 찰나, 옆에 있던 솔음이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든 사헌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껏 으스러진 몸뚱이들이 출구 앞에 쌓여 있었다. 곳곳에 깔린 어두운 색의 천은 검게 젖어 번들거렸고 약간 경사진 통로의 바닥을 따라 웅덩이진 피가 조금씩 경사를 따라 흐르고 있었다. 헉. 끔찍한 광경에 사헌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뒷걸음질하는 발에 무언가가 채여 사헌은 순간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비틀거리는 사헌의 어깨를 솔음이 단단히 붙잡았다. 눈이 마주치고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사헌은 어깨를 붙잡고 있던 솔음의 손을 떼어내며 고개를 숙였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물체가 눈에 들어왔다. 뜯겨나간 발이었다. 거칠게 뜯겨나간 흔적이 남은 발목 부분은 피가 맺힌 살점으로 번들거렸다. 피로 얼룩진 발목에는 작은 구슬로 엮은 발찌가 매어 있었는데, 그걸 발견한 순간 기억 하나가 뇌리를 스쳤다. 메인 홀로 진입한지 얼마 안 된 시점에서, 성해의 옆을 스쳐지나갔던 탑승객. 성해의 부채질로 얼핏 드러났던 하얀 발을 사헌은 기억하고 있었다. 사헌은 다시 고개를 들어 앞을 응시했다. 포대자루인지 마네킹인지 모호했던 물체들은 한데 짓눌려 으깨진 탑승객들이었던 것이다. 자각하는 순간 사헌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쳐다보지 마. 가자.
그렇게 내뱉은 솔음이 너저분한 시신들을 지나치며 문을 열었다. 선에 가까운 형태였던 빛이 면으로 번지며 어둠에 익숙해졌던 눈을 부시게 했다. 솔음은 쏟아지는 빛을 맞으며 바깥으로 발을 내딛었다. 타박이는 발걸음 소리가 문 너머로 조금씩 멀어졌다. 한 걸음 물러선 채, 사헌은 우두커니 어둠에 잠겨 그런 솔음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숙였다. 어느새 발치까지 흘러들어온 희미한 빛. 그러나 가지를 뻗어내지 못하고 긴 통로의 어둠에 스며든 채 희뿌연 먼지로 부서지고 있었다.
*
티켓박스에서 상품권을 수령한 뒤, 메인 홀로 돌아가던 중 스쳐지나간 카지노는 보수가 끝난 모양인지 불이 켜져 있었다. 솔음은 아직 탐사하지 않은 미지의 장소인만큼 자헌에게 보고한 뒤 다함께 탐사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사헌은 대꾸하지 않았다.
메인 홀로 다시 돌아왔을 때 시계는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라운지에서는 자헌과 까마귀, 코알라, 너구리 가면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너구리 가면은 자헌과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가까이 다가오는 솔음과 사헌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그에 다른 이들의 시선도 둘을 향했다. 흐트러진 몰골로 돌아온 둘을 본 탐사팀의 의아한 시선에, 솔음은 차분히 영화관에서 목도한 현상을 보고했다. 보고를 들은 까마귀 가면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네요.
무엇이 말입니까?
다른 탑승객들이 끔찍하게 죽은 점이요. 분명 <탑승객 이용 가이드>에서는 상해 행위를 금지하고, 그런 위험으로부터 탑승객을 보호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요. 이용 가이드의 내용이 거짓이었던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자헌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자헌을 향했다. 솔음이 자헌의 말을 기다리는 듯 바라보고 있자 자헌은 말을 이어나갔다.
<탑승객 이용 가이드>에서 명시된 상해 행위의 보호 범위는 여객선 측의 부주의로 인한 사고에 한정됩니다. 노루 씨가 보고한 현상에서, 탑승객이 사망한 것은 여객선 측에서 금지한 행위를 무리하게 강행하여 일어난 사고이기 때문에 상해 행위 보호 범위 외의 사안으로 판단됩니다.
그, 그런 건가요...
예. 단, 해당 영화가 탑승객의 금지 행위를 유발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므로, 향후 영화 관람은 비권장 활동으로 분류되며 관람을 자제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솔음과 사헌이 수령한 상품권을 본 코알라 가면은 자헌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 것 같았다. 오히려 별다른 상해 없이 크레딧을 얻었으니 이득 아니냐며, 사헌에게 다음 상영 시간은 언제인지 자헌 몰래 슬쩍 귓속말로 물어보기까지 했다. 그 질문에 사헌은 잘 모르겠으니 티켓박스를 확인해보라며 대답을 흘리고는 의자에 앉았다.
자헌은 개별 탐사를 나간 성해와 윤조가 돌아오면 카지노를 탐사하자고 말했다. 성해와 윤조라니. 상상치도 못한 조합이었다. 아니, 개연성은 충분했다. 성해는 정예팀이었고 윤조는 마무리팀이었으니, 성해가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윤조를 미끼로 써먹으려고 데려갔을지도 모르지. 젠장. 사헌은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머리를 쓸어넘겼다. 억지를 부려서라도 윤조와 행동하겠다고 우겼어야 했나. 그래, 그랬어야 했다. 만약 그랬다면,
그렇게라도 해야만... 네가 내세운 단절에 우리가 무너지지 않을 수 있으니까.
이렇게 뼈아픈 진실 따위에 흔들릴 일도 없었을 테니까. 이럴 바엔 차라리...
염소 님!
반가운 기색이 묻어나는 목소리가 끝없이 침잠하는 의식을 깨웠다. 사헌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윤조가 눈앞에 서 있었다. 상념에 빠진 사이 윤조와 성해가 돌아온 것이다. 흐트러진 사헌의 몰골을 발견한 윤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괜찮아요? 무슨 일이라도... 너무 많은 일이 있었던 나머지 도리어 할 말이 없었다. 사헌은 그저 고개를 저었다. 제멋대로 솔음한테 저를 떠밀어버린 윤조에게 화낼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윤조가 사헌에게 걱정 어린 말을 건네는 사이, 성해는 자헌에게 다가가 탐사 결과를 보고했다. 3층의 게임 부스가 문을 닫기 직전에 방문해 카드 게임을 하고 크레딧을 얻었다는 내용이었다. 진짜 재밌었어여. 물고기 씨가 카드 게임에 재능이 있더라고요. 덕분에 크레딧도 꽤 얻었져. 윤조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성해의 말을 엿듣고 있던 사헌은 그 대목에서 억울해졌다. 원치 않게 온갖 끔찍한 걸 목격한 자신과는 달리, 윤조와 성해가 참여한 게임 부스에는 별다른 위험 요소도 존재하지 않아서 둘은 어려움 없이 크레딧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화해... 하셨어요?
어두운 사헌의 얼굴을 살피던 윤조가 조심스레 물어왔다. 허. 윤조의 소심한 물음에 사헌은 헛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사헌은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물고기 씨. 마음은 알겠는데,
앞으로 선은 넘지 마세요. 공과 사는 구분해야죠.
아. 죄, 죄송합니다...
사과하며 고개를 꾸벅 숙이는 윤조의 머리통을 내려다보던 사헌은 시선을 옮겼다. 옆 테이블에는 자헌과 너구리 가면, 그리고 솔음과 성해가 앉아 있었는데, 그 중 너구리 가면이 진지하게 자헌에게 무어라 말하고 있었다.
아무튼 제 생각은 말이죠, 탐사원 모두가 나이트 파티에 참석하는 것보다는, 방금 전처럼 인원을 나눠서 객실 공간도 탐색해보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이런 파티는 대부분의 탑승객들이 참여하니까, 주인이 자리를 비운 객실이 많을 테니까요. 여차하면 습격해서 쓸만한 물건을 강탈하는 것도 좋을 테고요.
아닙니다.
네? 아니라고요?
예.
......
......
자헌의 깔끔한 단답에 너구리 가면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 대화를 잠자코 지켜보던 성해가 너구리를 지적했다. 그건 나쁜 짓이잖아여. 탑승객은 우리에게 공격적이지도 않은데, 주인 없는 방까지 뒤져서 강탈하자는 건 좀. 나쁘고 말고가 뭐가 중요합니까? 어차피 여긴 어둠이잖아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예, 이해가 안 가네요.
그래여? 그럼 너구리 씨의 눈높이에 맞춰서 설명해드릴게여.
네.
너구리 씨가 잠시 외출을 한 사이에 너구리 씨의 집에 도둑이 들었어여. 그럼 너구리 씨는 기분이 어떨 것 같아여?
물론 좋지 않겠죠. 불쾌할 거고요. 하지만 지금 상황과는 맞지 않는 비유인 것 같습니다.
아뇨, 정확해여. 집의 주인인 너구리 씨는 불쾌감을 느낄 거고, 당연히 경찰에 신고하겠져? 여기도 마찬가지예여. 탑승객 또한 인간의 형태를 갖춘 존재라는 점에서, 방을 뒤지는 행위에 불쾌감을 느낄 거라구요.
그게 무슨 문제라도 됩니까? 탑승객이 승무원에게 방에 도둑이 들었다고 신고하기라도 한다는 말씀이신가요?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그 행위가 결국에는 불쾌감을 유발할 수 있는 행위라는 점에 있습니다.
논지를 파악하지 못한 너구리를 보다 못한 솔음이 힌트를 줬다.
네, 맞아여! 역시 노루 씨에여. 탑승객 간 불쾌감을 유발할 수 있는 행위는 <탑승객 이용 가이드>에서 명시된 금지 사항 중 하나잖아여?
...아.
너구리 씨, 기억력이 안 좋은 건 괜찮아요. 그런데...
.....
필요 이상으로 나쁜 마음을 품지는 마세여.
그렇게 말한 성해가 싱긋 웃었다. 말간 얼굴이었지만 무언의 압박이 느껴졌다. 기백에 짓눌린 너구리는 딱딱하게 굳은 채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의 흐름이 끊기고 적막이 자리한 틈에, 자헌이 불쑥 말했다. 모든 인원이 모였으니 카지노 구역 탐사를 실시하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자헌을 따라 나머지 인원들도 몸을 일으켰다.
다시 돌아온 4층은 변함없었지만,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순간 서늘한 불안감이 슬그머니 몸을 키웠다. 사헌은 아비규환을 목도했던 영화관을 스쳐지나가며 상영관의 문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문틈 밖에서까지 흘러나오던 피는 깨끗하게 사라진 지 오래였다. 정상적인 장소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꺼림칙한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건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영화관을 지나 도착한 카지노의 입구는 카드를 찍어야 열리는 개폐 장치로 닫혀 있었다. 입구에 가까이 다가서자 입구에 붙은 안내문이 보였다.
카지노 출입 보안 장치 강화 완료 안내
최근 발생한 외부인 출입으로 인한 위험 상황 발생과 관련하여 이용객들을 보다 안전하게 보호하고, 시설의 보안을 강화하기 위하여 금일 카지노 출입 보안 장치를 위조 승선 카드를 판별할 수 있는 기능을 가진 최신 장치로 교체하였습니다. 보수하는 동안 카지노 이용에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Avidyā Casino
안내문을 읽은 사헌은 고개를 내밀어 안을 들여다봤다. 투명한 유리문 너머,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건축 양식의 공간 안에 형형색색의 빼곡한 슬롯머신과 포커 테이블들이 늘어서 있었다. 장난 아니네요. 누군가 작게 감탄하는 사이, 자헌은 출입구 앞에 섰다.
입장하겠습니다.
자헌이 개폐장치에 승선 카드를 태그했다. 삐. 개폐 장치에 빨간 불이 들어오며 알람이 울렸다. 화면에 인식할 수 없는 종류의 카드라는 내용의 알림이 떴다. 오류인가? 뜻밖의 상황에 다들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성해가 나섰다. 제가 한번 해볼게여. 성해가 개폐장치에 카드를 태그하자 삐 하는 경고음이 다시 울릴 뿐이었다. 성해의 카드마저 인식이 되지 않자 각자의 카드로 출입을 시도했지만, 굳게 닫힌 카지노의 문은 열릴 생각을 하지 않고 삑삑거리는 경고음만 커져 갔다. 어, 어떡하죠? 당황한 윤조가 자헌에게 물었다. 가만히 개폐 장치를 응시하던 자헌은 망설임 없이 손을 들었다. 그리고 개폐 장치를 가차없이 내리쳤다.
쾅!
엄청난 소리와 함께 거대한 개폐 장치가 흔들렸다. 사헌은 경악에 젖어 입을 떡 벌렸다. 부, 부수면 안 돼요! 코알라 가면이 소리쳤다. 식겁한 목소리였다.
파손을 방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전 한계 내에서 힘을 조절하였습니다.
자헌은 태연한 얼굴로 대꾸했다. 개폐 장치의 화면이 고장난 것처럼 마구 지직거리다, 어느 순간 잠잠해지며 초기 화면으로 돌아왔다. 뭐, 뭐지. 진짜 고친 건가? 기계는 역시 물리치료가 답인 거냐고. 사헌이 황당해하는 사이, 자헌은 주머니에서 승선 카드를 꺼냈다. 그리고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동작으로 카드를 다시 태그하는 순간,
삐이이이이이이익. 날카로운 소리가 귀를 찢었다. 견딜 수 없는 소음에 사헌은 귀를 틀어막았다. 개폐 장치의 화면에는 어느새 선명한 문장이 떠 있었다.
위조 카드 사용 확인됨
위, 위조 카드?! 하지만 과장님이 정당한 절차를 통해 입수한 거라고 했는데...!
스파도 이걸로 잘 들어가기만 했는데 무슨 위조 카드야! 기계가 고장난 거 아니에요?!
혼란에 젖은 목소리가 웅성댔다. 사헌은 주머니에서 카드를 꺼내 손바닥에 꾹 쥐었다. 싸한 직감이 등골을 타고 올랐다. 직감이, 사헌을 지금껏 살아남게 했던 본능이, 이 상황이 단순한 기계 고장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래, 카지노 출입 보안 장치를 위조 카드를 판별할 수 있는 기능을 가진 최신 장치로 교체했다고 했지. 그렇다면 지금 상황으로 유추할 수 있는 건...
과장님! 어둠으로 진입했을 때 사용했던 탑승권, 어떤 절차로 입수하셨습니까?
사헌의 다급한 외침에 우왕좌왕하던 모두가 일제히 사헌을 바라보았다. 자헌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사내 규정에 명시된 절차대로 입수하였습니다.
그 절차, 설명해주세요. 본래 누구의 소유였는지, 어떻게 과장님 손까지 오게 되었는지까지도요.
해당 어둠은 연구 1팀의 관리 대상이며, 관련 부산물에 대한 소유권 또한 연구 1팀에 귀속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탑승권의 실질적 소유자는 연구 1팀 과장 곽제강이며, 저는 어둠 진입 권한을 확보하기 위해 사내 규정에 명시된 절차에 따라 물품 선출 요구서를 작성하였습니다. 해당 요구서는 곽제강 과장에 의해 승인되어 탑승권이 발급되었습니다.
아니, 설명이 충분하지 않다. 사헌이 다시 입을 열려는 찰나, 솔음이 한발 먼저 질문했다.
그렇다면 곽제강 과장이 그 탑승권을 어떻게 입수했는지 알고 계십니까?
모릅니다.
아. 그제서야 퍼즐이 맞춰졌다. 질문부터 잘못됐던 거다. 이자헌 과장의 입장에서는 정당한 절차를 통해 입수한 게 맞았겠지. 곽제강 과장이 갖고 있던 연구 1팀의 물건을 받기 위해 사내 규정대로 요구서를 작성했으니까. 하지만, 애초부터 그 탑승권은 제대로 된 탑승권이 아니었던 거다. 탑승권의 모습을 교묘하게 흉내낸 위조 탑승권이었던 거지. 씨발. 사헌은 튀어나오려는 욕설을 간신히 삼켰다. 곽제강 이 새끼, 소문대로 매드 사이언티스트였잖아!
아하. 그럼 곽제강 과장님이 우리한테 짭표를 준 거네여?
네, 네?! 그, 그럼 저흰...
성해의 말에 윤조의 안색이 시퍼래졌다. 곽, 곽제강 이 개새끼야아아아. 절규를 닮은 누군가의 외침을 한 귀로 흘리며, 사헌은 골몰했다. 어떡하지.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지. 생각해. 이 어둠과 관련된 모든 정보를.
'그들의 지리멸렬한 증언을 취합하여 분석하였을 때 나타난 공통적인 핵심어는 <밀항자> 였습니다.'
어둠에 진입하기 전, 자헌이 했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밀항자? 그게 무슨 의미일까. 혼란에 빠진 머리를 터질 듯 생각을 토해냈다. 아, 설마... 사헌이 탄식하는 사이에도 시끄러운 경보음은 크기를 달리해 이젠 4층 전체를 쩌렁쩌렁 울리다, 어느 순간 뚝 멎었다. 이윽고 달칵, 하는 마이크 소음과 함께 안내방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승객 여러분께 안내 말씀 드리겠습니다. 현재, 본 여객선 내에 신원 미상의 밀항자 8인이 무단으로 침입한 정황이 확인되었습니다. 승객 여러분의 안전을 위해 지금부터 여객선은 비상 운영 체제로 전환됩니다. 비상 운영 체제 시 모든 승객 여러분께서는 배정된 객실을 제외한 다른 공간으로의 이동이 제한됩니다. 상황이 해결되었다는 안내 방송 전까지 직원의 통솔에 따라 침착하게 행동해주시기 바랍니다. 안전이 확인될 때까지 자리를 이탈하지 마시고, 방송에 계속 주의를 기울여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안내방송이 꺼지고 싸늘한 침묵이 흘렀다. 연약한 숨소리마저 거칠게 들리는 고요 위로 한 가지 뒤늦은 깨달음이 떠올랐다.
밀항자는 우리였구나.
혼란에 빠져 교차하는 곤혹스러운 시선들. 어느 순간 탁, 하고 스위치 닫히는 소리가 났다. 방황하며 얽히는 눈짓 저 너머에서부터 조명이 꺼지며 어둠이 빠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눈을 깜빡일 새도 없이 온 사위를 감싼 어둠은 이내 눈꺼풀마저 덮으며 모든 감각을 차단했다. 연극의 단막이 끝난 것만 같은 암전. 그 아래 남은 것은,
그 누구도 바라지 않았던 진실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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