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그렇게 하면, 짠! 인류의 창조력과 가능성의 폭이 넓어지는 거야! 멋지지 않아?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미카엘?"
양 팔을 벌린 루시엘이 함지막하게 웃어보였다.
그러나 오색찬란한 진줏빛 구름 위에 단 하나 자리한 관객, 미카엘의 표정은 잔뜩 굳어 있었다.
당장이라도 입에서 할 말이 전부 튀어나와 버릴 듯한 미카엘이 묵묵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시엘은 무언갈 기대하는 눈으로 다가오는 그를 보았다. 미카엘은 차마 한숨도 되지 못한 날숨을 내쉬며 한 손으로 루시엘의 어깨를 감싸쥐었다.
"루시엘, 들어. 네가 방금 한 이야기는 고해야." 미카엘이 성마른 한숨을 내지었다. "그래, 차라리 이게 낫겠군. 넌 나에게 네 불길한 생각들을 고해한 거야.“
루시엘이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어, 어째서야? 내가 무슨 말을 했다고 그래? 인간의 영혼이 자율성을 가지게 되는 거야! 지금의 한계를 뛰어넘어 우리의 찬양을 본받고, 아버지를 사랑하고, 우리를 사랑하고, 비로소 자기 자신의 영혼마저 사랑하게 될 수 있어!“
”들어봐. 우리에게마저 모범이 된다는 건 간단하지 않아. 당장 너를 한번 봐. 네가 역임한 소명마저 언제나 순조롭게 풀리는 건 아니잖아. 그러니 하물며 우리를 바라보며 따라오는 인간들은 얼마나 혼란스러운 일들을 많이 겪겠어? 만일 그들이 통제력을 잃기라도 하는 날엔? 누가 그들의 길을 알려 주지?“
설마하니 이 정도의 타당성을 겸비한 대답이 돌아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루시엘이 당혹스레 옷자락을 쥐어짰다. 자신의 쌍둥이가 무모한 짓을 몹시 꺼려하는 성정이라는 건 익히 알았다. 그렇지만서도 미카엘이라면 분명 이해해 줄 거라고 믿었다.
루시엘이 계명성으로서 밤이 지났음을 알리는 새벽의 선봉이었다면, 미카엘은 해와 달을 가리지 않고 매 시간 우직하게 남아 이 땅의 안정을 보좌했다. 누구에게나 존경받을 만한 천사인 형제가 언제나 그를 지지하고 복돋워 준다는 것은 충만감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그것도 천국의 규율 내에 한해서였다.
”아버지께서 선행하지 않으신 일에는 다 이유가 있어. 만약 우리가 신의 뜻을 거스른 대가로 인류가 걷잡을 수 없는 혼돈에 빠진다면······“
미카엘은 착잡한 눈빛으로 말을 아꼈다. 하지만 루시엘은 미카엘이 진정 하고자 했던 말을 그의 눈을 통해 이미 들은 것만 같았다.
그분께서 진노하실지도 모르지.
루시엘은 제 어깨를 쥔 손으로부터 전해져오는 미약한 악력을 감각했다. 그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이해할 수는 있었으나 공감할 수는 없었다.
”가장 두려운 건 형제인 네가 홀로 휘말리는 거야.”
“하지만,”
미카엘은 한 손을 들어 루시엘의 말을 막아세웠다. 어깨를 덮던 무게가 사라지자 바람이 닿는 빈자리가 그토록이나 허전할 수가 없었다. 미카엘은 형제의 기분을 풀어주려 짐짓 목소리를 누그러트렸다.
"자, 이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자. 이렇게 허무맹랑한 대화에 몰두하지 않더라도 할 일이 많아. 너는 언제나처럼 우리를 웃게 해 주지 않을래? 그거면 된 거야. 지금은 널 둘러싼 것들이 충분치 않게 느껴지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점차 쌓여 충만해질 거야. 그게 지구의 순리야.
루시엘은 제 등을 떠미는 미카엘의 부드런 손길에 몸이 앞으로 밀려나는 것을 느꼈다. 그가 발끝을 세워 몸을 지탱했다. 이번만큼은 그에게 이끌리고 싶지 않았다. 그런 기분이었다. 미카엘이 말없이 뒤돌아보았다. 이유 모를 초조함이 루시엘의 가슴을 뒤덮었다. 루시엘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고집을 부리고 있다는 기분이 자꾸만 들었다.
지구의 순리? 장로들은 루시엘더러 그가 지구를 기웃거리는 건 방해라고 말했다. 제대로 보여주지도 않았으면서, 그런 걸 갑자기 온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온통 납득되지 않는 것들 투성이였다······.
어깨가 축 쳐진 루시엘이 입을 우물거리며 발끝을 오므렸다. 풀죽은 형제를 눈에 담는 미카엘의 시선도 그때쯤 연민으로 눅눅히 물들어 있었다. 어찌됐든 루시엘은 그의 반쪽이었고, 미카엘이 여기기에 궁창의 어엿한 계명성으로서 존재할 자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너무 작아서, 그래, 아버지께서 하사하신 열정이 그의 작은 육신을 능가해서, 그는 때때로 스스로의 활력에 잡아먹힐 뿐이다. 누군가 옆에서 길을 잡아 준다면 언제고 그들의 품으로 되돌아올 이였다.
미카엘이 루시엘을 격려하듯 그의 등을 쓸어내렸을 때, 입을 연 그의 음성도 훨씬 누그러져 있었다.
“차라리······ 참을성을 가지고 인류를 지켜봐. 아버지의 피조물들을 부러 구원하려 들지 마. 그들 생명의 의의는 그 자체로 종결된 거야.”
루시엘이 고개를 번쩍 치들었다.
"구원? 그렇게까지 앞서나갈 생각은 아니야!"
바로 그 순간, 푸른 눈이. 그 새파란 눈이. 하늘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빙벽이었을 때의 기분. 눈이 마주쳤을 뿐인데 온몸을 부닥친 듯했다.
미카엘이 순간 아주 단호하게 못박았다.
"네가 앞서나가는 게 아냐, 루시엘. 주제넘는 거지.“
"오······ 난···" 루시엘이 천천히 뒷걸음질쳤다. "날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미카엘은 루시엘에게 무어라 더 말하려는 듯 입을 달싹이다 이내 다물었다. 그보다 체격이 두어 배는 큰 그의 쌍둥이 형제가 루시엘을 지나쳐 갈 때, 루시엘은 꼭 누군가 땅에서 덜 뽑아준 두더지가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실제로 기분이 그랬지만 다른 천사들 앞에서 이런 말을 하면 또 엉뚱한 헛소리를 한다고 매도당할 터였다.
완전히 주눅든 루시엘을 뒤로하는 미카엘의 기분도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천사들에게도 새벽의 첫 별이라고 여겨지는 샛별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별이었고, 아침이 오는 최종의 순간까지 밤에 속하고자 하는 영혼이기도 했다. 그는 대체 언제쯤 되어야 꿈에서 깨어나려는지······
그때였다. 불현듯 루시엘이 미카엘의 등에 대고 말했다.
"해보지 않고서 어떻게 알 수 있겠어?"
불길한 예감이 엄습한 미카엘이 뒤돌아본 그때, 루시엘은 이미 육익을 펼쳐 공중으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루시엘은 도망치듯 자리를 피하며 말로는 이길 수 없을 형제에게 몇 마디를 더 던졌다.
"뭘 두려워하는 거야, 미카엘? 무엇을?“
"루시엘, 너 또 뭘 하려고? 어디 가는 거야? 돌아와!“
"두려워하지 마, 미카엘! 정말 두려운 건 가능성을 무시하고 겁쟁이가 되는 거야!"
루시엘! 그는 멀어지는 미카엘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척 날갯짓에 힘을 실었다. 사실 뭘 한다던가 할 생각은 아니었다. 쪼잔하지만 조금 되돌려주고픈 생각이었을 뿐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궁창은 실로 경이로웠다. 공기 속에는 미세한 금빛 가루처럼 신성한 기운이 감돌아, 숨을 들이쉴 때마다 몸과 마음이 맑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새벽마다 피어나는 물안개는 안개꽃처럼 정원을 감쌌다가 태양이 떠오르면 투명히 빛나며 사라지곤 했다.
루시엘은 에덴동산의 중앙을 가로질러 날다가, 문득 작은 기척을 느끼고 땅아래로 하강했다.
"오, 이런. 이게 누구야?“
처음에 커다란 금색 새인 줄로만 알았던 기척은 나무 앞에 웅크린 인간이었다. 그리고 여자였다.
그녀의 황금빛 머리카락은 생명 나무의 빛을 담은 듯 찬란하게 빛났으며, 물결치듯 유려하게 흘러내려 마치 얇게 직조된 비단처럼 발목까지 닿았다. 그녀의 다른 어느 부분보다 인간적으로 느껴지는 그 길고 풍성한 금발은 태양을 폭포에 대고 녹인 것 같았다.
루시엘이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시선을 맞췄다.
루시엘이 은종처럼 소리내 말했다.
"너로구나."
여자가 말없이 고개를 들어 루시엘과 눈을 마주쳤다. 인간 여자의 두 눈은 깊은 밤하늘을 응축한 듯 신비로운 보라색이었다. 그 색채는 강렬하면서도 맑았고, 보는 이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한 날카로운 윤곽을 가지고 있었다. 언뜻 차가운 인상을 줄 수도 있었으나, 그 깊은 색감속에는 흔들림 없는 의지와 자기 확신이 가득 차 있어 루시엘에게는 오히려 매혹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고운 제비꽃 같은 그 색은 어딘지 모르게 실망스러워 보였다. 무엇에? 루시엘은 자기도 모르게 속으로 물었다. 너는 무엇에 대한 '나아짐'을 바라는 거니······?
"네가 누군지 알아. 릴리스잖아. 아버지께서 맺어주신 아담의 짝."
왜 울고 있니? 릴리스는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 세계의 불합리에 대한 형용할 수 없는 고됨을 느끼고 있기는하였으나, 그렇다고 눈물을 흘린 건 아니었으므로.
"이젠 아냐. 아담의 짝 말야.“
"왜?“
"내가 그렇게 정했으니까.“
"어라, 왜?“
릴리스는 쓸쓸히 무릎에 얼굴을 기댔다.
"그렇게 결정할 수밖에 없었어. 당신은 정말 세상 물정 모르는구나. 하긴, 천사들이 모든 걸 다 알았다면 지금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지도 않았겠지."
루시엘은 내심 당황했다. 천지창조가 있고 나서 나름대로 오래 살아왔지만 이런 말은 또 처음이었다. 하긴 그와 나이를 견줄 수 있는 건 동시에 점지된 미카엘이 유일했다. 그럼에도 반사적으로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은 오랜 변명의 경력으로 축적된 습관과도 같았다.
"뭐, 뭣? 하지만 똑똑한 천사가 많아, 미카엘이라던가- 다 알진 못하는 건 너도 마찬가지거든!“
"아하, 그래? 내가 뭘 모른다고 생각하는데?"
루시엘은 잠시 말문이 막힌 듯 커다란 눈을 요리조리 굴리다가, 좋은 생각이 번뜩이며 떠올라 답했다.
"나··· 에 대해선 모르겠지!"
릴리스는 잠시 생각하더니, 그렇다고 인정했다.
그 순간 루시엘은 어떤 문이 열리는 듯한 감각을 가슴으로 만끽했다. 그것은 필히 이토록 아름다운 피조물에게 자신을 소개할 기회를 얻어서라고 그는 생각했다. 둘 다 진실로만 이루어진 방금의 대화에 어떠한 앙금도 없었다.
울창히 자란 나무들은 공터에 우직한 그늘을 드리웠고, 그랬기에 다른 사람과 -그녀를 제외하면 하나뿐이지만-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던 릴리스가 이곳에 숨어들듯이 했다. 그러나 이 천사가 서 있는 곳은 새벽 동이 트는 순간처럼 주변의 그림자를 완전히 압도했다. 휘광을 내뿜는 금빛의 천사가 릴리스에게 손을 내밀었고, 릴리스는 하늘에서 내려온 이 천사가 마치 자신을 위해 안배된 듯한 기분을 느끼며 손을 마주 잡았다.
천사가 아주 적은 힘으로 그녀를 일으키며 말했다.
"난 루시엘이야."
자신의 의견 표명에 대한 형제와의 작은 견해 차이에서 시작한 하루가 완전히 색다른 시작이 될 수 있을 거라고, 그 어떤 천사가 상상이나 했을까?
머지않아 루시엘은 릴리스가 저에 대해 모르는 것보다, 자신이 그녀에 대해 모르는 게 훨씬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사랑에 빠진 이들에 대해서는 많은 설명이 필요치 않다. 그들이 이 기이한 감정에 대해 세상에 요구하는 설명의 양보다.
릴리스는 한마디로 고아하고 아름다운 여자였다. 아니··· 아휴, 이것도 한 마디가 아니네. 루시엘은 릴리스를 한마디로 묘사하는 데 매번 실패하곤 했다.
그녀의 자세는 언제나 곧고 유연했으며, 에덴의 어떤 맹수보다도 자유롭고 당당한 기운을 풍겼다. 피부는 건강한 햇살을 머금은 듯 윤기가 돌았고, 곡선미가 돋보이는 탄탄한 어깨와 늘씬한 팔다리는 나약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릴리스의 외관은 아름다움과 강인함이 완벽하게 융합된 형태였다. 그녀는 존재 자체로 에덴의 강단 있는 생명력을 대변하는 듯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루시엘은 걷는 행위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갖게 되었다. '산책'은 환상적이었다. 릴리스와 함께 대화를 나누다 보면 볼이 뜨겁고 정신이 갈팡질팡했다. 맨발로 밟는 흙은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았으며, 걸을 때마다 부드러운 이끼와 꽃잎의 잔향이 발가락 사이를 간질였다.
그들이 에덴의 거의 모든 곳을 걸어다녔을 즈음, 루시엘에게 더는 릴리스를 피식대게 할 좋은 농담이 생각나질 않았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릴리스를 웃게 하고픈 갈망이 도사렸고, 결국 그는 여러 번 인간을 위해 무언가의 법칙이나, 개념이나, 신종 동식물 등을 고안해보려고 했으나 그의 의견과 정확히 같은 수의 꾸중을 들은 후에 포기했다고 털어놓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말에 릴리스는 난데없이 크게 웃었고, 은은한 메아리가 텅 빈 숲을 지나 되돌아왔다.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마. 많은 건 필요하지 않아. 우리 전부가 우리 전부일 뿐이야, 루시엘."
릴리스는 더 이상 누군가의 릴리스가 아니었다. 찬찬히 그 말뜻을 곱씹던 루시엘의 얼굴에 이내 미소가 번졌다. 그들은 상대의 가장 깊은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자 서로를 이해하는 동반자였다. 서로가 서로의 반쪽으로 만들어지지 않았기에 더욱 애틋했다.
그 후로 구주께서 아담에게 새로운 짝을 내려주실 때까지의 시간이 흘렀다.
저 멀리 릴리스의 뒷모습이 보이자 루시엘은 반갑게 날아갔다. 그러나 그녀를 부르는 소리에도 릴리스는 요지부동이었다. 더 가까이 다가간 루시엘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릴리스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눈으로 따랐다.
"릴리스? 뭘 보는 거야?"
그곳엔 아담의 두 번째 아내가 있었다. 릴리스는 이브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브는 나무에 기대어 있었다. 아버지께서 열매를 손대지 말라 명하신 나무였다. 그래서 아무도 손대지 않았으므로 그것은 그저 나무였다. 불현듯 루시엘은 이브의 모습에서 릴리스를 처음 만났을 때를 겹쳐 보았다. "아." 그리고 릴리스 또한 같은 것을 떠올렸으리라 깨달았다.
그때까지도 이브를 응시하던 릴리스가 느리게 입을 뗐다.
"가여운 여자야.“
많은 것들이 나무 아래서 시작되곤 한다. 싹을 틔우는 것부터, 열매가 떨어지는 것까지. 먼 훗날 아담의 후손이 작고 빨간 열매를 머리에 맞고 그것에서부터 아주 커다란 우주의 개념법칙을 깨우쳤듯이.
그저 나무인 그 나무에서는 지식의 열매가 자랐다.
그로부터 얼마 후, 어쩐지 아주 오랜만에 찾는 듯한 천국에서, 루시엘은 절 뒤쫒는 미카엘의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휙 돌아섰다. 길고 곧게 뻗은 눈썹 아래 예리하게 패인 눈매는 달라진 게 없는 언제나의 미카엘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의 눈빛이 꼭 루시엘을 궤뚫어보는 듯했다.
뒷짐을 진 미카엘이 그에게 넌지시 말을 걸었다.
"동산에서 보내는 시간이 부쩍 늘었던데.“
"어․․․ 아무 일도 없었어! 사고치는 거 아냐! 절대로!“
"너를 추궁하려는 게 아니야.“
그때의 미카엘은 지금 내가 느끼는 이 심경 자체가 처치 곤란이라거나, 착잡하다거나, 너를 완전 참아주는 듯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어쩐지 진실되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습관적으로 변명거리를 한가득 내어놓으려던 루시엘이 움칫하더니, 천천히 시선을 위로 올려 미카엘을 마주했다.
예의 그 엄숙한 미카엘의 얼굴은 놀랍게도 조금 풀려 있었다.
"나는, 그냥······ 네가 두려워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루시엘. 그게 무엇이든. 나도 그런 걸 원하진 않으니.“
일순 루시엘에게 누군가 훈풍을 불어넣은 듯했다. 그는 네게서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형제를 보았다. 그 모습이 지나치게 천진했다. 미카엘은 그 시선에 한풀 꺾인 듯이 미미하게 미소지었다.
"내가 했던 말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들까지 두려워하지는 마.“
미카엘은 무슨 생각을 하는 듯 호흡을 조금 늦추더니, 이어 그 푸른 눈으로 루시엘을 똑바로 바라보며 덧붙였다.
"내가 함께하잖아."
결국 그의 쌍둥이는 먼젓번의 대화에서 해주지 못한 말에 대한 작은 부채감을 지고 있었던 것이다.
루시엘이 소리 내어 웃었다. 웃음소리가 지나치게 과장된 것 같았지만 미카엘은 알아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루시엘은 이런 사소한 일이나마 미카엘을 속이는 게 너무 죄스러워, 순간적으로 그의 충고를 받아들여 조만간에 제가 릴리스와 하려고 하는 일이 뭔지 알려줄까 하는 충동이 일었다. 물론 시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루시엘의 머리는 생각할 시간이 너무 많아 자제력을 잃고 있었다. 차라리 모든 일이 작은 잎사귀가 트이듯이 순식간에 벌어진다면 훨씬 받아들이기 쉬웠을 터였다. 루시엘은 너무 강렬해서 마치 통증처럼 느껴지는 기대감과, 그의 굳은 결심에서 비롯된 불길한 떨림 사이에서 마구 흔들렸다.
멋진 일이 될 거라고 루시엘은 거듭 되풀이해 혼잣말을 했다. 그가 그 믿음에 매달린다면 결국 그 바람이 다른 모든 염려를 잠재워버릴 것이다. 게다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지 않나. 릴리스를 머리와 마음에서 도려내는 것?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에덴에 거진 머물게 된 뒤로 루시엘의 나날은 완전히 릴리스에 대한 삶으로 변해 있었다.
하지만 루시엘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울리는 작은 목소리는······ 금빛 천사가 잘 넘어가지 않는 침을 삼켰다.
아무리 생각해도 대리자님의 것처럼 들리진 않는 그 목소리는, 일이 잘못되기라도 하는 날엔 마음을 아주 크게 다칠 거라고 불안해했다. 그럴 만도 했다. 미운 새인 루시엘은 이미 너무나 많은 실패와, 거절과, 반론과, 타박 그리고 질책을 겪었다. 그는 미카엘만큼 위엄 있고 건장하게, 그러니까, '천사답게' 자라지도 못했고, 세라처럼 처음부터 우아한 백조로 태어나지 못했으니 갑자기 엄청난 일을 성공시킬 리 만무했다.
둥지에서 알이라도 바뀐 거면 좋았겠지만 아버지는 절대 그런 실수를 하지 않는 분이시니······ 그때 릴리스가 다가와 루시엘의 어깨에 손을 얹었고, 복잡하게 어그러들기 직전이던 상념이 깨어졌다.
"루시엘. 뭘 걱정하는 거야?“
"으아! 음, 어어, 뭐랄까, 그냥 이것저것.“
릴리스는 갑자기 침잠된 루시엘의 기분을 북돋우려는 듯 살며시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루시엘도 마주 웃어주려 했지만, 어설펐는지 릴리스가 그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마. 완전히 잘 풀릴 거고, 우리가 지구를 더 좋게 만든 이야기는 오래도록 전해질 거야. 이대로, 너랑 나 그대로." 잠시 아담을 떠올린 릴리스가 질린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현재로선 확실하지 않지만, 이브가 아담 그 자식 애를 낳아준다면 분명 그렇게 되겠지.“
"와․․․" 루시엘이 흐릿한 감탄을 흘렸다. "그렇담 그 아이는 네 다다음으로 오는 인간이겠구나! 에덴의 네 번째 인간!“
"맞아. 그 앤 내 조카가 되는 거야. 우리가 주려는 건 내가 그에게 줄 수 있는 첫 번째 선물이지. 아직 태어나진 않았지만, 선물은 이브의 혈통을 타고 이어질 거야."
릴리스가 말을 마쳤는데도 루시엘은 에덴의 네 번째 인간에 대한 공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몽롱했다. 그런 그를 응시하며 눈을 깜빡이던 릴리스가 불현듯 루시엘을 밀어 넘어뜨렸다.
루시엘이 짧은 비명을 흘렸지만, 이미 에덴의 풀들이 상냥하게 뉘어지며 그들을 받아낸 채였다. 함께 몸을 던진 릴리스가 그를 놀리듯 쿡쿡 웃었다. 싱그러운 이끼와 꿀 향을 머금은 흙냄새 속에서 그녀의 등과 어깨는 완벽하게 비옥한 땅에 닿아 있었다.
"이브가 낳을 첫아이에게 오늘 일을 전해주자. 그 핑계로 웃어봐. 우리가 네 엄마한테 선물을 준 날에, 정작 루시엘 천사님이 겁먹은 다람쥐처럼 정신없이 굴었다고 말해주긴 싫잖아? 우리가 이브를 위하기까지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로 미리 지어놓는 거지.“
순간 머릿속이 반짝인 루시엘이 상체를 벌떡 세웠다.
"나! 나! 나한테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완벽한 구절이 있지. 엣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너무 처음부터 시작하는 거 아냐?“
루시엘의 볼이 발그레해졌다. "오, 오... 그럼?“
릴리스는 다정히 조언해주었다.
"옛날 옛적에, 로 시작하는 게 더 나아 보여."
릴리스가 다정한 손길로 루시엘을 도로 뉘였다. 길고 풍성한 황금빛 머리카락이 마치 쏟아지는 물줄기처럼 그녀의 등 뒤로 흩어지며 풀밭 위로 퍼졌다. 둘은 누운 채 서로를 마주보았다. 루시엘은 그녀가 산사나무 열매처럼 붉은 입술을 달싹이는 모든 순간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옛날 옛적에, 황금 문이 지키는 빛나는 도시 천국이라는 곳이 있었어. 그곳은 순수한 빛의 존재들이 다스렸지. 선을 숭배하고 모든 이를 악에게서 보호하는 천사들 말이야.“
릴리스가 루시엘의 볼연지를 검지로 콕 찔렀다.
"그들 중 하나의 이름은 루시엘이었어. 창조를 위한 환상적인 아이디어가 가득한 몽상가.“
루시엘의 얼굴이 볼연지의 색보다 덥게 달아오른 것도 잠시, 그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천국의 원로들은 그를 골칫거리로 여겼는걸.“
릴리스가 짐짓 엄하게 그를 불렀다. "루시.“
"하지만 사실이야! 왜냐하면 루시엘의 사고방식이 세상의 질서를 위협한다고 느꼈거든. 내 기억에 난 그런 적 없었던 것 같긴 한데. 아무튼 그렇게 느끼셨다니까 뭐․․․“
루시엘이 뾰로통한 얼굴로 볼에 바람을 집어넣었다. 그가 이야기를 받아 이어갔다.
"아무튼, 루시엘은 천사들이 자신들의 방식으로 우주를 확장하는 걸 지켜봤어. 지켜보기만 했어. 장로님들은 루시엘을 잘 안 끼워 주셨거든. 헛짓거리를 너무 많이 한다나."
그 순간 릴리스가 더 못 들어주겠다는 듯 신음하더니, 손바닥으로 그의 입을 막아버렸다. 루시엘은 놀랐지만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다. 되려 그 반대였다. 누운 루시엘의 위에 엎드리듯 올라탄 릴리스가 그의 입을 막은 채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그들은 지구의 먼지로부터 아담과 릴리스를 창조했지. 동등한 최초의 인류였어. 하지만 아담은 지배하길 원했고 릴리스는 복종을 거부했어. 릴리스는 동산을 떠났지. 릴리스의 강렬한 독립심에 이끌린 루시엘이 그녀를 발견했고, 반항적인 두 몽상가는 사랑에 푹 빠졌어.“
루시엘이 입이 막힌 채로 키득거렸다. 그를 보는 릴리스도 마찬가지로 함뿍 미소짓고 있었다.
"둘은 자유 의지의 마법을 인류와 함께 나누길 꿈꾸며 아담의 새 신부 이브에게 지식의 열매를 건넸고, 이브는 기쁘게 받았어.“
거기까지였다. 말을 마친 릴리스는 루시퍼의 위에서 구르듯 내려왔다. 다시 위를 보게 된 그녀의 보라색 눈동자는 하늘의 흠 없는 푸른색을 잠시 응시했다. 탄생의 의의와 천부적인 자아의 불일치에서 오는 피로 때문이 아니라, 오직 자신이 원하는 순간에 취하는 절대적인 자유를 만끽하려는 의지였다.
"그 뒤엔 어떻게 될까? 이브의 첫아이가 자유 의지로 무슨 선택을 할지 궁금하지 않아?“
"오리한테 말을 가르치려고 해보면 좋겠는데! 왜냐면 아담이 늑대랑 지금 그렇게 하고 있거든! 오리라고 해서 인간의 말을 못 알아듣는단 법은 없잖아! 오리랑 인간이 친구가 될 수 있다면 엄청나게 멋질 거야!“
"그래, 그렇겠지. 당신은 정말로 몽상가구나. 아무튼 그 아이는 자기 아빠보다 나은 인간이 될 거야.“
릴리스는 팔을 머리 위로 뻗어 시원하게 기지개를 켰다. 날카로운 눈매는 이제 완전히 풀어져 있었으나, 그 보라색 눈동자에는 여전히 세상을 관찰하고 소유하는 듯한 깊은 만족감이 어려 있었다. 그녀는 에덴의 모든 것을 흡수하려는 듯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잠시 고요함 속에 스스로를 내맡겼다
루시엘은 거의 황홀경에 빠져 그런 그녀를 두 눈 속에 담았다. 인간과 우연히 만나게 되고, 이렇게 웃으며 축복하며 이야기가 이어진다는 것이 그 자체로 경이로웠다. 황금빛 피가 흐르는 심장이 뻐근해 왔다. 이 땅은 오염이나 고통의 흔적이 없는 순결의 지표였다. 이 아름다운 곳에서 다음엔 무슨 기쁜 일이 일어날까······
루시엘이 벅찬 마음을 끌어안고 탄성했다.
"선악과는 정말 훌륭한 선물이 될 거야!"
미카엘은 한순간 자신이 무엇을 들었는지 재깍 이해치 못한 듯했다. 그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루시엘을 바라보았다. 그 눈에는 지금 일어난 일의 무게를 계산하느라 숨 쉬는 것조차 잊어버린 듯한 경악스러움이 역력했다.
그 표정은 한참 동안이나 루시엘의 뇌리에 남아 지워지지 않았다.
빛이 있으라. 그리고 인간이 생겼다.
그렇기에 그림자가 생겼다.
저것은 빛이다. 인간은 뒤돌아보았다.
그랬기에 인간은 저것이 그림자인 것을 알았다.
자유 의지를 얻은 인간이 선악을 구분케 되었다. 그로서 비로소 지구에 악의 개념이 뿌리내렸다. 인간의 불순종과 교만으로 인해 생겨난 원죄는 이브의 혈통을 타고 영원토록 이어져내릴 것이다.
장로들은 사단의 원흉인 루시엘을 끌어내어 책임을 물었다. 치천사의 죄를 엄벌하기 위한 법정이 섰다. 루시엘은 빛의 고리에 양손목을 구속당하고 장로들의 앞에 무릎꿇려졌다.
"새벽의 아들, 루시엘이여. 동산에서 네가 행한 일을 네 입으로 고하라. 지극히 높으신 분의 율법을 거역하고, 그분의 가장 귀한 피조물에게 불순종의 씨앗을 뿌린 이유가 무엇인가?"
줄곧 망연자실히 떨고 있던 루시엘의 눈동자가 커졌다. 릴리스가 루시엘을 대신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우리는 완전한 존재에게 허용된 자유를 행사했을 뿐이에요. 그들이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하도록 도왔을 뿐이라고요. 나의 행위는 죄가 아니라 경험입니다!“
"네게 묻지 않았다!“
릴리스는 제게 내려진 엄포에도 굴하지 않고 따박따박 말대답했다.
"왜 내겐 아무것도 묻지 않는 거죠!? 우리가 함께 저지른 일이니 책임도 나누어 져야 하잖아요!! 동등하게!!"
"릴리스!! 그만둬!"
루시엘이 반사적으로 릴리스에게 몸을 던지려 했다. 루시엘의 손목에 연결된 수갑 사슬이 한계까지 당기며 쨍강였다. 순식간에 모든 눈들이 루시엘을 향해 몰려들었다. 그는 쏟아지는 책망과 압박에 순간 어깨를 움츠렸지만 자의로든 타의로든 물러설 곳이 없었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너는 너에게 주어진 영광과 지혜를 무엇에 사용하였는가? 너 열국을 엎은 자여, 너는 네 안에 있는 불의를 숨기지 못하고 결국 드러내었구나."
"부, 불의요? 아녜요!"
"네가 스스로에게 행한 죄, 바로 그 오만이다! 너는 감히 천상의 보좌와 그 권위를 넘보았다. 네 스스로에게 묻거라. 어찌하여 네가 이 자리에 서 있느냐?"
"저, 저는, 제가 이브한테 주려고 했던 건 그냥―"
조급함과 절박함에 말이 엉켜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비수같이 날선 언사들이 루시엘을 거칠게 휘둘렀다. 벼락과 우레같이 쉴새없이 쏟아지는 호령 앞에서 다리에 힘이 풀릴 것만 같았다.
절 향하는 냉랭한 눈길엔 이미 익숙했다. 허나 루시엘은 이 모든 시작이 진정 순수한 의도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뼈저리는 마음의 고통을 느껴야 했다.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아- 아니에요, 그런 걸 원한 적 없어요! 아버지께 맹세코 그럴 의도가 아니었어요!“
"너의 교만이 너를 집어삼켰다. 너는 천상의 보좌보다 더 높은 자리를 탐냈다. 그분의 권위를 찬탈하려 들었다!“
루시엘이 거의 비명을 질렀다. "절대 그런 짓을 하려던 건 아니에요, 전 그냥, 저희는 아, 제발 들어주세요!!"
후회는 끈적하고 뜨거운 액체처럼 전신을 타고 흘러내렸다.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빈다는 형편 좋은 선택지는 애초에 주어지지 않았다. 스스로의 본질까지 더럽힌 것 같은 뿌리 깊은 자기혐오가 루시엘의 목구멍을 아교처럼 끈적히 이어붙였다.
루시엘은 제 선의의 순진함이 초래한 파국 앞에서 제대로 호흡할 수도 없었다. 차라리 악의로 시작했더라면 변명이라도 할 수 있었으련만, 섣부른 판단이 최악의 결과를 만들었다는 진실이 그 자신으로 하여금 아버지를 목청껏 부르지도 못하게 했다. 자신의 손으로 피운 불 앞에서 꼼짝없이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아담과 이브는 에덴의 동문으로 나간다 했다······ 스스로를 제대로 변호하지도 못하고 흐느끼던 루시엘이 고개를 떨궜다.
"들어라, 이제 너에게 내려질 심판이다. 네가 꿈꾸던 영광은 결국 허망함으로 귀결될 것이다. 너는 인간의 선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때의 루시엘은 혼이 빠져나간 것마냥 넋을 잃고 기도하듯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 아버지... 아버지시여...“
"너의 이름 루시엘, 그는 이제 천상에서 지워질 것이다.“
"그렇게까지 할 건 없잖아!"
마지막까지 투지를 아끼지 않던 릴리스는 기어이 루시엘이 묶인 중앙에서 끌려나갔다.
존재가 지워진다는 것. 이름을 박탈당한다는 것. 두려움에 가득 찬 루시엘의 모든 감각이 벌써 과부하 상태였다. 릴리스의 외침이 물 속에서 듣는 것처럼 먹먹하게 들렸다. 창이 쏟아지기 전부터, 그의 피부는 신성한 빛의 압력에 짓눌려 바늘에 찔리는 듯한 수백 개의 환상통을 느꼈다. 루시엘은 그 순간마저 훌륭한 몽상가였다. 눈동자 속에서는 두려움과 곧 다가올 고통에 대한 섬광이 쉴 새 없이 번득였다.
과호흡의 파도에 휩쓸리기 직전, 루시엘은 기억 속에 가느다란 은실처럼 고인 환청을 들었다.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들까지 두려워하지는 마.‘
첫 번째 창이 어깨를 꿰뚫자, 인대가 찢어지는 끔찍한 소리가 환청처럼 울렸다. 그와 거의 동시에 두 번째 창이 루시엘의 가슴을 관통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루시엘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숨을 삼켰다.
'내가 함께하잖아.‘
창이 꽂혀 더해질 때마다 신성한 빛이 천사의 몸속을 고속으로 관통하며 잔류했다. 뼈들이 으스러진 위로 천 개의 불꽃이 동시에 타오르는 듯한 격렬한 고통이었다. 그의 육신은 고통에 산산조각 났어야 마땅했으나, 신성한 존재였기에 찢어지지 않고 아픔을 그대로 흡수했다.
창들이 흉부와 복부를 꿰뚫자, 그는 목구멍까지 들이찬 비명 외에더 이상 아무것도 들이마실 수 없었다. 숨을 쉬려는 시도마저 가슴에 박힌 창들에 의해 좌절되었다······.
기어코 십수 개의 창이 박혔을 때 루시엘은 마침내 몸의 통제를 잃었다. 귓가에 들리는 끔찍한 고함 소리가 자신의 것이라는 것을 깨우치기까진 얼마 걸리지 않았다. 뒤늦게 청각이 되돌아와 그제서야 귀가 트인 것일지도 몰랐다. 그는 고통에 울부짖으며 창에 꽂힌 채 몸을 비틀었다. 몸부림칠 때마다 창 끝이 살과 영혼을 더 깊숙이 찢어발겼다.
온몸을 신성한 창에 궤뚫린 채로, 그 천사는 지금 이 순간부터 자신의 영혼이 결코 루시엘과 같아질 수 없으리란 것을 직감했다. 어렴풋이 그의 것이 아닌 비명이 들려왔다. 원래의 찬란한 색을 잃은 눈동자가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굴렀다. 마법으로 인해 붙들린 릴리스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울부짖고 있었다.
그에게만 흐르는가 싶던 지독한 고요가 얼마나 지났을까, 창은 빛으로 화해 사라졌다. 몸을 공중에 지탱하던 받침이 사라진 천사는 줄 끊어진 꼭두각시처럼 바닥에 쓰러졌다. 연신 루시엘을 연호하며 달려간 릴리스가 비로소 힘없이 늘어진 그를 품에 안았다.
릴리스가 핏발이 선 눈으로 그들을 심판하는 자들을 노려보았다.
"너는 감히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였도다. 그러나 이제 네가 곧 구덩이의 맨 밑에 떨어짐이로다!"
릴리스는 지지 않고 악을 쓰며 맞섰다.
"그래, 좋아! 가자, 루시엘! 떠나자! 난 이미 한번 해 본 거야, 두 번이라고 못 하겠어?“
릴리스의 목소리는 장로들이 들으란 듯이 크고 쨍했으나, 그녀가 자아내는 모든 문장은 오직 한 영혼 루시엘에게 닿기만을 애원하듯 그만을 부르짖고 있었다.
피로 처참히 물든 그의 날개는 잘못된 방향으로 뒤틀려 있었고, 끊임없이 밀려드는 고통에 파르르 떨리는 경련을 멈추지 못했다. 날개의 뼈마디가 비틀리며 미세한 뼈 긁는 소리를 냈고, 그는 희미해지는 정신을 붙들고 그 소리를 참았다. 어느 한도를 넘어선 고통은 오히려 감각을 마비시켰다.
그들이 지옥으로 떨어지던 마지막 순간, 이 악물고 펼쳐낸 육익이 릴리스를 감싸안았다.
추락은 끔찍히도 길었다. 비로소 지옥의 붉은 땅에 그가 내동댕이쳐졌을 때, 천국의 경고와 심판의 모든 무게가 그의 작은 몸에 쏟아졌다. 그는 바닥을 기며 영혼이 영영 되돌릴 수 없을 방식으로 찢기고 갈려나간 것을 느꼈다.
이름을 빼앗기고 타락한 치천사는 버려진 도자기 인형처럼 지옥의 단단하고 불길한 대지에 처참하게 널브러졌다. 작은 체구는 흙먼지와 그을음으로 뒤덮였고, 이마께에 뼈를 뚫고 자라난 두 뿔로 인해 핏줄기가 얼굴을 타고 쉴새없이 흘렀다. 찬란했던 백금발이 땀과 피, 재로 엉망이 되어 형편없이 이마 위에 흐트러졌다.
가물가물한 시야로 낯설고 새빨간 하늘이 보였다. 그 아래 릴리스가 무어라 악쓰고 있었다. 그녀는 두 주먹을 감아쥐고 무언갈 선언하는 중이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들이마쉰 숨에서는 에덴의 향긋한 풀냄새 대신 유황과 뜨거운 재의 냄새가 희미하게 섞여 났다. 구역감이 느껴지는 동시에 숨이 벅찼다.
.
그는 까무룩 정신을 잃고 말았다.
***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한 릴리스의 간호에도 작은 천사는 좀처럼 기운을 차리지 못했다. 단지 육신에만 새겨지지 않은 상처가 기어이 그의 내면과 외면에 흉터로 남을 것임은 자명했다. 몸 곳곳에서 여전히 미약하게 빛나던 금색 광채는 지옥의 칙칙한 어둠 속에서 힘없이 스러져갔다. 그는 더 이상 새벽의 계명성이 아니었다. 여기 나락에는 별도, 새벽도, 아침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자신의 오만 때문에 천국에서 내던져진, 피투성이가 된 작은 타락천사에 불과했다.
바위 그늘에 조그맣게 웅크린 옛 천사는 릴리스가 연거푸 부르는데도 불구하고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릴리스가 거의 포기하려던 찰나, 그가 아주 조그만 소리로 중얼거렸다.
"나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
"...루시엘, 고개 들어.“
"이제 루시엘이 아니야."
형제와 함께 받은 이름은 더 이상 사용할 수 없었다. 탄생을 함께한 형제가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아니, 미카엘의 탓은 없었다. 전부 제 탓이었다. 그는 스스로의 지리멸렬한 상태를 인식하고 있었고, 자신이 느끼는 마음의 고통과 그 이유로서 릴리스에게 이 비협조를 해명해야 할 것만 같아 입을 열었으나, 그 모든 것은 말이 되지 못하고 응어리가 되어 명치께를 돌덩이처럼 꽉 막아버렸다.
릴리스가 그의 턱을 쥐어 들어올렸다. 비로소 빛을 받은 그의 눈은 겉은 새빨갛고 눈동자는 샛노랗게, 마치 반으로 자른 선악과의 색처럼 물들어 있었다. 그의 눈동자 아래 뺨까지 마른 물길자국이 있다. 그는 또다시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막기 위해 눈을 크게 떴다. 그러자 시야가 파르르 떨리는 빛의 조각들로 흐트러졌다. 그것이 그가 이 밑바닥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빛이었다······
그 순간 일어난 일이다.
릴리스가 그를 명명했다.
"루시퍼."
방금까지 무명이었던 타락천사가 멍하게 고개를 들어 그녀를 마주했다. 릴리스는 다시 한 번 힘주어 그를 호명했다. "루시퍼.“
순간 일어난 일에 넋이 나가 있던 그가 눈을 끔뻑였다. 그렁그렁하게 고여 있던 눈물이 바닥에 후두둑 떨어져 짙은 색의 젖은 자국을 남겼다. 그가 서서히 좌우로 고개저으며 입을 열었다.
"그건.. 한 글자 차이잖아.“
"그야 난 아담이 아니니까. 명명의 책무를 타고나진 못했다고." 릴리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도 이 이름이면 여전히 애칭을 루시로 쓸 수는 있잖아. 뜻도 같고. 빛을 가져오는 자.“
극명히 갈려버린 두 사람의 결말이 어쨌든 간에, 릴리스 역시도 동등한 최초의 인간 한 쌍으로 창조되었다. 아담이 할 수 있다면 자신도 못 할 것 없었다.
"당신이 언젠가 나한테 해줬던 말 기억해? 지금 보이는 건 껍데기에 불과해. 영혼은 평생 남아있는 거잖아. 나도 당신을 당신 자체로 사랑하고 있어.“
"하지만. 모르겠어, 릴리스? 이게 안 보이는 거야?" 그의 목소리가 젖은 채 고양되고 있었다. "이건 그냥 육신에만 국한된 게 아냐, 이제 지워지지 않을 거야, 영원히! 난··· 나는··· 이제······“
릴리스는 자신의 구부러진 붉은 뿔을 힐끗 눈짓했다.
"인정할게. 우린 지금 별처럼은 안 보여. 뿔이랑 꼬리가 있는 별들이 어딨어? 약간 괴물들처럼 보이긴 하지만, 당신을 또 한번 루시라고 부를 수 있다면 난 그걸로 됐어.“
"······.“
"그것만으로도 당신을 사랑할 거야.“
꽉 조여 매고 있던 목 근육이 풀리면서 굳게 닫혀 있던 입술 사이로 얕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참아 눌렀던 숨이 뜨거운 탄식이 되어 허파 밖으로 밀려 나왔다. 그의 눈가에 매달려 있던 뜨거운 액체들이 기어이 다시금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릴리스는 선 채로 그를 안고 달래듯 앞뒤로 몸을 흔들었다. 어쩌면 춤을 추는 것도 같았다.
"이야기를 다시 만들자. 루시퍼에게 어울리는 이야기로.“
"하지만, 원래 건?" 그의 눈에서 눈물이 울컥 터져나왔다. "그건, 그건- 루시엘의 이야기라서?“
"꼭 그런 건 아냐. 그건 그냥 버려.“
단호히 말한 릴리스는 그를 끌어안고 바위에 몸을 기대 앉았다. 언젠가 에덴의 나무에 기댔던 것처럼. 에덴의 풀밭에 비견되지 못하는 이곳의 붉은 흙길엔 머리를 완전히 뉘일 만큼 푹신한 곳이 없었다.
릴리스의 목소리는 완전히 회복해서 원래의 강단을 되찾은 채였다. 분개심과 반항심으로 가득해 전보다 사납게 들리기도 했다.
"그래. 우리가 무모했어. 인정해야겠군. 어쩌면 계획이 충분하지 못했을지도 모르지."
짙은 속눈썹 아래서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가 꿈을 꾸듯 번득였다. 그 순간 타락한 천사의 차가운 뺨이 그녀의 목덜미 우묵한 곳에 닿았다. 그를 내려다보는 그녀의 눈빛은 너무나도 애틋해서, 찰나에 릴리스의 모든 야망이 심장 뒤로 한 발 물러선 듯했다. 그가 고개를 옆으로 돌려 그녀의 쇄골에 뺨을 묻었다. 마치 릴리스의 심장 소리를 갈구하는 듯이.
릴리스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고 느릿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니, 이어갔다. 아무 먼 옛날처럼 느껴지는 언젠가 이브의 첫아이를 위해 둘이서 함께 지었던 그 이야기였다.
"······자, 어디까지 했지? 이브는 지식의 열매를 기쁘게 받았지만, 선물에는 저주가 따랐지."
그가 흠칫 몸을 굳혔다. 같은 과거를 회상하는 눈에서 더는 눈물조차 나오지 않고 단지 끔찍한 고역감만이 비추였지만, 그는 말을 막을 의지조차 보이지 않고 그저 무력히 릴리스의 품에 몸을 더욱 웅크렸다.
"단순한 불복종 행위로 마침내 악이 지구에 도착했고, 어둠과 죄의 새로운 왕국이 탄생하고야 말았어. 천국이 애써 유지했던 질서는 부서졌고.“
릴리스는 그의 볼을 문질러 손의 온기를 전해주었다. 천사의 부드러운 눈꺼풀과 눈 밑에 생긴 자줏빛 그림자를 섬세하게 쓰다듬고 나니 그의 양 볼은 제법 따뜻해져 있었다.
릴리스가 천사를 처음 본 순간부터 끊임없이 소망해왔고, 그 후 셀 수도 없이 해왔던 대로 그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있다는 사실이 그녀로 하여금 이 순간의 모든 것을 간단히 여기게 되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무모한 행위에 대한 벌로, 천국은 루시퍼와 그의 사랑을 그가 만든 어두운 구덩이로 보냈어. 인간의 선을 절대로 보지 못하고 오직 잔인성과 사악함만을 마주하게 한 거야. 부끄럼쟁이 루시퍼는 실수한 게 부끄러워서 아무것도 안 하고 천년만년 누워서 엉엉 울기만 했어.“
"뭐어어···? 그거 지금 좀, 이상해지고 있는데..."
그가 꿍얼꿍얼 지적했다. 입가의 미소를 지우지 않은 릴리스는 그저 장난이었다는 투로 쿡쿡거렸다. 그는 그 미소를 보며 절로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릴리스는 그에게 장난을 쳐 주고 관심을 끌어보려 하고 있었다. 애정을 가뿐히 만끽하기엔, 실은 너무 무거운 사랑이었다. 이곳은 지옥이었으므로다.
그렇지만 릴리스는 이전보단 홀가분해진 눈으로 그를 보았다. 적어도 그가 날조를 잡아낼 정도론 기운을 차렸다는 뜻이니까. 절 위해 짧은 산책길에도 백 가지 농담을 쉴새없이 해 주던 그가······ 이어 릴리스가 제안했다.
"바위 뒤쪽에 사탄이라는 애가 있어. 보러 가자.“
"...나중에.“
"뿔 달리고 엄청 큰 빨간색 도마뱀처럼 생겼어. 박쥐 같은 날개도 있어. 걔가 조그만 뿔 달린 것들을 꽤 많이 기르고 있는데, 구경하러 갈 생각 진짜 없어?“
평소의 그였다면,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이 일어나기 전의 그였다면 두말 않고 따라나섰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스스로와 갈등하느라 거의 끙끙거릴 지경이었다. 릴리스는 끈질기게 그를 기다려 주었다. 마침내 그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루시퍼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보고 싶어...."
그러자 릴리스는 당신이라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소리내어 웃었다. 메아리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것으로 되었다 하는 느낌이었다.
수치심에 휩싸인 루시퍼는 꿈꿀 의지를 잃었지만, 그의 곁에는 릴리스가 있었다. 릴리스는 루시퍼가 좌절하는 모습을 보고만 있지 않았다. 릴리스는 루시퍼를 이끌어 지옥의 인프라를 세우고, 악마들에게 노래를 불러 힘을 주면서 승승장구했다. 지옥의 수가 늘어나면서 그들의 힘도 커져 갔다······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 난다. 아직 결말이 지어지지 않은 이야기다.
「The Story of Hell」
양장을 덮자 책표지의 제목이 드러났다. 금박으로 양각된 제목을 손으로 쓸어본 루시퍼가 나지막히 읊조렸다.
"전해질 수 있을까? 이 이야기······“
"물론이지. 우리가 첫눈에 알아볼 수 있을 영혼에게 전해질 거야."
지옥의 여왕, 그의 아내 릴리스가 뒤에서 루시퍼의 양어깨를 감싸쥐었다. 루시퍼는 익숙하게 아내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깊은 생각에 잠긴 루시퍼의 사과색 눈이 고즈넉히 가라앉아 있었다.
”이 책의 다음 주인은 누가 될까?“
”누가 되던지 당신은 이미 알고 있을 거야, 내 사랑. 당신이라면 한눈에 알아보겠지. 지금 다 알지 못하는 건 당연해. 하지만 그때가 오면, 당신은 분명 그에게 이렇게 말할 거야. '너로구나.'”
그들 사이에서만 통하는 아주, 아주 오래된 농담이었다. 수백 가지 농담은 없었지만 그 농담만은 언제나 먹혀들었다. 옳아, 너일 테구나. 모든 걱정이 썰물처럼 밀려나가는 것을 느끼며, 키득대던 루시퍼는 아내에게 살며시 기댔다. 때가 오면 나는 네가 누군지 알리라.
잠시간 그들의 호흡이 섬세히 겹치며 세상으로부터 완벽하게 분리되는 듯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살며시 허리를 굽힌 릴리스가 루시퍼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것보단 지금 할 일이 있지 않아, 자기야?“
잠시 의아한 얼굴이던 루시퍼가 삼 초 후 제자리서 펄쩍 뛰었다.
"오 주여, 책 쓴다고 완전 새까맣게 잊고 있었잖아! 그게 오늘이었어!“
새된 비명을 내지른 루시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루시퍼가 공구 테이블 위에 얹어둔 탑햇을 낚아채 나사 조이듯 머리에 돌려 썼다. 릴리스는 지옥의 왕이자 제 남편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정말이지 한결같이 사랑스러운 것을 보는 눈빛으로.
오늘, 루루월드의 개막식은 성대하게 치러졌다.
정문 앞에는 붉은색 새틴 리본이 팽팽하게 걸려 있었다. 리본 양 끝을 잡고 선 악마 직원들은 긴장한 표정이었고, 루시퍼 모닝스타가 손에 든 큼지막한 황금색 가위는 햇살 아래서 번쩍였다.
마지막 순간 루시퍼가 가위 손잡이 한 쪽을 릴리스에게 건넸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입꼬리를 올린 릴리스는 구태여 사양하지 않았다.
긴장되는 카운트다운이 끝나고······ 싹둑! 황금빛 가위날이 붉은 리본을 단번에 갈랐다. 두 동강 난 리본의 끝자락이 힘없이 나부꼈다.
악마 군중의 환호 속에서 부부는 서로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들은 명실상부 지옥의 왕과 여왕이었다. 이곳에 새벽은 없었지만 노래가 있었다. 고별은 많았지만 서로가 남았다. 책에 여백은 아직 많이 남아 있었고, 이야기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이어지는 중이다. 상황은 정말 좋아지고 있었다. 오늘은 놀이공원을 개장했고, 7개의 죄악들이 모여 공연을 할 터였다. 조만간엔 죄인들을 갱생시킬 계획을 세우려 한다.
모든 게 더 나아질 것이라는 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이제 남은 것이라곤 이야기를 계속해나가는 것뿐이다.
언젠가 누군가 첫 장을 펼쳐 읽어주기만을 기다리면서.
CREPE ⓒa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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