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주의(도박, 화류계) 캐해주의 고증안함


사회는 생존 게임이 벌어지는 정글이다. 이 아스팔트로 뒤덮인 정글에서 연습 게임이란 없다. 포식자와 피식자가 먹고 먹히는 끊임없는 순환의 고리에서 방심했다가는 홀라당 잡아먹히며 영락없이 게임 오버다. 그러니 인생은 굳이 장르를 따지자면 순간순간의 작은 판단이 분기점이 되어 엔딩 루트까지 논스탑으로 달리는 로그라이크인 것이다. 하지만 사헌은 존나 억울했다. 초기 스탯이 개시발이라 인생 난이도가 하드코어가 됐는데 이대로 살라는 건 존나 불공평하잖아. 리세마라라도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냐고.

물론 할 수 있긴 했다. 문제는 인생에서 리세마라를 하려면 죽고 다시 태어나는 수밖에 없는 거였지만.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역시 삶이란 게임 따위의 비유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하고 고달픈 좆뺑이의 굴레 같은 거였다. 그래도 사헌은 이 고난한 먹이사슬 속에서 그동안 빨대를 꽂고 잘도 살아남아왔다. 그래서 자신 또한 이 생존 게임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한 신세임을 잠시나마 잊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남을 속여먹는데 익숙했기 때문에 속임수 따위 얼마든지 간파해낼 수 있다는 안일함이 불러온 자기과신이 곧 패착이 된 것이다. 한순간의 안일함으로 뒷통수를 제대로 후두려 맞은 사헌은 경찰차 뒷좌석에서 그제야 인생을 관통하는 진리를 벼락맞듯 깨닫는다.

인생은 실전이야 좆만아.

설계판에서 돈을 쓸어모으던 숙부의 외침이 3D 오디오마냥 지금 이 순간 사헌의 귓가를 떠돌고 있다. 사헌은 뒷좌석과 앞좌석을 가르는 투명한 보드판 너머를 응시한다. 전방을 주시하는 까만 뒷통수. 사헌에게 인생은 실전임을 몸소 가르쳐 준 사람이다.

포도야. 사헌은 나지막이 그를 불러봤다. 돌아보기는커녕 대답 하나 없다. 씨발. 속으로 욕을 뇌까린 사헌은 곧 부드러운 목소리를 꾸며낸다.


"저기요."

"갑자기 웬 존댓말."

"제가 그쪽이 경찰이신 줄도 모르고 그동안 너무 허물없이 군 것 같아서요. 하하."

"하던 대로 하지? 그런다고 참작되는 거 없는데."


와. 사헌은 기가 막혔다. 하우스 말단 재떨이로 지내면서 존댓말 꼬박꼬박하던 놈이 상황이 역전됐다고 반말 따박따박하니까 존나 꼬왔다.


"와 그래도 내가 연상인데 체포했다고 바로 이렇게 반말을? 이 장유유서 없는 언동 뭐지?"

"보기보다 순진하네."

"뭔 소리야?"

"당연히 가짜 신분이지. 그걸 믿었어?"


와. 도대체 구라가 아닌게 뭐야? 어처구니가 없어진 사헌이 비난했다.


"하긴. 상식적으로 어떤 부모가 지 자식 이름을 김솔음으로 짓겠어. 역시 이름까지 가짜였던 거야."

"이름은 진짠데."

"......"

"혹시 죽고 싶어?"


죄송합니다. 졸지에 탈룰라를 하게 된 사헌이 고개를 처박았다. 아니 씨발 김솔음이라는 이름이 진짜라고? 그리고 누가 잠입하는데 지 본명을 쓰냐 미친 공무원아... 현실이 영화보다 더 옹졸하고 허술하다는 사실을 사헌은 종종 잊곤 했다. 빠르게 그 사실을 상기해낸 사헌은 곧바로 평정을 되찾았다. 지금 김솔음의 신상으로 구라네 뭐네 실랑이 할 때가 아니었다. 이대로라면 꼼짝없이 경찰서행이다. 안그래도 좆망한 인생이었지만 여기서 빨간줄이라도 긋게 되면 신용불량자에 전과범이라는 칭호만 더하게 되겠지. 잘 먹고 잘 사는 인생으로 재기는커녕 꼼짝없이 개좆망루트다. 생각을 마친 사헌은 속 없는 인간처럼 실실 웃었다.


"선생님."

"선생님?"

"아, 제가 원래 사람 만나면 자꾸 선생님으로 불러서."

"입에 침 하나 안 바르고 거짓말을 하네."


하하 씨발. 한 마디도 지질 않는다. 그래도 사헌은 웃었다. 전재산 잃은 진상을 어르고 달래는 마음으로 임하자고 생각하면서. 아이 왜 그러세요 선생님 저 서운하게.


"그래도 우리가 그동안 함께한 정이 있는데..."

"아아."


솔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담배를 달라고 해놓고 돈을 은근슬쩍 안 준다거나 현금을 뽑아오면 출처를 따져가며 ATM 뺑뺑이를 시키던 그간의 일들을 나열했다. 자신의 만행이 줄줄 나올 때마다 사헌의 안색은 시시각각으로 창백해졌다. 그동안의 업보가 고스란히 자신에게 돌아오고 있었다. 아니 그래도 막판에는 좀 잘해주지 않았나. 억울해진 사헌이 대꾸했다.


"챙겨준 건 다 까먹고 그런 것만 기억하고 있네, 쪼잔하게."

"진심이야?"

"그래! 내가 너 커버도 쳐주고, 어? 큰 판에 엮일까봐 출근하지 말라고 구라까지 깠는데!"

"......"

"공범이라며. 니가 먼저 우리 공범이라고 말했잖아 씨발..."


솔음은 대꾸하지 않았다. 혼자 벽에 대고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화를 내고 있으니 이상하게 몸에서 힘이 빠졌다. 알 수 없는 탈력감에 사헌은 소리지르는 걸 관뒀다. 하, 잠깐이라도 포도를 믿은 스스로가 천하의 둘도 없는 머저리처럼 느껴졌다. 사헌은 고개를 조용히 떨궜다. 양 손목을 감싼 수갑이 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행한 신뢰의 대가가 이 반짝이는 은팔찌라니. 제 신세가 참 웃겼다. 자조하는 사헌을 솔음이 힐끗 쳐다봤다. 시발새끼... 조용히 욕을 읊조리는 사헌의 귓가에 우웅, 하는 진동 소리가 들렸다. 운전석에 앉아있던 솔음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운전석 시트 너머로 핸드폰 화면이 눈에 들어왔다.


최경위님

솔음아 잠입해있으니까 심심하지... 
나도 회의 재미없어 죽겠다 할 말만 딱딱 하지 무슨 쓸데없는 소리만 많아가지고...
성과 향상 방안 보고회에 도덕 윤리 얘기는 왜 나오냐고...
지가 아리스토텔레스야 뭐야...
경찰서장 중2병인듯. 아 늘 생각하던건데 경찰서장 이름이 방국봉인거 웃기지않니? 방구뽕같잖아 막이래~..
보고회가 아니라 학예회에서 연극발표하는 자아도취 학생 같아.
그런데 네가 전에 사이비 마을 잠입했을 때 신들린 척 하는 연기 정말 좋았어... 솔음아 나는 정말 네가 접신한줄 알고 퇴마할 뻔했잖아. 하려면 그렇게 해야지... 아 회의좀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방서장 지랄 쩔어...
지난번에 범인 쫓다가 뭐 좀 부순 것 갖고 한번만 더 그러면 형사 1팀 전부 시말서에 인력 안주겠다고 염병을 떠는데 말 한마디 손짓 하나가 다 지랄이야.
지 사무실에 난초 분재 존나 갖다놔서 서장실이 아니라 거의 뭐 식물원인데 거기 있는 식물들이 보고 인간은 다 저렇다고 오해하지 말았으면 해...
어쨌든 빨리 이번 일 끝내고 재관이랑 너랑 온천이나 가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네...
재관이는 서장한테 잘보여서 꼭 인력보충을 받아야 된다고 하더라. 너 입사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괜히 걱정할까봐 말하지 말라고 했지만 언젠가는 알게될 텐데 내가 어떻게든 하면 되니까 신경쓰지 말고 일해.

아... 회의 끝나면 금방 연락할게...


사헌은 고개를 쭉 뻗고 빠르게 단답을 남기는 뒷통수 너머를 바라봤다. 가공할 만한 동체시력으로 카톡 내용을 순식간에 읽어내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등받이에 몸을 늘어뜨렸다. 그리고는 모든 걸 체념한 것처럼 몸에 힘을 풀고 얌전히 눈을 감아버렸다. 끈 떨어진 인형마냥 뒷자석에 늘어진 사헌을 룸미러를 통해 솔음이 힐끗댔다.

사이렌이 꺼진 경찰차는 순조롭게 고속도로에 올랐다. 약 3km 앞 휴게소가 있습니다. 고요한 차 안은 간헐적으로 네비게이션의 안내음만 울려퍼졌다. 그 소리에 사헌이 눈을 떴는지 작게 뒤척이는 소리가 났다. 그런데 가죽시트에 옷이 비벼지며 나는 바스락 소리 사이로 뭔가 위화감이 있었다. 솔음의 시선이 잠깐 룸미러에 머물렀다. 사헌이 굼벵이처럼 몸을 웅크린 채 고개를 무릎 사이에 처박고 있었다.


"왜."

"배 아파요..."


그래, 그러시겠지. 사헌의 힘없는 목소리에도 솔음은 시큰둥했다. 그야 이런 식으로 꾀병을 부려 도주각을 노리는 범죄자들을 숱하게 봐왔기 때문이다.


"참아."

"......"

"장문혈 누르면 되잖아."

"효과가 없어요..."


평소였다면 득달같은 말대꾸가 돌아왔을 텐데 영 맥아리 없는 목소리만 허공에 흩어졌다. 솔음은 다시 한 번 룸미러를 통해 사헌을 쳐다보았다. 기분 탓인가? 안색이 좀 새하얀 것 같기도 하고. 잠깐 힐끗댄 거라 정보값이 정확하지가 않다. 그래서 솔음은 정확한 판단을 위해 한 번 더 사헌을 자극해보기로 했다.


"어쩔 수 없어. 참아."

"그치만..."

"지금 이게 경찰서까지 무료로 태워주는 픽업 서비스 같아?"

"......"

"주제파악 좀 해. 너 체포된 범죄자야. 사소한 거 하나하나 요구할 처지 아니라고."


그러자 사헌이 조용해졌다. 원래 왁왁대던 놈이 갑자기 조용해지니 솔음은 룸미러를 힐끔댔다. 사헌은 불평 섞인 한숨을 터뜨리지도, 불만 가득한 표정을 짓지도 않았다. 그저 모든 것을 포기한 낯으로 배를 움켜쥔 채 작게 신음만 흘리고 있었다. 잔뜩 헝클어진 앞머리 끝이 식은땀으로 젖어 있는 것을 발견한 솔음이 네비게이션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휴게소까진 1km 정도 남아 있었다. 남은 거리를 확인한 솔음은 엑셀을 밟아 속도를 높였다.

평화로운 주말의 휴게소에 난데없이 등장한 경찰차는 주변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주변의 눈길을 받으며 칼각으로 주차한 경찰차의 앞문을 열고 나온 솔음이 뒷자석의 문을 열었다. 문이 벌컥 열리자 뒷자석에 쓰러지듯 누워 숨만 쌕쌕거리던 사헌이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나와. 무뚝뚝한 어조였지만 사헌은 구원받은 것처럼 고개를 마구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휴게소 화장실로 이동하는 내내 솔음은 사헌의 팔뚝을 단단히 잡고 있었다. 사헌이 도주할 것을 염려하는 듯했다. 영락없는 범죄자 취급에 기분이 썩 좋지 않았지만 사헌은 별 저항 없이 솔음을 따라 걸었다.

휴게소에 도착한 뒤 처음으로 의사를 표력한 건 화장실 칸 앞에서였다. 설마 안까지 따라들어오시는 건 아니죠...? 사헌의 물음에 솔음이 진심이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근데 문은 잠그지 마. 솔음의 말에 질색의 기운이 사헌의 얼굴에 스쳤다. 뭐해. 급하다며. 솔음의 종용에 사헌은 어쩔 수 없이 칸 안으로 들어갔다. 솔음은 그 앞을 지키고 선 채로 허리춤에 차고 있던 삼단봉을 문틈 사이에 끼워넣은 채 최대한 문을 닫았다. 혹시라도 사헌이 헛된 생각을 품고 문을 걸어잠근 뒤 변기를 밟고 옆 칸으로 넘어가 탈출을 할 가능성을 염려해서였다.

한편, 칸 안으로 들어간 사헌은 문이 닫히자마다 사타구니를 부여잡고 주저앉았다. 씨발 존나 아프잖아! 적당히 힘조절을 했음에도 눈앞에 별이 번쩍이며 식은땀이 뻘뻘 나는 고통이었다. 리얼한 연기를 위해 스스로 행한 잔혹 행위의 여파가 이렇게나 거셀 줄이야. 단전에서부터 올라오는 욱신거림에 사헌은 비틀대며 변기를 잡고 일어섰다. 그리고 변기 뚜껑을 내리고 그 위에 앉은 채 고뇌했다. 김솔음 이 치밀한 놈... 방심한 틈을 타 변기를 밟고 옆 칸으로 넘어가 도주하려던 계획은 보기 좋게 틀어막혔다. 이렇게 된 이상 화장실에서 주차장으로 돌아가는 경로에서 쇼부를 봐야 했다. 도망칠 수 있을까? 물론이다. 도망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존재하는 한, 사헌은 언제든지 몇 번이고 도주 시도를 할 자신이 있었다. 가능성이 사헌을 움직이게 하니까. 판돈을 올리고 카드를 던지게 만드니까. 할 수 있어. 생각을 정리한 사헌은 작은 한숨을 내쉬고는 조심스레 칸의 문을 열었다.


"그 배인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힘 줘도 안 나와요."


머쓱한 듯 뒷머리를 벅벅 긁는 사헌을 보던 솔음의 낯에 한심의 빛이 떠올랐다. 하지만 솔음은 사헌을 나무라지 않았다. 그저 사헌을 끌고 주차장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을 뿐이었다. 안 돼. 이대로 끌려간다면 휴게소까지 온 게 무색해진다. 초조해진 사헌은 따라 걷던 걸음을 멈췄다. 잘 따라오던 사헌이 멈추자 사헌의 팔목을 붙잡고 있던 솔음이 뒤를 돌아봤다.


"왜."

"배고파요..."


마침 타이밍 좋게 사헌의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그도 그럴 것이,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먹은 것이라고는 아아메 한 잔과 담배 두 개비, 그리고 하우스에서 게임하면서 마셨던 위스키 한 잔이 전부였으니까. 사헌은 비굴하게 손을 모아 싹싹 빌었다. 아시잖아요 저 어젯밤부터 설계판 들어간다고 아무것도 못 먹었어요 완전 공복이라 속쓰려 죽겠어요 제발요... 그러나 솔음은 그래서 어쩌라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안되겠다. 애새끼처럼 떼를 쓰자. 사헌은 그대로 길바닥에 주저앉으며 바짓가랑이를 붙들었다.


"진짜 제발 부탁이에요. 빵 들어가기 전에 사회에서 하는 마지막 식사를 즐기게 해주세요. 비용은 나중에 구치소로 청구하면 되잖아요... 네?"

"뭐 먹고 싶은데."


무릎까지 꿇을 작정이었던 사헌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만 같던 솔음이 흔쾌히 제 요구를 들어주는 건 예상 외였다. 진, 진짜요? 당황한 사헌이 더듬거리자 솔음이 어이없다는 듯 덧붙였다. 싫음 말고. 싫을 리가 없었다. 반색한 사헌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금 당장 가시죠.

휴게소를 돌아다니며 호두과자와 버터알감자를 (솔음의 카드로) 구매한 사헌은 먹다보면 목이 마르다며 카페도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끝을 모르는 뻔뻔한 요구에 솔음은 잠시 사헌을 빤히 쳐다봤는데, 그 눈빛에 사헌은 조금 많이 쫄아 눈을 내리깔았다. 바라는 것도 많다며 비아냥 댈 것 같았던 솔음은 의외로 순순히 카페로 향했다. 그래도 옛정을 고려해주는 모양이지? 사헌은 속으로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휴게소에 있는 유일한 카페는 테이크아웃 전문점 형태의 카페였다. 뭐 먹을 건데. 솔음이 툭 뱉었다. 사헌은 메뉴를 둘러보는 척 하면서 대가리를 굴렸다. 아직까지도 도주각을 재지 못해서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다.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음료를 고르자. 그래도 음료 두 잔이면 만드는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다. 자바칩 프라푸치노요. 솔음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알바생에게 말했다. 자바칩 프라푸치노 한 잔 주세요. 엥... 왜 한 잔만 시키지. 의아한 시선에 솔음이 대꾸했다. 난 안 마실 건데. 예상치 못한 상황에 사헌은 당황했다. 시발 그럼 도주각을 잴 시간이 없잖아! 사헌은 메뉴를 준비하기 위해 등을 돌려 멀어지는 알바생의 뒷통수에 대고 다급히 의견을 피력했다.


"휘, 휘핑크림 많이..."

"휘핑크림 많이 주세요."


솔음이 가지가지 한다는 표정으로 덧붙였다. 그 표정에 사헌은 어딘가 쪽팔려졌다. 휘핑크림을 올리는 일말의 시간이라도 확보하기 위한 제 발악이 어쩌다보니 꼴값떠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사헌은 믹서기 속에서 프라푸치노가 갈리는 걸 우울하게 바라보았다. 그런 사헌의 팔목을 붙잡은 채 곁에 서 있던 솔음의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낸 솔음이 뺨과 어깨 사이에 핸드폰을 끼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 경위님."


예, 잡고 올라가는 길입니다. 사정이 생겨서 지금은 휴게소에 있습니다. 호 사장 쪽은 한 발 늦었더군요. 이미 도망가고 없었습니다. 대화를 엿듣던 사헌이 인상을 찌푸렸다. 호 사장 이 약삭빠른 놈 지만 홀라당 튀었다 이거지. 사헌은 나란히 체포됐을 그동안 동고동락한 하우스의 식구들을 떠올렸다. 사실 일말의 걱정은커녕 어떻게 됐는지 호기심조차 들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 안 봐도 되니 그건 좀 기꺼웠다. 하나같이 좆같은 인간군상들이었기 때문이다.

솔음이 통화하는 사이 음료가 나왔다. 음료를 알바생으로부터 건네받은 사헌은 손에 쥔 음료와 제 팔목을 붙잡은 채 여전히 통화 중인 솔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다 사헌은 아무렇지 않게 솔음의 나머지 손에 음료를 턱 쥐여주었다. 일련의 행동은 음료의 주인이 솔음인 것마냥 자연스러워서, 통화에 집중하여 주의가 분산된 솔음은 얼떨결에 음료를 건네받았다. 그와 동시에 사헌은 제 팔목을 붙잡은 손을 재빨리 뿌리치고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백사헌! 등 뒤에서 솔음이 외쳤지만 사헌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미친듯이 휴게소를 질주했다. 주머니엔 방금 전 솔음에게서 슬쩍한 수갑 열쇠를 품은 채였다.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는 주말 정오. 가족 단위의 관광객들만이 가득한 이 평화로운 고속도로 휴게소 한복판에 작은 소란이 인다. 산들바람처럼 나긋하게 걷는 인파의 흐름을 거꾸로 거스르며 추격전을 찍는 남자 둘. 느슨한 주말에 긴장감을 일으키는 광경에 시선이 모였다.


"비켜 씨발!"


제 앞길을 가로막는 관광객 하나를 밀쳐내며 사헌은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솔음이 미친 속도로 뒤를 쫓아오고 있었다. 인생 최대의 스피드로 휴게소를 질주했건만 거리가 생각보다 가까워 사헌은 공포에 질렸다. 잡히면 진짜 뒤진다. 제 뒤를 쫓는 솔음이 쥐고 있는 삼단봉에 가을철 수수처럼 타작당할 미래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겁에 질린 사헌은 인파 틈을 장어처럼 요리조리 빠져나가며 코너를 꺾었다. 줄이 길게 늘어선 화장실을 지나 호두과자를 파는 가판대, 프랜차이즈 식당이 들어찬 푸드코트를 주파해 바깥으로 빠져나간 사헌의 눈앞에 들어온 것은 막다른 길이었다.

시, 시발... 난관에 봉착한 사헌이 천천히 뒤돌았다. 푸드코트의 문을 열고 나온 솔음이 천천히 사헌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이 추격전의 말로를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그제야 사헌은 솔음이 양떼 몰듯 자신을 막다른 골목까지 유도해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헌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주변을 살폈다. 고속도로 뽕짝 리믹스가 흘러나오는 잡화 노점 뿐이었다. 그마저도 주인이 자리를 비웠는지 노점 의자는 텅 비어 있었다. 드라마틱한 탈출 서사를 바란 건 아니었지만 이 추격전의 끝을 장식하는 게 고속도로 뽕짝 리믹스인 건 너무하지 않나. 사헌은 초조하게 입술을 짓씹으며 솔음이 피식 웃는 걸 바라봤다. 오른손이 쥐고 있는 삼단봉에 저절로 시선이 갔다. 저거 존나 아프다던데. 생명의 위협을 느낀 사헌이 결국 참지 못하고 외쳤다.


"잠, 잠깐! 대화로 해결합시다 우리."

"대화?"

"네!"

"이게 내 대환데."


솔음이 삼단봉을 손바닥으로 툭툭 쳤다. 봉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위협적인 휙휙 소리가 났다. 


"미, 민중의 지팡이가 선량한 시민을 지팡이로 때려도 되는 거야?"

"선량한 시민이라니. 너 범죄자잖아."

"증거 있어? 무죄 추정의 원칙 몰라?"

"아, 법치주의로 가겠다? 형사소송법은 내가 잘 아는데."

"......"

"현행범은 영장 없이 체포 가능해. 체포 이후에도 합리적 이유가 있으면 도주 방지를 위해 필요한 범위 내에서 강제력도 얼마든지 사용 가능한데."

"......"

"내가 어떤 수단까지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아?"


솔음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이미 현행범 체포 상황이라 이렇게 도망친다 하더라도 절대 상황이 좋아지지 않을걸. 도망 시도 자체가 별도의 죄가 될 수 있거든."

"......"

"지금 협조하면 수사 과정에서 감경 요소로 작용할 수도 있어. 후회할 짓 하지 말고 순순히 따라오는 게 네 신상에 이로울 것 같지 않아?"


논리로 승부하니 할 말이 없었다. 말빨마저 후달린 사헌은 더듬거렸다. 개, 개자식아! 그러는 순간에도 솔음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점점 가까워지는 솔음에 사헌은 압박감을 느꼈다. 필요하다면 몸싸움이라도 해야 했다. 이길 자신은 없었지만 적어도 저 위협적인 삼단봉에 맞설 수 있는 도구는 필요했다. 판단을 마친 사헌은 다급히 잡화 노점으로 뛰어들었다. 너저분히 쌓인 잡동사니를 허겁지겁 뒤져 아무거나 손에 쥐었다. 그래 씨발, 너 죽고 나 죽자. 다죽자 메타로 사고를 전환한 사헌이 손에 쥔 걸 공격적으로 휘둘렀다. 우당탕! 가판대 위에 진열되어 있던 아싸 멋쟁이 화끈한 관광디스코 CD와 오리지날 인기명품가요 USB가 길바닥에 와르르 쏟아지며 주변의 이목이 집중됐다. 사헌이 갑자기 날뛰자 솔음의 발걸음이 멈췄다.


"거, 거기 멈춰! 한 발짝만 더 움직이면 이 노점은 부서진다."

"뭐?"


솔음이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그걸로 도대체 뭘 하겠다고. 그제야 사헌은 제 손에 들린 도구를 확인했다. 뭔가 굉장히 화려한 비주얼의... 장난감 칼이었다. 씨발 이게 뭐야. 사헌은 제 손에 들린 장난감 칼을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살폈다. 뭐야 뭐 촬영해? 그 사이 휴게소에 난데없이 벌어진 촌극에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이기 시작했다. 자신과 솔음의 대치 상태를 두고 수근대는 목소리들 가운데, 앳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우와 금룡퇴마검이다!

예상치 못한 전개에 사헌이 당황한 틈을 타 솔음은 은근슬쩍 발걸음을 옮겼다. 그래 시팔 악법도 법이고 위선도 선이면 금룡퇴마검도 검이지. 부쩍 가까워진 솔음과의 거리에 사헌은 뻔뻔스레 검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움직이지 마! 한 발자국만 더 다가오면 진짜 부술 거야. 나, 카톡 다 봤거든. 그쪽 서장이 한 번만 더 기물파손하면 전원 시말서에 인력 보충 안해준다고 그랬지?"

"......"

"부서 전부 시말서 쓰고 싶어? 가성비 인사 운영으로 좆뺑이 치고 싶어? 어? 윗선한테 찍힌 부서돼서 미생 절망편 찍고 싶냐고!"

"알겠으니까 진정해."

"삼단봉 내려놔."


솔음은 시키는 대로 삼단봉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인질범을 달래는 협상가처럼 신중한 태도였다. 사헌은 솔음을 경계하며 탈출로를 확보하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느새 모인 인파가 솔음과 자신을 둥글게 빙 둘러싸고 있었다. 구경 났어? 꺼져! 자신과 솔음을 향한 렌즈에 사헌이 윽박질러도 사람들은 핸드폰을 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시발 진짜... 어떻게 일이 이렇게까지 안 풀릴 수가 있지. 너무 억울하고 황당해서 골이 다 아팠다. 혈압이 오르는 뒷목을 잡는데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그래. 에너지 보충은 해야지. 몸이 보내는 신호에 사헌은 마음을 다잡았다.


"봉투 던져."

"무슨 봉투."

"호두과자랑 버터알감자 들어있는 봉투, 나한테 던지라고."

"......"


솔음이 어처구니 없는 얼굴로 사헌에게 봉투를 던졌다. 봉투가 생각보다 가벼워서, 허공에서 잽싸게 봉투를 낚아챈 사헌은 주변을 둘러싼 인파 중 하나를 지목했다.


"이봐."

"네, 네?"

"저 인간 옆에 있는 자바칩 프라푸치노를 가져와."


얼떨결에 지목당한 여자는 어리둥절한 채 머뭇댔다. 빨리! 사헌이 윽박지르자 여자는 솔음이 바닥에 내려놓은 자바칩 프라푸치노를 서둘러 사헌에게 건넸다. 자바칩 프라푸치노까지 얻어낸 사헌은 천천히 뒷걸음질하며 이동했다. 솔음이 움직일 낌새를 보일 때마다 움직이지 말라며 호통치는 건 덤이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순조롭게 거리를 벌리고 사헌이 본격적으로 튈 각을 재던 순간, 솔음이 말했다.


"너 이거 두고 갔는데."


뭐? 대꾸하기도 전에 둔탁한 무언가가 안면을 강타했다. 따뜻한 음식의 온기와 고소한 버터 냄새가 촉각과 후각을 자극하는 동시에 선명한 통증이 얼굴을 덮쳤다. 오감을 강타하는 강한 충격에 사헌은 뒤로 고꾸라졌다. 길바닥에 힘없이 널브러진 사헌의 눈앞에 알감자가 도르륵 굴러갔다. 씨발 어째 봉투가 가볍더라... 욕을 짓씹는 사헌의 머리맡에 운동화가 멈춰섰다. 철컥. 또다시 수갑이 채워졌다. 사헌의 눈높이에 맞춰 쭈그려 앉은 솔음이 픽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러게 내용물을 잘 확인했어야지. 그리고 너 뭔가 큰 착각을 하는 모양인데,


"우리 부서 이미 찍힌 지 오래거든." 









(사기)꾼









"이야. 대단하네~"


달칵. 마우스 커서가 영상을 처음부터 재생했다. 모니터 속, 버터알감자가 든 용기가 완벽한 궤적을 그리며 도주하던 사헌의 안면을 강타했다. 그리고 또 달칵. 다시 안면을 강타하는 버터알감자를 보며 남자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또다시 달칵, 달칵, 달칵... 마우스 커서가 재생 버튼을 누를 때마다 모니터 속 사헌은 몇 번이고 버터알감자를 처맞고 바닥에 쓰러졌다. 이쯤되면 고의 아닌가. 사헌은 치밀어오르는 짜증을 삭히며 고개를 푹 숙였다.


"솔음아. 너 야구부였어? 던지는 폼이 장난 아닌데."

"아닙니다."

"너무 잘 던져서 계속 보게 된다 이거."

"......"

"어, 이거 인급동 들었는데? 지금 2위야."


남자의 말에 사헌은 번개처럼 고개를 들어 모니터를 봤다. ■■휴게소 난동 원본영상이라는 제목 아래, 영상 하단에 인기 급상승 동영상 2위라고 적혀 있었다. #■■휴게소 #버터알감자 #신비아파트 태그까지 읽어내린 사헌은 진심으로 담배가 말렸다. 모자이크 하나 없이 내걸려 영락없이 웃음거리가 됐으니까. 그나마 다행인 점은...



@otdnal34

사실상 고도의 버터알감자 바이럴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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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orhvmek

0:27 아니 경찰 얼굴 뭔데 개존잘 ㄷㄷ

👍 2.8천


@92jnds-Km-19mf

1:03 우리팀 투수들보다 제구력이 좋네

👍 1.9천

▲ 답글 39개

ㄴ ㅅㅂㅋㅋㅋㅋㅋㅋㅋㅋㅋ

ㄴ 실제 선수였으면 인기 ㅈㄴ많았을듯

ㄴ 와꾸 투구폼 제구력 피지컬 그 무엇하나 빠지지 않는 미학적 투구,, 당신이 있어야 할 곳은 칙칙한 경찰서가 아니라 바로 <한화이글스> 입니다,,,



대부분의 어그로가 솔음에게 끌렸다는 점이랄까. 솔음이 그 경찰, 존잘남 따위의 수식어로 댓글창을 장식할 때 솔음과 함께 얼굴이 팔린 사헌은 안대남, 알감자남, 금퇴남, 노상강도남 따위의 허접스러운 수식어로 불리고 있었다. 씨발... 역시 인생이란 존나게 불공평하구나. 와꾸면 다 되는 미친 세상이다. 사헌은 진심으로 하늘에 구멍이 나서 전부 망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일만 해결되면 전부 초상권 침해로 고소하겠다는 생각은 덤이었다.

사헌이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거나 말거나, 눈앞의 남자는 스크롤을 슥슥 내리며 댓글을 읽으며 말했다. 반응 장난 아닌데? 이러다 솔음이한테 너퀴즈 섭외 들어오면 어떡하지.


"라고 할 뻔?"

"......"

"......"

"...경위님, 잡담은 거기까지만 하시죠."


싸늘한 반응에도 최 경위는 굴하지 않았다. 알았어 재관아, 알았다니까. 재관의 지적에 그저 너털웃음을 짓고는 노트북을 자기 쪽으로 돌렸다. 노트북 후면에 붙은 경찰청 스티커가 눈에 들어왔다. 그제야 사헌은 자신이 경찰서에 잡혀왔음을 실감했다.


"으음, 암튼 그래서... 알감자, 아니 백사헌 씨?"

"......"

"지금부터 몇 가지 물어볼 건데, 순순히 잘 대답만 해주면 서로 얼굴 붉힐 일도 없고 좋겠죠?"

"......"

"왜 대답이 없지... 그쪽 눈알처럼 귀도 도박하다 팔아먹은 건 아닐 거 아냐."


최 경위의 말에 묵묵부답으로 응수하던 사헌이 흠칫했다. 눈에 띄게 딱딱하게 굳은 사헌의 얼굴을 살피던 최 경위가 옆으로 고갯짓했다. 단둘이 있게끔 나가보라는 의미가 담긴 몸짓에 재관은 발빠르게 움직였다. 경위님. 솔음이 최 경위를 불렀지만 최 경위는 고개를 저었다. 재관은 솔음에게 입모양으로 무어라 말하고는 취조실 밖으로 나갔다. 대충 나가자는 말인 것 같았다. 잠시 주저하던 솔음마저도 곧 재관을 따라 나갔다. 쿵.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적막이 내려앉았다. 알 수 없는 긴장감에 사헌은 고개를 숙인 채 무릎 위로 주먹을 꾹 쥐었다.


"가족관계가 좀 인상 깊던데. 백사헌 씨 숙부가 타짜로 이름 좀 날리던 백기훈이라면서요?"

"......"

"가업이 도박이에요? 백기훈 씨도 호 사장이랑 같이 일했던데, 백사헌 씨도 그러고 있네. 아, 백사헌 씨한테 별 유감은 없어요. 근데 그쪽네들이랑 친했던 호 사장이라는 인간한테 볼일이 좀 있거든 내가."


정수리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자신의 반응을 하나하나 평가하고 가늠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사헌은 동요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고개를 더욱 숙였다. 그 위로 차가운 목소리가 떨어졌다.


"호유원 어디로 튀었어?"

"몰라요."

"왜 몰라? 백사헌 씨 호 사장 전속 선수 아냐?"

"......"

"아니면 뭐, 그동안 호 사장 덕에 돈 좀 만졌다고 눈물겨운 의리 지키는 거야?"


돈 만지기는 무슨 버는 족족 뜯겨 피어날 일말의 의리조차 없었다. 사헌은 고개를 들어 최 경위를 응시했다. 눈이 마주치자 최 경위는 씨익 웃었지만 결코 호의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이 사람, 진짜다. 사헌은 DNA에 새겨진 본능으로 최 경위가 보통 인간이 아님을 직감했다. 꿀꺽. 침을 삼킨 사헌은 침착하게 말을 골랐다.


"저기,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요... 전 그 사람 밑에서 일한 게 아니라 채무 관계로 엮여 있었어요. 백기훈 그 인간이 살아있을 적 오케이머니 쪽에 빚진 게 저한테까지 넘어왔거든요. 제가 상환 능력이 없어서 못 갚으니까 호 사장이 하우스에서 평생 몸으로 때우라고 했던 거고."

"......"

"상식적으로 무급 노예로 평생 일하게 됐는데 지킬 의리가 어디 있어요? 전 말단이라 아는 것도 별로 없어서 탈주는 무슨 호 사장 부고 소식만 매일 기다리는데."

"음."

"저야말로 호 사장 잡히면 쌍수 들고 환영이거든요. 그래서 그쪽 끄나풀한테 다 불었는데 이런 식으로 의심하시면 곤란하죠. 내부고발자를 이렇게 대해도 되는 거예요? 경찰 무서워서 어디 제보 하겠나..."


자신은 돈을 받고 호 사장의 정보를 팔아넘겼을 뿐이고 그 정보를 사간 대상이 마침 잠입 경찰이었으니 결과적으로 보면 이것도 일종의 내부고발 아닌가. 사헌은 뻔뻔함으로 응수했다. 하지만 최 요원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래? 말단이라 아는 게 별로 없는데, 내부고발할 건덕지는 있어? 말의 앞뒤가 안 맞는 것 같은데?"

"제 숙부가 호 사장이랑 친분이 있었으니까요. 들은 얘기가 많거든요."

"뭐, 그럴 수도 있겠네. 그럼 휴게소에서 왜 도망쳤지? 내부고발과 수사에 적극 협조했다는 게 인정되면 경우에 따라 기소유예도 가능할 텐데. 백사헌 씨 말단이라며."

"그, 그건..."

"내 생각은 이래. 백사헌 씨는 사실 호 사장의 충직한 개였던 거지. 그래서 정보를 넘기는 척 우리 쪽에 접근해서 호 사장이 도망칠 수 있게 도왔던 거야. 그러다가 운 나쁘게 잡혀버린 거고. 그게 아니라면, 내부고발과 수사 협조로도 받을 수 있는 선처의 폭이 좁을 만큼 죄목이 무거워서 그런 건가? 하우스 운영의 핵심 역할을 했다거나."

"아, 아니라고요!"

"아, 그럼 애초에 내부고발을 하지 않았던 거네. 수사에 협조한 적도 없었고."

"......"

"정곡이야? 말이 없네."


젠장. 제대로 말렸다. 말문이 막힌 사헌이 헛숨을 삼켰다. 최 경위는 사헌의 대답을 촉구하지 않았다. 최 경위마저 입을 열지 않자 대화에 긴 공백이 생겼다. 탁. 사헌을 빤히 응시하던 최 경위가 노트북을 닫았다. 사헌은 몸을 움찔 떨었다. 최 경위는 가만히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 행동이 주는 심리적 압박감은 그 어느 때보다 무거웠다. 베팅 결과를 확인하기 전의 두근거림과 긴장을 닮은 압박감에, 사헌은 초조하게 입술만 짓씹었다. 어떤, 어떤 말을 해야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지. 도대체 어떤...

그 순간, 취조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최 경위와 사헌의 시선이 팽팽한 긴장감을 흐트려놓은 불청객을 향했다. 


"취조 중에 갑자기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꼭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뭔데."

"백사헌 씨, 내부고발자 맞습니다."


어? 사헌의 흔들리는 동공이 솔음을 응시했다. 눈이 마주치자 순간 복잡한 감정이 솔음의 얼굴에 스쳤지만 솔음은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사헌 씨가 휴게소에서 도주한 건 소통 과정에서 생긴 오해 때문이었습니다. 경찰서로 이송 후 이뤄질 조치에 대해 제가 제대로 설명하지 않아서..."

"솔음아."


이마를 짚은 최 경위가 솔음의 말을 끊었다. 너... 완성하지 못한 문장을 삼킨 최 경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나가서 얘기하자. 최 경위는 그 말만 남기고 솔음과 함께 취조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얼떨결에 취조실에 혼자 남게 된 사헌은 옆 벽면에 걸린 매직미러를 노려봤다. 참관실에서 저를 두고 무슨 대화를 할 지 모를 일이었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지? 당장이라도 감옥에 처넣을 것처럼 굴던 솔음이 나를 변호하다니. 뒷통수 후드려칠땐 언제고. 사헌은 주먹을 꽉 쥐었다. 하우스에 잠입해 주변과 자연스레 섞여야 하는 상황에서마저도 혼자 잘나신 신념 고고하게 지키던 김솔음이 뭐가 아쉬워서...

공범이 됐네요, 우리.

사헌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진짜로 그렇게 생각했다면 애초에 나를 체포하지도 않았겠지. 도망치게 해줘야 공범 아냐? 이렇게 우악스럽게 경찰서로 잡아넣는게 아니라. 사헌은 복잡한 머릿속을 끌어안고 마른세수를 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사헌이 믿을 구석은 전직 재떨이 포도이자 현재는 경찰인 김솔음 뿐이었다. 배신감은 일단 고이 접어두자. 사헌은 조용히 손을 모았다. 그리고 간절히 기도했다. 뭐가 됐든 저에게 이득인 쪽으로 해결되게 해주세요. 제발...

시계도 없는 삭막한 공간은 시청각적 자극도 없었다. 그래서 혼자 남은 사헌은 시간의 흐름을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멍을 때리며 몇 분인지 몇 시간인지 모를 시간을 흘려보냈다. 어느 순간 취조실의 문이 다시 벌컥 열렸다. 사헌은 허공을 응시하던 고개를 곧바로 돌려 누가 들어왔는지 확인했다. 최 경위였다. 최 경위는 방긋방긋 웃으며 사헌의 맞은편에 의자를 끌고 앉았다.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에 사헌은 긴장했다.


"사실관계 전부 확인했어. 오해가 좀 있었네."

"...!"


사헌은 놀라 조용히 숨을 들이마셨다. 최 경위는 이전보다 누그러진 태도로 사헌에게 설명했다. 잠입 수사관이었던 솔음의 확고한 증언이 있어 내부 고발 및 경찰 수사 협조가 충분히 인정될 것 같다고. 이어지는 설명을 듣던 사헌은 순간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어졌다. 멍한 얼굴로 가만히 앉아있는 사헌에게 최 경위의 갱생해서 남 등쳐먹지 말고 바르게 살라는 잔소리 따위는 들리지 않았다. 어딘가 멍해진 사헌에게 최 경위는 도박중독상담센터에 연락해 상담 일정을 잡게 했다. 폭풍과도 같은 조사과정이 끝나고 경찰서 밖으로 나왔을 땐 해가 져 있었다. 어둑어둑해진 밤거리를 허무하게 걸으며, 사헌은 발밑에 늘어진 그림자가 낯설다고 생각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정처없는 발걸음이 향할 곳은 없었다.


 *


결과적으로 사헌은 벌금을 냈다. 상습적인 도박 행위와 사기 도박에 관여했지만 내부고발과 수사 협조를 통해 공범 검거에 실질적으로 기여한 점이 참작된 결과물이었다. 함께 잡혔던 동식과 은혜를 비롯한 하우스 일당들이 전부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선처에 가까운 처사였다. 하지만 사헌은 좆같았다. 벌금형은 과태료나 범칙금처럼 고지서 날아오면 인상 찌푸리며 지갑 아파하고 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벌금형 또한 형벌이라 전과로 남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잘 먹고 잘 사는 인생에 한 발짝 멀어져 전과범이 된 사헌은 하우스에서 일하며 호 사장 몰래 꽁쳐놨던 돈으로 반지하를 구했다. 벌금을 내고 집까지 구하니 그동안 없는 살림 털어서 모은 돈은 전부 축나 개털이 됐다. 인생을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했지 통장 잔고가 제로부터 시작하는 인생 그딴 걸 원한 적은 없었는데.

한 가지 다행인 점은 사헌의 빛(원금만) 1억 4천 중 1억은 흐지부지 됐다는 것이다. 사실 숙부의 빚 1억은 법적으로 상속 포기까지 완료되어 상환 의무가 없었지만, 그동안 오케이머니 쪽에서 길 잃은 채무를 사헌에게 억지로 뒤집어씌워 각서를 쓰게 한 뒤 착취하고 있었던 것일 뿐이었다. 호 사장이 종적을 감춘 지금, 대가리가 사라진 오케이머니는 공권력에 의해 탈탈 털리고 있었고 그 배후에 있는 백일몽파까지 위태롭게 흔들리는 상황 속에서 일개 소시민인 사헌의 억지 채무를 이행하라며 불쑥 찾아와 난동부릴 사람은 없을 게 분명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인 점은 사헌에게는 2금융에서 대출한 4천만원(현재는 이자가 붙어 그 이상이 된)의 빚이 여전히 남아있다는 것이다. 1억이라는 터무니없는 금액을 황급히 수습해보고자 덜컥 손을 댔던 도박. 나중엔 빚이고 뭐고 그냥 돈 따먹고 싶어서 눈 벌게져 베팅 버튼만 연타했으니, 탐욕에 눈 먼 손가락이 부른 대참사라고 말할 수밖에.

그래서 여전히 돈이 많이 필요했다. 그러나 이전처럼 도박에 손을 댔다간 진짜 수렁으로 빠질 것 같아서 번듯한 직장을 구하려고 보니 사헌이 낸 벌금이 범죄경력자료에 주홍글씨처럼 남아 취업길을 막았다. 그러다보니 남는 선택지가 별로 없었다. 숙부의 빚을 근로소득으로 갚으려 했던 그 시절처럼 사헌은 쓰리잡을 뛰기 시작했다. 돈 벌 시간도 없어서 도박중독치료센터는 첫날에만 가고 다음 상담 예약은 잡지도 않았다. 주중엔 건설현장에서 먼저 뒤집어쓰며 허리 빠지게 시멘트 옮기고 주말 낮엔 편의점에서 바코드 찍다 밤엔 피시방에서 라면 끓이며 불철주야 일했다. 그렇게 남은 수명마저 풀로 땡겨 쓰며 일하던 어느 날, 사헌은 결국 몸살이 나 앓아누웠다. 안 쑤시는 곳이 없는 몸뚱이로 눅눅한 반지하 바닥에 누워 출근을 독촉하는 문자들과 부재중 전화 목록을 읽어내려가던 사헌은 조용히 생각했다.

딱 한 번만 더 해보자.

진짜 딱 한 번만 더 해보고 안되면 다시 일하자.

작은 실금이 견고한 성벽을 무너뜨리는 법. 불쑥 고개를 든 생각은 걷잡을 수 없게 번져 머릿속을 지배했다. 사헌은 홀린 듯이 탈퇴했던 사설 도박 사이트에 재가입했다. 그래, 작게 100만원만 하자. 떨리는 손가락이 익숙한 화면을 지나 입금 버튼을 눌렀다. 포인트가 충전되고 사헌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렇게 선택한 종목은 바카라. 사헌은 담배를 입에 물고 깊게 빨아들였다. 뱅-플-뱅-플-플로 흘러가던 방이었다. 탈까? 꺾을까. 핸드폰 화면을 응시하며 고민에 빠졌다. 뱅커에 50 베팅. 꺾자. 곧 플레이어에게 숫자 5가 떨어졌다. 음. 사헌은 연기를 길게 뱉었다. 그리고 뱅커에 숫자 7. 아싸. 미소가 저절로 나왔다. 하지만 안도하긴 아직 이르다. 플레이어에게 숫자 3이나 4가 뜬다면 좆된다. 사헌은 화면을 노려봤다. 플레이어에게 숫자 3이 떨어졌다. 씨발! 사헌은 욕을 씹으며 이마를 짚었다. 아냐, 아냐. 뱅커한테 2가 뜰 수도 있는 거잖아? 제발, 제발.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입 안에서 담배가 뭉개지든 말든 사헌은 입술을 꽉 깨물고 두 손을 모았다. 한 번만 제발요. 진짜 한 번만. 신이 있다면...

적막이 흐르는 방 안 심장만 쿵쿵 뛰는 가운데, 화면 속 딜러가 패를 뽑았다. 뱅커에 숫자 2. WIN이라는 글자가 화면 한가운데를 가득 채웠다. 아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허공에 주먹질했다. 기적과도 같은 9대 8 승리에 도파민이 싹 돌았다. 흥분을 감추지 못한 손은 다시금 화면을 터치해 베팅을 했다. 그렇게 먹고 먹히는 게임을 반복하다보니 시드머니가 쌓여 어느새 처음 충전했던 백만원은 2천 5백만원이 되어 있었다. 격양된 감정을 이기지 못한 손이 자꾸 떨려 사헌은 돈을 출금하는 동안에도 헛손질을 몇 번 했다. 그날 밤 사헌은 잠에 들지 못하고 침대에 가만히 누워 은행 어플을 자꾸만 들락날락했다. 단 세시간 만에 통장에 찍힌 금액에 심계항진이 온 것처럼 가슴이 자꾸만 두근거렸다.

거 봐. 된다니까? 하면 된다고. 이렇게 쉽게 벌 거 뭣하러 좆빠지게 일을 해? 내일 아침에 다 관두겠다고 연락 싹 돌려야지. 조금만 더 해서 딱 빚 갚고 여유 자금 생길 때 까지만 적당히 불리고 손 떼야겠다. 호기로운 목표를 세운 사헌은 그 다음 날부터 전업 생계형 바카라꾼이 됐다. 손해 보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베팅하고 나름의 계산을 통해 합리적으로 도박을 했다. 그렇게 돈이 야금야금 불어나 어느새 5천만원이나 생겼다. 무턱대고 돈을 꼴아박은 지난 번과는 분명 달랐다. 자신은 도박 충동을 잘 조절하고 있었고 원하는 액수의 시드머니만 모으면 언제든지 손을 털고 떠날 자신이 있었다. 적어도 사헌은 그렇게 생각했다.


시드로 천오백 충전. 뱅커에 오백 베팅. 어느새 씀씀이가 커진 사헌은 다리를 달달 떨며 담배를 질겅질겅 씹었다. 게임이 시작되고 카드가 깔렸다. 플레이어의 앞에 2. 뱅커에 Q. 사헌은 가만히 다음 카드 오픈을 기다린다. 이윽고 플레이어에 7, 뱅커에 J. 씨발... LOSE라는 글씨가 화면을 가득 채웠다. 사헌은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신경질적으로 재떨이에 비벼 껐다. 괜찮아. 이제 오백 쯤은 타격도 없다.

굴하지 않고 게임을 이어나갔다. 플레이어에 500 베팅했으나 플레이어 도합 3, 뱅커 도합 4로 1점차로 죽었다. 그 다음엔 뱅커에 500 베팅했고 플레이어 내추럴 8 뱅커 4로 죽었다. 그렇게 시드로 충전했던 천오백이 순식간에 오링났다. 씨발! 순간 열이 확 올라 사헌은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괜찮아. 아직 3천 5백 남았어. 사헌은 주저하지 않고 남은 돈을 모조리 충전했다. 첫 시작이 100만원이었는데 그걸 5천만원으로 불렸으니까, 이 정도 손실 쯤이야 남은 3천 5백으로 충분히 커버 가능할 뿐더러 오히려 돈을 더 따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계속되는 게임에서 사헌은 내리 졌다. 막 바카라를 다시 시작했을 무렵 무서울 정도로 돈을 따내던 그 기세는 찾아볼 수 없었다. 지지부진한 패배와 간헐적인 승리로 돈이 찔끔찔끔 새어나가고 있었다. 불어날 기미가 없는 잔고에 조바심이 났다. 계속되는 패배에 소심하게 베팅을 하니 승리를 해도 떨어지는 돈이 얼마 안 됐다. 이대로 가면 전부 잃을 게 분명했다. 그때 생각 하나가 머릿속을 스쳤다.

어차피 잃게 될거면 그냥 통 크게 베팅해서 쇼부를 보는 게 낫지 않나.

숙부에게 물려받은 승부사 기질이 발동하는 순간이었다. 손가락이 저절로 움직였다. 사헌은 충동적으로 남은 잔액 전부를 플레이어에 베팅했다. 게임이 시작되고, 딜러가 카드패를 열었다. 플레이어에 J가 깔리고, 뱅커에도 J가 깔렸다. 하. 한숨을 내쉰 사헌이 화면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제발 플레이어에 8. 아니면 9라도. 기도문처럼 작은 중얼거림이 잇새로 새어나왔다. 이윽고 카드가 뒤집어지며 플레이어의 카드가 오픈됐다. 3. 씨발. 탄식을 품은 숨이 터졌다. 아냐, 뱅커, 뱅커한테 3보다 작은 숫자가 나오면 괜찮아. 제발... 화면 속 딜러가 능숙한 손놀림으로 카드를 집었다. 사헌은 침을 꿀꺽 삼켰다. 뱅커의 카드가 뒤집어졌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8.

어? 관자놀이를 오함마로 후두려맞은 듯한 충격이 일었다. 사헌은 멍하니 LOSE가 뜬 화면을 응시했다. 0이 된 잔고를 보니 5천만원을 단 몇 시간 만에 전부 꼴아박았다는 자각이 찾아왔다. 그 어떤 감정도 들지 않는 자리엔 무력감만이 찌꺼기처럼 가라앉았다. 사헌은 그렇게 세션이 만료되었다는 안내창이 뜰 때까지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새벽의 어스름이 살그머니 열린 암막커튼 틈으로 새어들어왔다. 사헌은 그제서야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동이 트고 있었다. 자정에 시작했던 도박은 동틀 때가 되어서야 모든 것을 앗아간 채 막을 내린 것이다.

아 씨발 좆됐다...

뒤늦게 밀려온 깨달음에 사헌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이제 어떡하지. 쓰리잡 뛰며 겨우 땡겼던 돈도 전부 잃었다. 암담한 현실에 바싹 건조해진 얼굴을 두 손으로 마구 쓸어보는데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어제 오후부터 끼니도 거르고 모니터만 들여다본 몸뚱이가 살려달라고 몸부림치고 있었다. 하. 사헌은 속에서 울컥울컥 치미는 신물을 삼키며 바닥에 철푸덕 누웠다. 진짜 죽고 싶었다.


*


하지만 사헌은 죽지 않았다. 죽을 용기도 없고 그럴 기력도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츄리닝 바지 주머니에 있던 꾸깃꾸깃한 만 원 지폐를 들고 집 근처 모텔촌에 위치한 24시간 해장국집에 갔다. 물가가 터무니없이 올라 뼈해장국이 만 원이었다. 사헌은 그렇게 마지막 전재산인 만 원을 뼈해장국과 맞바꿨다.

이른 아침의 식당에는 꼬질꼬질한 낯으로 국물만 퍽퍽 떠먹고 있는 대학생 몇몇과 얼굴이 벌건 아저씨 서너 명이 수육에 빨뚜를 까고 있었다. 그 가운데 혼자 앉아있는 사헌은 닳고 닳은 얼굴로 벽면에 걸린 TV 화면을 응시했다. 이름 모를 종편 채널에서 유명 토크쇼 프로그램을 재방송하고 있었다. 네모난 뿔테 안경을 쓴 국민 MC가 게스트를 소개하려는데, 어느새 다가온 종업원이 TV 화면을 가렸다. 종업원이 무심한 손길로 뚝배기와 석박지를 툭툭 내려놓는 동안 사헌은 스테인레스 컵에 찬물을 따라 마셨다. 혀에 닿는 차가운 컵의 표면에서 은근한 쇠맛이 났다.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세간의 화제였죠. ■■휴게소 난동을 버터알감자로 제압한 경찰관! ●●경찰서 형사 1팀 소속 김솔음 순경입니다.]


 푸흡. 스프링쿨러처럼 입에서 물이 뿜어져 나왔다. 질색의 시선이 달라붙었지만 신경조차 쓰이지 않았다. 김솔음 니가 왜 거기서 나오는데 씨발. 사헌은 턱에 뚝뚝 떨어지는 물을 옷소매로 대충 훔쳐냈다. 그러는 동안 토크쇼는 자료화면으로 전환됐다. 영상 속의 솔음이 그린 듯한 폼으로 버터알감자를 던졌다. 버터알감자가 든 용기가 모자이크가 된 사헌의 얼굴에 명중하는 것을 끝으로 화면이 다시 전환됐다. 이런 개씨발... 조사 끝나고 저 영상들을 초상권 침해로 하나하나 신고하고 다니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사헌은 진심으로 잊힐 권리를 주장하고 싶어졌다.

TV 속 솔음은 다소 긴장한 듯 얼굴이 굳어 있었지만 차분하고 성심성의껏 인터뷰에 응했다. 잘생긴 외모로 화제가 된 걸 알고 있냐는 말에 머쓱한 미소를 짓기도 했다. 그 모습은 어두침침한 하우스에서 담배 심부름이나 하던 포도가 아니었다. 사헌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이상하게 속이 뒤틀렸다. 더는 TV를 보고 싶지 않아진 사헌은 뚝배기로 시선을 옮겼다. 뜨뜻미지근하게 식은 뼈해장국. 뻘건 기름처럼 올라오는 씁쓸함에 사헌은 거친 손길로 밥을 말았다. 해장국을 수저 가득 듬뿍 떠서 아무렇게나 입에 쑤셔넣으려는데,


"백사헌?"


낯선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뺀질뺀질한 남성이 서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사헌은 눈을 게슴츠레 떴다. 누구세요. 야, 나 몰라? 윤희건. 이름을 들어도 기억이 날랑말랑 희미했다. 여전히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사헌에게 희건이라는 남자가 덧붙였다.


"우리 옆집 살았잖아. 모란 아파트. 기억 안 나냐?"

"아."


고등학교 2학년 때 반년 정도 살았던 아파트의 이름이었다. 그러고보니 옆집에 동갑인 남자애가 살았던 것도 같았다. 같은 반이라서 등하교를 같이 했었던 것도. 물론 숙부가 타 지역으로 무대를 옮기며 이사하는 바람에 1년도 못 채우고 허겁지겁 전학갔지만. 기억을 더듬던 사헌은 눈앞에 서 있는 남자를 올려다봤다. 기억 속의 희건과는 사뭇 다른 얼굴이었다. 뭔가... 고딩 때의 희건은 좀 더 흐릿하고 이목구비의 조화가 자유분방했는데, 현재의 희건은 이목구비가 정갈해졌지만 조형과 배치 면에서 인공적인 위화감을 풍겼다. 의심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사헌에게 희건은 차가운 수술대에 몇 번이고 몸을 뉘였음을 고백했다. 그래.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수준이면 대공사는 필수지. 납득한 사헌은 고개를 끄덕였다.


"야, 암튼 되게 반갑다. 이게 몇 년만이냐?"

"...뭐, 오랜만이긴 하지."


사헌은 대충 대꾸했다. 희건은 실실 웃으며 사헌의 맞은편에 앉았다. 이모 저도 뼈해장국 하나요. 천연덕스럽게 음식을 주문하고는 수저통에서 수저를 꺼냈다. 오랜만에 만난 동창이었지만 사헌은 전혀 기껍지 않았다. 그냥 혼자 있고 싶었다. 사헌이 그러거나 말거나 희건은 어제도 본 사이마냥 친근하게 굴었다. 그 얼굴에 대고 혼자 패배감에 젖어 있고 싶으니 꺼지라고 호통칠 기력도 없어서, 사헌은 그냥 희건이 말을 걸도록 내버려 두었다.


"너 어떻게 사는지 존나 궁금했었는데. 그렇게 전학 가버리고 나서 연락도 다 끊어버렸잖아 너."

"......"

"근데 씹, 니가 유튜브에 나오더라? 나 존나 놀랬잖아 진짜."


씨발. 수저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사헌은 디지털 미디어 시대의 빛처럼 빠른 정보 확산 속도와 그 영속성에 다시금 환멸을 느꼈다. 지워도 지워도 사라지지 않는 낙인 같았다.


"안 체포되고 잘 풀렸나보네? 다행이다 야. 근데 너 안대는 왜 끼고 있는 거냐? 다래끼라도 났어?"

"뭔 질문이 이렇게 많아? 하나만 해."

"새끼, 예민하긴. 그럼 요즘은 뭐 하고 사냐?"

"그러는 닌 뭐 하고 사는데."

"응?"

"뭐하고 살길래 와꾸 대공사 5번이나 하면서 명품 걸치고 사냐고."


사헌은 희건의 손목에서 빛나고 있는 시계를 턱짓했다. 아아 새끼 보는 눈은 있어가지고. 느물느물 웃은 희건이 보란 듯 사헌에게 손목을 내밀었다. 명품을 잘 모르는 사헌도 들어본 적이 있는 고가 브랜드의 시계였다. 씨바 어쩌라는 거지 지금 거지 놀리나. 지난 새벽 동안 5천을 날려먹은 사헌의 안면근육이 썩어들어갔다. 그런 사헌의 표정을 찬찬히 살피던 희건이 툭 뱉었다. 그냥 뭐, 서비스업. 사헌은 비웃었다.


"서비스업 이지랄. 누굴 등신으로 아나."

"......"

"선수지? 호빠. 사이즈 보면 각 나오는데 어디서 구라를..."

"하하. 백사헌 니는 진짜 못 속이겠다."


희건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뭐, 비슷해. 그냥 누님들 초이스 받아서 룸에서 술 좀 마시고 재롱 떠는 거지. 걍 눈 딱 감고 시키는 거 넙죽넙죽 하면 몇 십이 뭐야 몇 백이 그냥 꽂혀. 물주 잘 만나서 공사치면 더 받고. 이것도 손님이 준 거야.


"솔직히 이 정도 돈 버는 일도 없다."

"....."

"니 돈 필요하지? 그래 보이는데."

"내가 돈 필요한지 니가 어떻게 알아."

"얼굴에 써 있구만, 우환 있다고. 세상 일이라는 게 둘 중 하나지. 돈으로 해결 가능하거나, 돈으로 해결이 안 되거나. 근데 후자는 보통 액수가 모자른 거거든."

"......"

"생각 있냐? 있음 소개시켜 주고. 마침 실장님이 새 얼굴 필요하다고 하더라."


사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는 사헌과 희건 사이에 종업원이 공깃밥과 뼈해장국을 툭 내려놓고는 가버렸다. 고개를 처박은 채 뼈해장국을 푹푹 떠서 먹는 희건의 정수리 뒤로 TV 화면 속 사람들이 움직였다. 사헌은 화면을 뚫어질 듯 응시했다. 휴게소 난동을 벌였던 이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냐는 MC의 질문에 솔음은 잠시 말이 없었다. 내게 하고 싶은 이야기? 질문조차 조롱처럼 느껴져 사헌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때까지 가만히 눈을 내리깔고 있던 솔음이 불현듯 카메라를 똑바로 응시했다. 굳게 다물고 있던 입술이 열렸다.


[없습니다.]


대신 서장님께 드릴 말씀을 남겨도 될까요? 정중하게 묻는 솔음에 MC는 얼마든지 하라고 말했다. 성과 향상을 위해 형사 1팀이 많은 노력을 하고 있으니 잘 부탁드린다고 말하는 솔음의 얼굴 아래로 To. 방국봉 경찰서장님께... 라는 샤랄라한 자막이 떴다. TV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사헌을 희건이 힐끔댔다.

토크쇼는 어느새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너퀴즈? 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솔음의 깔끔한 얼굴이 클로즈업 됐다.


[이것은 조선 시대 치안을 담당했던 기관으로, 현재의 경찰공무원을 지휘, 통솔하는 경찰청과 비슷한 역할을 했습니다. '굶주리면 먹고 살기 위해 범죄도 불가피하다' 라는 의미를 가진 속담 '목구멍이 ○○○'에도 언급되는 이 기관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포도청입니다.]

[포도청, 정답입니다!]


문제 졸라 쉽네 씨발. 화면 속 솔음이 100만원이 든 봉투를 받으며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사헌은 인상을 구겼다. 100만원을 거저 받네. 진짜 돈 필요한 사람은 여기 있는데. 사헌은 애써 시선을 돌렸다. 제 앞에 놓인 식어빠진 해장국을 노려보았다. 아 씨발 왜 이렇게 기분이 더럽지. 속이 얹힌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아디다스 걸친 재떨이였던 포도. 깔끔한 제복을 입고 너퀴즈에 나온 경찰 김솔음. 같은 구질구질한 밑바닥 인생인 줄 알았더니 다른 차원에 살고 있는 인간이었다. 돈 때문에 개처럼 빌빌대며 살던 내가 얼마나 한심해 보였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소주가 땡겼다. 그러나 사헌은 곧 마지막 남은 만 원으로 해장국을 시켰음을 상기했다. 24시간 해장국집에서 소주 살 돈도 없이 청승이나 떨고 있는 제 꼬라지가 우스워졌다. 그깟 돈. 고작 돈 때문에...

그럼 씨발 존나 벌어주면 되잖아. 남들이 무시 못할 정도로 벌어서 떵떵거리면서 살면 될 거 아냐. 울컥 치미는 생각에 사헌은 고개를 들었다. 뼈해장국을 쩝쩝대는 희건에게 비장한 투로 말했다.


"그 실장이라는 인간, 소개시켜줘."


*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희건은 자신이 일하는 가게로 사헌을 데려가 실장이라는 남자에게 사헌을 소개시켜줬다. 피곤해 보이는 인상의 실장은 사헌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쓱 훑더니, 눈깔이 왜 그 모양이냐고 물었다. 사헌은 곤란한 듯 미소지으며 사고 때문에 눈 하나를 잃었다고 둘러댔다. 사헌의 대답에 실장은 팔짱을 끼고 사헌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그리고는 큼지막한 손으로 사헌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안대 끼니까 사연 있어 보이고 좋네. 원래 구김살 있는 놈이 잘 팔려.


"여자들은 서사를 좋아하거든."


사헌은 그냥 웃기만 했다. 실장은 사헌에게 특기가 있냐고 물었다. 할 줄 아는 거라고는 얍삽한 손기술 뿐이라 사헌은 카드게임을 잘한다고 말했다.


"아니 그런 거 말고. 노래 실력이 좋다거나 술을 잘 마신다거나 입을 잘 턴다든가, 그런 거 말야. 너 같이 쥐뿔도 없는 새끼들을 돈 줘가면서까지 옆에 앉힐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너 룸에서 카드나 까고 있을래? 와꾸 좀 봐줄만 하다고 안심하면 안 되는 거야 사헌아. 매력이 있어야지."


그래서 사헌은 다시 생각했다. 하우스의 개진상들을 어르고 달래가며 귀가시켰던 세월을 떠올렸다. 비위를 잘 맞추는 것 같다고 했더니 실장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앞으로 사헌이 할 일과 수익 분배에 대해 설명했다. 티씨는 5. 찡은 티씨에서 1를 뗄 거고, 이제 가명을 정해야 하는데...


"허니 어때. 백사헌이. 허니."

"......"


이때만큼은 표정관리가 안 됐다. 사헌의 떫은 얼굴을 본 실장은 손님을 보고 초이스를 받기까지의 시간이 매우 짧기 때문에, 손님의 인상에 깊게 남을수록 초이스를 받을 확률이 올라간다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실장의 우락부락한 팔뚝에는 무시무시한 이레즈미가 그려져 있어서, 사헌은 차마 개좆같은 이름 집어치우라고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백사헌은 꼼짝없이 허니가 되었다...


*


사헌이 호빠에서 선수로 뛰며 스스로에 대해 새롭게 알게된 게 있다면, 바로 자신이 이 일에 꽤 재능이 있다는 점이다. 어릴 적부터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눈칫밥 주워먹으며 자랐던 성장환경이 손님의 니즈를 파악하고 비위를 맞추는 일에 안성맞춤이었던 것이다. 손님이 흘리듯 뱉은 말에서 외로움을 읽으면 정서적 위로를 건넸고 충혈된 눈에 쌓인 스트레스를 발견하면 곧바로 신나는 노래에 템포 올려서 재롱을 떨었다. 그러면 돈이 손쉽게 주머니에 꽂혔다. 빚을 메꾸려고 발악하던 그 시절이 우스워질만큼.

 자고로 사람의 마음을 열게 하는 건 호감이고 지갑을 열게 하는 건 동정심이다. 사헌은 자신의 어떤 면을 어필해야 손님이 지갑을 여는지 잘 알았다. 안 빼고 시키는 거 열심히 하는 자아 없는 키링남. 근데 이제 가슴 아픈 과거사를 가지고 있는... 세기초 유행하던 멜로드라마의 캔디형 여주를 성별만 리버스한 설정값의 사헌은 인기가 많았다. 특히 연상에게. 사헌을 자주 지명했던 새림의 말에 따르면 어딘가 사연이 있는 듯한 안대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사근사근 웃는 얼굴이 시너지를 일으켜, 연상 여성으로 하여금 이 무능력한 연하키링남을 부양해야만 한다는 의무감을 품게 만든다고 했다. 욕인지 칭찬인지 모를 말에도 사헌은 방긋 웃으며 대꾸했다. 그런가요 저 누나 없으면 어떡하죠 정말.

사헌을 거쳐간 많은 손님들 중 사헌이 공을 들이는 손님은 둘이었다. 신새림과 배인서. 둘 다 돈이 많은 연상의 여성으로, 둘은 친구 사이였다. 특히 새림은 사헌이 선수로 일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사헌을 지명했던 손님이었는데, 어떻게든 초이스를 받기 위해 식은땀 흘리는 사헌을 빤히 바라보던 새림은 안대가 인상 깊다며 사헌을 초이스했다. 그런 새림에게 인서는 안대 낀 게 븅신 같다며 꼽을 줬지만 새림은 이렇게 응수했더랬다.


"그래서 귀엽잖아."


원래 귀여워 보이면 끝난 거다. 사헌은 그 말에서 가능성을 읽었다. 새림에게 빨대를 꽂을 수 있겠다는 가능성. 그래서 최선을 다해 새림에게 서비스했다. 그 노력이 가상했는지 새림은 그 날 사헌의 번호를 따갔다. 놀라운 점은 시종일관 사헌의 꼬라지를 보며 내내 인상을 구기고 있던 인서도 사헌의 번호를 따갔다는 점이다. 사헌의 어느 점이 깐깐한 그녀의 마음을 흔들었는지는 여전히 모를 일이었지만 사헌에게는 잘된 일이었다. 공사칠 사람이 둘이니 돈도 두 배로 뜯을 수 있으니까.

새림과 인서는 친구였지만 사헌을 대하는 태도가 매우 달라서, 사헌은 둘을 대할 때마다 자아를 열심히 갈아끼웠다. 새림은 사헌의 고분고분하고 자아 없는 태도를 좋아했는데, 사헌의 박복하고 고달픈 삶에서 우월감을 충족하는 스타일이었다. 반면 인서는 사헌이 능동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외로움을 달래주길 바랬다. 한마디로 감정 쓰레기통이었다 이거다. 둘을 비교하자면 신체적 피로도는 새림이 높았고 정신적 피로도는 인서가 높았다. 하지만 참고 참을수록 짭짤한 보상이 돌아왔으니 감쓰짓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사헌은 양다리를 걸쳤다. 돈을 더 많이 벌고 싶었기 때문이다. 새림과 인서 사이에서 위태로운 외줄타기를 하며 돈 좀 땡기고 빚을 다 갚은 뒤 홀연히 사라질 생각이었다. 분명 그럴 생각이었는데...

어느 날, 사헌은 새림에게 룸으로 튀어나오라는 문자를 통보받았다. 물주가 오라면 넙죽 가야지. 오후 늦게까지 반지하에 늘어져 토토나 하던 사헌은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향한 룸에는 인서가 함께 있었다.





룸 안을 감도는 심상찮은 분위기. 문을 열고 들어온 사헌에게 레이저처럼 따가운 두 개의 시선이 꽂혔다. 본능적으로 뒷걸음질했으나 이리 와서 앉으라는 새림의 단호한 말에 사헌은 주춤대며 자리에 앉았다. 폭풍전야와도 같은 침묵에 사헌은 두 손을 얌전히 모으며 고개를 떨궜다. 씨발 들켰구나. 사위에 깔린 살벌한 정적이 사헌의 짐작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마주 잡은 손바닥에 식은땀이 배어나오기 시작했다. 말없이 죄인처럼 고개만 떨구고 있는 사헌에게 새림이 말했다. 사헌아 뭐해. 누나들 지금 텐션 떨어졌잖아.


"좀 재밌게 놀아봐."

"네, 네..."


사헌은 시키는 대로 노래방 리모컨을 들었다. 인기 차트를 선택하고 노래를 고르는데 자꾸만 덜덜 떨리는 손가락이 미끄러져 시작 버튼을 눌러버렸다. 신나는 디스코 하우스 풍의 전주가 싸늘한 룸 안에 흐르기 시작했다.


"아... 씨발 지금 노래 부를 때야?"


열 뻗친 얼굴로 앉아 있던 인서가 사헌에게 쏘아붙였다. 사헌은 눈치껏 노래방 리모컨을 들어 취소 버튼을 누르려고 했다.


"노래 끄지마."

"네?"

"내가 끄지 말라고 했다."


새림이 냉기 어린 목소리로 읊조렸다. 사헌은 겁에 질려 다시 리모컨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인서의 목소리가 커졌다. 노래 꺼 씨발새끼야. 끄지 말라고. 노래 끄라고. 끄지마. 꺼. 끄지마. 노래 가만히 두지말고 꺼. 호랑이 같은 기백의 여성 둘 사이에서 사헌은 공포의 청기백기를 했다. 신경전이 길게 이어지는 동안 흥겨운 전주도 둠칫둠칫 흘러갔다. 팽팽해진 알력다툼을 깬 건 인서였다.


"신새림! 난 널 믿었던 만큼 내... 아니, 니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야, 내가 할 말이야. 안대 써서 븅신같다고 할 땐 언제고 뒤에서 바람을 펴?"

"바람? 하, 바람은 니랑 백사헌이 한 게 바람이고."

"지랄하네 씨발. 얘, 내가 먼저 초이스했어. 내가 먼저라고."


흔들리는 우정을 목격한 사헌의 동공도 함께 흔들렸다. 금방이라도 서로의 머리채를 잡고 개싸움으로 돌입할 것만 같은 분위기에 사헌은 쥐 죽은 듯 자리에 조용히 구겨져 있었다. 그래, 그렇게 둘이 싸워라. 사헌은 기회를 봐서 몰래 빠져나갈 생각부터 했다. 그러나 인서의 매와 같은 시선이 소파 틈으로 조용히 스며들고 있던 사헌을 발견했다.


"야 개사헌! 너 누구 편이야? 누가 니 여친이냐고!"

"저, 저는..."

"그래 나도 궁금하네. 누가 니 여친이야? 어디 한번 들어나 보자."

"그, 그게..."


빨리 말해! 말을 더듬는 사헌에게 새림이 윽박질렀다. 금방이라도 싸대기를 후릴 듯 서슬 퍼런 기색에 사헌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되는 대로 지껄이기 시작했다. 지 진정하세요 두 분 다 제겐 정말 소중한 분들이시고 저는 매 순간 진심이 아니었던 적이 없어요 누나 아시잖아요 (어떤 누나 씹새끼야) 두 둘 다요 저 진짜 누나들 아니었음 그냥 개털이에요 빚 못 갚고 그냥 객사했을 인생 구제해주셔서 늘 감사하며 살고 있어요 저 진짜 두 분께 온전히 진심을 바쳤어요 믿어주세요 (그럼 씨발 폴리아모리냐? 뒤질래?) 아니 전 그냥 매 순간에 최선을 다했다는 말이었어요... 혼신의 힘을 다해 주절거리는 사헌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인서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불끈 솟았다.


"인서야. 우리끼리 싸울 이유가 없어."


싹싹 비는 사헌을 싸늘하게 내려다보던 새림이 말했다. 그 말에 인서도 어떠한 깨달음을 얻은 얼굴을 했다. 공동의 적이 누구인지 깨달은 자들의 기묘한 연대. 사헌은 본능적으로 지금이 도망쳐야 할 타이밍임을 깨달았다. 벌떡 일어나 룸을 뛰쳐나가려는 뒷덜미가 부여잡혔다. 강한 힘이 사헌의 상체를 테이블 위로 내리꽂았다. 쨍그랑! 테이블 위에 차려진 술병과 안주가 담긴 그릇들이 바닥으로 추락하며 박살이 났다. 씨발 무슨 힘이 이렇게...! 당황할 틈도 없이 새림이 바닥을 구르던 위스키 병을 집었다. 그리고 벽에 거칠게 내리쳤다. 와장창 소리와 함께 위스키 병이 깨지며 날카로운 단면을 드러냈다.


"사헌아. 누나가 깽값 후하게 쳐줄게. 이 꽉 물어."


흉기를 든 채 새림이 천천히 다가왔다. 그 광경을 올려다보는 사헌의 창백한 안색 위로 그림자가 졌다. 겨우 쥐어짜낸 건 한마디였다.

살려주세요.


*


"음, 그러니까... 양다리를 걸쳤고, 그것 때문에 화가 난 두 분이 백사헌 씨를 폭행했다는 얘기죠?"

"...네."


도떼기 시장마냥 번잡스러운 경찰서 한가운데, 널브러진 취객들 사이에 앉은 사헌은 한숨을 내쉬었다. 돌고 돌아 또 경찰서에 왔다. 사헌은 얼굴이 홧홧해지는 걸 느끼며 시선을 내렸다. 조서를 작성하던 단발머리 경찰의 옷에 부착된 명찰을 읽었다. 고영은. 단정한 얼굴로 노트북에 타이핑하던 영은이 그런 사헌을 힐끔 바라보다, 사헌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정장을 빼입은 남자 둘. 새림과 인서의 변호사였다.


"이 경우엔 단순폭행으로 갈 확률이 높아요."

"네? 깨진 술병으로 위협했다니까요! 절 진짜 죽이려고 했어요!"

"깨진 술병으로 위협했다고 하셨는데, 실제 폭행은 주먹으로 이루어졌고 사헌 씨의 피해 정도가 경미한 찰과상이라서요. 상해진단서가 있으면 상해죄로도 인정받을 순 있긴 하겠지만..."

"그 정도 상처로는 상해진단서를 잘 안 끊어줍니다. 백사헌 씨, 합의하시죠."

"합의 여부는 피해자가 알아서 결정할 일이에요."


합의를 권유하는 변호사의 속삭임을 영은의 단호한 목소리가 끊어냈다. 사헌은 가만히 바닥을 노려봤다. 금방이라도 멱을 딸 것처럼 굴었지만 눈에 안 보이는 곳만 교묘하게 두들겨 팬 걸 보니 다 생각이 있었구나. 이 악마같은 인간들. 사헌은 조심스레 영은에게 물었다.


"만약 합의를 안해준다면 어떻게 되나요?"

"무거운 건은 아니라서 벌금일 거예요. 최소 50 이상?"


시발, 존나 적네. 그 둘은 집안에 돈이 썩어난단 말이다... 그러면 큰 처벌을 받는 건 바랄 수도 없다. 사헌은 깽값 후하게 쳐준다는 새림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합의하면 보통 얼마쯤...?"

"의뢰인께서 2장까지 제시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조서 작성 중입니다. 변호사 분들은 잠시 나가주시죠."


이마를 짚은 영은이 낮게 중얼거렸다. 그제서야 변호사들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자리를 피해줬다. 사헌은 문을 열고 사라지는 변호사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런 사헌에게 영은이 차분하게 말했다.


"사헌 씨, 천천히 잘 생각해보고 말씀해 주세요. 생각할 시간을 드릴게요."


그 말에 사헌은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군데군데 빨갛게 부어오른 두 손이 작게 떨렸다. 어차피 처음부터 정답은 정해져 있었다. 이대로 얌전히 입 닥치고 합의금을 받는 것. 좀 두들겨 맞은 걸로 2천을 받을 수 있다는데. 분명 남는 장사 아니냐며 넙죽 웃어야 하는데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어딘가 찐득찐득하고 아래로 푹 꺼지는 기분이었다.

최악이다.

인생이 어디까지 구질구질해질 수 있는지 시험이라도 받는 것 같다. 사헌은 바싹바싹 마르는 입술을 앙다문 채 손바닥으로 얼굴을 마구 문댔다. 남부럽지 않은 드라마 같은 인생을 원했지만 이래서야 궁금한 이야기 Y에 나오는 개막장 인생이잖아. 너무 큰 꿈을 꾼 거지, 좆도 없는 하류인생 주제에. 습기처럼 조용히 스며드는 절망감엔 영락없이 눅눅해졌다. 사헌은 진심으로 울고 싶어졌다.


"영은 씨. 아까 시켰던 커피..."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익숙한 발걸음이 영은과 사헌이 있는 공간을 채우며 가까워졌다. 그 소리에 사헌이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우습게도 궁금한 이야기 Y에 불과했던 사헌의 인생은 지지부진한 일일연속극으로 변모한다. 흔히들 말하는 심술궂은 운명, 얄궂은 우연 따위가 지배하는 순간. 한낱 고단한 인간 따위일 뿐인 사헌은 숙명과도 같은 내러티브에 속절없이 휩쓸리고 만다.


"...김솔음?"


그가 눈 앞에 서 있었다. 양 손에 커피를 든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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