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작 설정 날조 & 파괴 多
※ 유혈, 신체손상, 구토 등 각종 트리거 요소 주의
존재의 고통은 숨 쉬는 행위 이외의 것들이 모두 유료라는 비극에서 시작된다. 특히 방 한 켠 쉬이 내주지 않는 차가운 씹새끼들의 도시에서 사는 일이란, 이른 출근과 늦은 야근으로 하루의 절반조차도 머무르지 못하는 공간에 살기 위해 집이라는 명목으로 코딱지만한 월급의 절반을 뜯기고, 나머지의 절반을 식비로, 그 나머지의 절반을 저축하고 나면 수중에 남은 돈은 거짓말처럼 푼돈이 되는 숫자의 마법을 매달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서울에 연고 없는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겪게 되는 이 비극을, 학원 하나 없던 동네에서 개천용 되어 서울의 땅을 밟은 사헌은 무슨 일이 있어도 피하고 싶었다. 좁아 터진 주제에 집값만 콧대 높게 치솟은 서울에서 집 계약이 끝날 때마다 똥줄 태워가며 방황하는 21세기 유목민이 되고 싶지 않았다. 입사 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사택을 선택했던 건 그런 사헌의 의지가 반영된 결정이기도 했다. 그리고 사헌은 사택에 입소하자마자 그 결정을 후회했다.
김솔음. 사헌의 입사동기이자 룸메이트인 남자. 심연교통공사에서 살아남기 위해 과감히 눈알을 포기한 사헌의 앞에다 대고 눈알을 보여주며 티배깅하는 파탄난 인격 소유자, 연쇄 살인마 조심하라며 대놓고 살인 예고 메세지를 보내는 싸이코패스. 꼴에 동기라고 같은 사택으로 배정해 준 모양인데, 현장탐사팀으로 일하는 것도 스트레스인데 편히 쉬어야 할 집이라는 공간에 불편한 존재가 도사리고 있으니 사헌은 삶이 급속도로 고단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음이 주임으로 최단승진루트 밟고 별별 신기록 다 세우는 거 보면 떨어질 콩고물은 꽤 있어 보여서 그동안 참고 살았다.
그런데... 김솔음이 외계인이라고는 안 했잖아.
싸패인줄 알았던 제 룸메가 알고보니 외계인이었습니다. 웹소 제목으로 하면 <특이점이 온 요즘 웹소 제목.jpg>으로 캡박 당해 인터넷에서 실컷 조리돌림이나 당할 사건이 사헌에게 닥쳐온 것이다.
사건의 발단은 터무니없었다. 새벽에 목이 말라 주방에서 물을 마시던 사헌의 눈에, 식탁에 놓여 있던 솔음의 핸드폰이 눈에 띄었을 뿐이다. 평소라면 내 알바 아니라며 지나갔겠지만, 하필 그때 솔음의 핸드폰으로 전화가 왔고, 화면에 띄워진 이름이 은하제 대리여서, 처음에는 무시했지만 전화가 끊기고도 몇 번이고 전화가 다시 와 부재중 전화를 띄우는 걸 보면 꽤나 심각한 사안이 팀 내에서 벌어진 것 같아서, 사헌은 솔음의 핸드폰을 쥔 채로 난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솔음의 방문을 두드렸던 것이다.
조심스럽게 노크했지만 인기척은 커녕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아 사헌은 의아했다. 불과 몇 시간 전, 분명 솔음이 방 안으로 들어가는 걸, 사헌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평소보다 안색이 어두워서 건수 잡히면 그날로 살해당할 것 같아 인사조차 건네지 않았지만. 사헌이 문을 다시 두드릴까 고민하는 사이, 솔음의 핸드폰이 다시 한번 진동했다. 또 은하제 대리의 전화였다. 자고 있는 사람한테 이 정도로 전화를 할 정도면 진짜 어지간한 사고가 아닌가보다 싶어진 사헌은 결국 문고리를 손에 쥐었다. 어둠을 탐사하며 쌓였던 촉이, 문을 열지 말라고 소리쳤다. 그래도 어떡해. 이왕 하려고 한 거 끝까지 해야지. 이상하게 쭈뼛쭈뼛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애써 무시하며, 사헌은 솔음의 방문을 열었다.
그 순간, 무언가를 목도했다는 자각과 함께 기억이 끊겼다.
사헌이 눈을 떴을 때는 아침이었다. 눈앞에 보이는 낯선 천장에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키자, 온 몸을 두들겨 맞은 것을 넘어서 온몸의 뼈와 근육이 밤새 해체되었다가 다시 맞춰진 것 같은 충격에 사헌은 힘없이 쓰러져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숨만 꺽꺽댔다. 그런 사헌의 곁으로 어느새 다가온 솔음은 어두운 얼굴로 말없이 내려다보기만 하다가, 사헌이 상상치도 못한 말을 내뱉었다.
미안.
뜬금없는 사과에 사헌은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머리는 빠르게 돌렸다. 이 새끼가 밤 사이에 나를 두들겨 팼구나. 언젠가는 일어났을 일이 하필 어젯밤이었다 이거지. 죽일 듯 자신을 노려보는 사헌을 보며, 솔음은 덤덤하게 지난 밤 있었던 일을 실토했다. 사실 자신은 외계인이고, 번식 충동이 왕성해지는 특정 주기가 있는데 그 주기가 바로 어제까지였으며, 어젯밤 D조의 회식으로 술에 잔뜩 취한 상태에서 사헌이 예상치 못하게 방으로 침범하여... 사고가 벌어졌다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솔음의 얼굴은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던 평소와 달리 진심으로 담배가 말리는 얼굴을 하고 있어서, 눈치가 빠른 사헌은 그 사고라는게 맥락상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 전혀 알고 싶지 않았지만 저절로 알게 됐다.
하하 그게 뭔 소리에요. 농담 한번 좆같네 진짜...
사헌은 애써 웃으며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어젯밤 입고 있던 잠옷은 온데간데없고 솔음의 옷을 걸친 몸뚱이가 보였다. 하하 주임님이 친절하게도 옷을 빌려 주셨구나. 정신승리를 하는 사헌의 입꼬리가 파들파들 떨렸다. 현실 부정을 위해 사헌은 입고 있던 티셔츠 목덜미를 잡아땡겨 지난 밤의 격한 흔적을 확인했다. 사헌의 안색이 시퍼래졌다. 시발... 시발... 충격을 받은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가라앉았다. 그런 사헌을 내려다보던 솔음이 나지막이 무언가 말하기 시작했지만 귀에 들어오는 내용은 하나도 없었다.
사헌은 머리를 부여잡고 기억을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술을 마신 것도 아닌데 왜 제 기억이 날아갔는지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문고리를 잡고 문을 열었던 것까지는 분명 뚜렷하게 기억이 났다. 하지만 그 이후, 문 뒤에서 제가 목격한 것은 분명 검은...
툭. 코 안에서 무언가 가볍게 끊어지는 느낌과 함께 뜨끈한 액체가 인중을 타고 흘러내렸다. 입술 틈을 비집고 들어온 액체에서는 비릿한 향이 났다. 코피라는 걸 자각하자마자 깨질 것 같은 두통이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머리를 붙잡고 신음하는 사헌의 어깨에 솔음이 다급히 손을 얹었다. 고장난 모니터처럼 시야에 노이즈가 일렁이고 뇌가 조여드는 듯한 감각에 몸서리치는 사헌의 뺨을 솔음이 감싸쥐었다. 백사헌, 정신 차려! 귓가에 소리치는 목소리가 어쩐지 멀어지는 것만 같았다. 또다시 암전이었다.
*
그렇게 혼절한 뒤 사헌은 깨어나지도 못하고 주말 내내 앓았다. 섹스 한 번 치고는 가혹한 대가였다. 이윽고 월요일, 솔음이 출근한 사이, 혼탁한 정신으로 겨우 회사에 전화해 연차를 쓰고 나서야 문득 자신이 아직도 솔음의 침대에 그대로 누워있었다는 자각이 생겼다. 죽어도 제 침대에서 죽어야 한다는 생각에 힘없는 다리를 질질 끌며 방 밖으로 나오자 거실 소파 위에 곱게 개어진 베개와 담요가 눈에 들어왔다. 자신이 솔음의 침대를 차지하는 동안, 솔음은 소파에서 잠을 잔 모양이었다. 자신을 초죽음 상태로 만들어 놓은 주제에 솔음은 팔자 좋게 소파에서 잠이나 잤다는 생각이 들어 짜증이 치밀었지만, 그런 생각은 다시 찾아온 몸살 기운에 곧 사라졌다. 사헌은 다 죽어가는 새끼처럼 끙끙 앓으며 자신의 침대에 누웠다. 머리가 베개에 닿자마자 밀려오는 수마에 몸을 내주자 의식은 서서히 가라앉았다.
무의식의 늪에서 사헌을 건져올린 건 서늘한 체온이었다. 사헌은 이마에 닿는 손바닥을 흐리멍텅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정갈한 손이 식은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무심하게 쓸어넘겼다. 뭐예요. 그렇게 말하려는데 말라비틀어진 성대에서는 바싹 마른 낙엽이 짓밟히는 듯한 목소리만 나왔다.
열은 내렸네.
솔음이 사헌의 이마에서 손을 뗐다. 사헌은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아침보다는 몸이 가벼웠다. 식은땀이 좀 많이 나는 것 말고는 제법 컨디션이 많이 돌아온 것 같았다. 여전히 멍한 얼굴을 한 사헌에게 솔음이 미지근한 물로 적신 물수건을 내밀었다. 수건을 건네받은 사헌은 안대를 벗고 조심스럽게 식은땀을 닦아냈다. 병 주고 약 주고 다 하네 진짜, 중얼거리면서. 그 말을 들었을 게 분명한 솔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예의 그 무표정한 얼굴로 사헌이 하는 꼴을 바라보기만 했다.
...우리 진짜 잔 거 맞아요? 레슬링 아니고요?
잤다니까.
주임님 혹시... 때리면서 하는 취향이에요?
솔음이 진심이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면... 사람이 고작 섹스 한 번 했다고 이렇게 아플 리가 없는데.
......
그... 혹시, 저도 즐겼나요? 기억이 없어서...
무표정한 솔음의 얼굴에 진심으로 한심해하는 기색이 스쳤다. 자신은 그저 강간인지 서로 합의 하에 한 관계인지 확인하고 싶은 의도에서 한 질문이었지만, 대놓고 물어볼 자신이 없어 돌려 물어봤을 뿐이었는데... 경멸의 시선을 받은 사헌은 조금 억울했고 아주 많이 좆같았다. 뒷구멍이 욱신거리는 걸 보니 제가 박힌 것 같아서 더 좆같았다. 그때까지도 별 말이 없던 솔음이 불쑥 입을 열었다.
싫어하진 않았어.
...이쯤되니 진심으로 담배를 피고 싶어졌다. 사헌은 금단 증상에 시달리는 마약 중독자마냥 벌벌 떨리는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입사 동기이자 룸메이트이자 상사인 사람과 잔 것도 사고인데, 심지어 내가 박혔다고? 불행배틀하면 모두의 질타를 받으며 당당히 1등을 할 만한 이야기였다. 시발, 난 기억도 안 나는데... 사헌은 다시 지난 밤의 기억을 더듬어보려고 했다. 쨍한 통증이 머리를 강타했다. 머리를 다시 부여잡고 고통스러워하는 사헌의 등에 솔음의 손바닥이 닿았다. 떠올리지마. 작은 속삭임이 귓가에 간지럽게 내려앉았다. 그 순간, 척추선을 따라 오소소 소름이 돋으며 실금 같은 의심이 번뜩였다. 사헌은 자신의 등에 손바닥을 접촉하는 솔음의 손을 뿌리치며, 쏘아붙이듯 내뱉었다.
당신이 내 기억 지웠어?
아니.
근데 떠올리려고 하면 왜 이렇게...
방어기제야.
뭐?
불가해한 걸 본 뇌가 망각하려고 하는 거야. 손상을 막기 위해서.
불가해? 손상? 의문 사이로 자신이 외계인이라고 말하던 솔음이 떠올랐다. 솔음이 진짜 외계인이라면 이런 비정상적인 후유증이 납득이 갔다. 하기야 어둠 탐사해서 꿈결 모으는 직업도 있는데 외계인 쯤이야 없는 게 더 이상했다. 물론 그 외계인이 사람 거죽 뒤집어쓰고 인간 행세하면서 회사 다니는 게 더더욱 이상한 일이었지만.
진짜 외계인이에요?
비슷해.
외계인이라는 거예요, 아니라는 거예요?
개체명 말하면 너 다시 코피 터질걸.
...무슨 크툴루에요? 산치 떨어지게?
사헌의 빈정거림에도 솔음은 그저 피식 웃더니 무언가 말했다. 순간 비행기가 이륙한 것처럼 귀가 멍멍해지더니 통증이 송곳처럼 고막을 찢었다. 솔음의 음성은 곧 휘발되었지만 듣는 행위만으로도 심장이 철렁했다. 어느새 사헌은 자신도 모르게 귀를 막고 있었다. 슬그머니 귀에서 손을 떼보니 귀를 막고 있던 손바닥에 피가 묻어 있었다. 심각해진 솔음의 얼굴을 마주하고 나서야 그 피가 자신의 귀에서 흘러나왔음을 사헌은 깨달았다. 그리고 솔음이 외계인이라는 말이, 자신을 놀려먹으려는 싸패 행위의 일환이 아니라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것도.
그제서야 사헌은 그동안 그가 느꼈던 모든 위화감의 출처를 알 수 있었다. 솔음이 가공할 만한 속도로 실적을 내고 승진을 했던 것도, 싸이코패스 같은 말과 행동으로 제게 겁을 주고, 때로는 어둠 속 괴물들보다 더 괴물처럼 느껴졌던 것도 전부 솔음이 외계인이어서 가능했던 일들이었다. 소름이 돋는 것과 동시에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한 현타가 찾아왔다. 내가 살다살다 외계인이랑 섹스도 하다니... 아니 근데 이걸 섹스라고 해도 되나? 교미? 교접? 종이 다르니까 이종교배가 적합한 용어인 것 같았다. 시발 나 외계인이랑 이종교배 한거야 그럼?
사헌은 싸패는 참고 살아도 외계인은 참기 힘들었다. 싸패는 적어도 인간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감당할 수 있는 범주 내이지만 뇌손상을 유발하는 외계인은 그가 감당할 수 있는 규격 외의 존재였다. 게다가 그 외계인이랑 우발적으로 이종교배를 했다면 더더욱. 이종교배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내상을 입은 사헌은 대학 졸업과 동시에 같이 졸업했던 담배가 미친 듯이 땡겼다. 담배 생각만 하는 사헌의 옆에서 솔음이 관계 이후 생길 수 있는 후유증과 신체적, 정신적 변화에 대해 계속 설명했지만 사헌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무슨 보험 약관 설명하듯이 말하네... 그 감상이 전부였다. 영혼 간의 연결을 통한 공감각적 심상의 공유화 따위는 사헌의 알 바가 아니었다. 네, 네. 담배 대신 애꿎은 손톱만 잘근잘근 씹으며 대충 대꾸하던 사헌은 결국 마음의 결단을 내렸다.
며칠 뒤, 몸이 완전히 회복된 사헌은 회사로 출근하자마자 F조 주임에게 사택관리는 어느 부서에서 하냐고 물었다. 사택에 안 살아서 잘 모르겠는데 그런 건 인사팀한테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니냐는 주임의 말에 사헌은 고개를 꾸벅 숙인 후 자리에 앉아 다리를 덜덜 떨며 정규시간이 시작되기만을 기다렸다. 시계가 정각을 가리키자마자 전화기를 들어 인사팀에 전화를 때렸다. 혹시 사택 변경 신청이 가능하냐는 사헌의 물음에 인사팀 직원은 사택 관리는 자기네들의 업무 관할이 아니라며 시설관리팀에 전화하라는 무뚝뚝한 대답을 남겼다. 곧이어 전화한 시설관리팀은 사헌의 질문에 정말로 어처구니 없다는 듯 헛웃음을 뱉었다.
아니 누가 사택 관리를 여기에 물어봐요. 저흰 사내 시설만 관리하는데.
그 대답을 들은 사헌은 민망함과 동시에 짜증이 치솟았다. 인사팀한테 전화했더니 여기에 전화해보라고 했는데요. 짜증을 억누르며 대꾸하는 사헌에게 시설관리팀은 황당해하며 총무팀에게 문의하라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전형적인 K-직장인 전화돌리기에 제대로 당한 사헌은 이번에는 부디 제대로 된 부서가 맞길 바라며 다시 수화기를 들었다.
옮길 수 있는 공실이 없어요.
예?
얼마 전에 공채로 신입 직원들이 많이 들어와서요. 사택은 다 꽉 찼어요.
그럼 쌍방 동의 하에 방을 교환하는 건 안되나요?
그건 안 돼요. 계속 쓰시거나, 아예 나가셔야 해요. 그게 원칙이라서...
겨우 제대로 전화를 건 총무팀에서는 안된다는 거절의 말만 나왔다. 이유를 따져묻는 사헌에게 총무팀 직원은 악용할 수 있는 여지가 생겨서 그렇다고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아니, 쌍방 동의 하에 방을 교환해서 나올 수 있는 악용의 여지가 도대체 뭔데? 중국 황제마냥 매일 방 바꿔서 자겠다는 것도 아니고... 사헌은 황당해하며 끊어진 수화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파티션 너머 그런 사헌을 힐끔거리던 주임이 한마디 던졌다.
왜? 사헌 씨 사택 옮기게? 사택에 문제 있어요?
아뇨, 그건 아니지만...
그럼 룸메 문제? 사헌 씨 룸메 김솔음 씨 아닌가? 그, 저번에 주임 달았다던.
아... 네.
솔음 씨랑 뭐 불편한 거 있어요?
사헌은 애써 미소지었다. 김솔음은 사실 인격장애가 있는 싸패인데 숨만 쉬어도 꼽을 줄 뿐만 아니라 알고보니 외계인이었고 어쩌다보니 이종교배하게 되어 더이상의 정신붕괴를 겪고 싶지 않아 사택을 바꾸고 싶어요, 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도 사헌은 목 끝까지 올라온 응어리 대신 다른 말을 뱉으며 생각했다. 이번 일을 포함해서 그동안의 솔음이 제게 행했던 모든 만행들을 가감했을 때,
그... 솔음 씨가 코를 좀 많이 골아서요.
이 정도면 꽤 젠틀하게 말해준 편 아닌가.
*
김솔음 알지. 그 저번에 주임 최단기간에 달았다던 사람, 코 존나 곤다는데.
컥. 탕비실에서 갓 내린 커피를 마시던 사헌이 사레들렸다. 대화를 나누던 사원 두 명이 폐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기침을 하는 사헌을 불쌍하다는 듯 쳐다보고는 탕비실을 나갔다. 뭔 놈의 소문이 이리 빨라 미친 회사야... 탕비실에 혼자 남은 사헌은 입가에 묻은 커피를 휴지로 닦아내며, 하라는 일은 안하고 남뒷얘기나 씹어대는 직장이라는 이름의 판옵티콘에서 벌어지는 정보 교환 활동의 무서움을 실감했다. 저 소문이 김솔음의 귀에 들어가는 날엔... 나는 죽는다. 사헌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걸 느끼며 다시 사무실로 돌아와 앉았다. 사방을 가린 파티션 안에 앉아 있으니 마음이 아늑해졌다. 개인주의, 단절, 차단, 실리, 효율... 사헌이 가장 좋아하는 단어들이었다.
시름 가득한 연말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따라 운 좋게도 간단한 D급 어둠만 일거리로 들어와 간만에 시간이 남았다. 연말 특수에 치여 사방이 아비규환인데 저 혼자 평화롭게 사무실에 앉아 사무직처럼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호사를 누리고 있으니 기분이 좋아졌다. 사헌은 업무일지를 재빠르게 작성하기 시작했다. 할 일을 모조리 끝내고 남은 시간 동안 속 편하게 월루나 할 생각이었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가락 위로 미지근한 액체가 떨어졌다. 콧물인가? 고개를 숙여 손을 내려다보니 빨갰다. 인중을 문질러보니 코피였다.
사헌은 책상 서랍에서 휴지를 꺼내 콧구멍을 틀어막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장실로 달려가 거울을 보니 핏자국이 턱까지 보기 좋게 번져 있었다. 연말이라 과로했는지 요 근래 코피가 자주 났다. 어느새 코피에 익숙해진 사헌은 핏자국을 대충 물로 닦아내고 새 휴지로 코를 막았다. 그리고는 다시 사무실로 돌아와서, 이번 주말은 어디에도 나가지 않고 방에서 푹 쉬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업무일지를 마저 작성했다.
할 일을 모두 끝낸 사헌은 월루가 들키지 않도록 윈도우 키와 D 키에 손가락을 올려놓은 채 임직원 복지몰을 켰다. 연말이라고 특가 세일을 하는 물품들은 전부 짬처리였다. 소원권 특가 세일이나 하지. 존나 열심히 포인트 모을텐데. 혀를 차며 직원 포탈로 들어가자 <20XX 설 선물 선정 설문조사>라는 공지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홀린 듯 제목을 클릭하자 설 선물 후보 목록이 떴다. 각종 선물세트 목록을 훑어내리는 눈에는 별 감흥이 없었다. 이런 거 말고 그냥 돈으로 줘라... 중얼거리던 사헌의 시야 한구석에서 카톡 알림이 반짝였다.
12/20 7시 XX사번 회식 참여 가능한 분 투표해주세요😄😄
응 안가. 동기 회식에 가차없이 불참 투표한 사헌은 또 누가 불참하는지 확인했다. 불참에 투표한 사람의 명단을 슥슥 내리던 사헌의 손이 익숙한 이름에 멈칫했다. 그래, 외계인이 인간 회식에 참여하는 것도 웃기긴 하지. 사헌은 코웃음을 치며 솔음의 카톡 프로필을 눌렀다. 아무런 프로필 사진도, 배경 사진도 없는 텅 빈 프로필이 화면에 가득 찼다. 아무 것도 없는 프로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사헌은 솔음과의 대화창에 들어갔다.
세제 다써서 쿠팡으로 시켰는데
공금에서 깔게
요
미친놈
ㅇㅇ ㄳ
마지막 대화가 한 달 전이었다. 이전에도 공동생활 관련된 용건 아닌 이상 연락을 하지 않았지만, 그 사건 이후로 솔음과의 카톡 대화방은 거의 사장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사헌이 솔음을 있는 힘껏 피해다닌 것과 솔음의 부서가 정예팀으로 승격이 되네마네하면서 솔음이 눈코뜰새없이 바빠진 것이 맞물려 벌어진 거리감이었다. 메신저뿐만 아니라 얼굴을 맞대고 대화조차 나누지 않게 된 것도 그 시점부터였으니까.
턱을 괸 채 찬바람 쌩쌩 부는 대화창을 복기하던 사헌의 뒤로 그림자가 졌다. 어둠을 휘젓고 다니는 동안 각종 위협에 노출됐던 반사신경이 재빠르게 반응했다. 전광석화처럼 윈도우와 D 키를 동시에 누르고 업무일지 화면을 띄우자마자 대리가 사헌에게 말을 걸었다.
오, 사헌 씨 업무일지도 써?
아, 네. 제가 뭘 했는지 정리해두니까 좋더라고요.
사헌 씨 기수가 엘리트라고는 들었는데, 야무지게 정리 잘 했다.
하하 아닙니다. 사헌은 사회생활 자아를 장착하며 겸손한 미소를 지었다. 그저 몇 마디 나누고 자기 자리로 돌아갈 것 같았던 대리는 수상쩍은 미소를 지으며 여전히 사헌의 옆에 서 있었다. 사헌은 짧지 않은 경험으로 대리가 곧 자신에게 귀찮은 업무를 토스할 것임을 눈치챘다. 아니나다를까, 대리는 곧 의뭉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짬처리의 서문을 열었다. 혹시 지금 좀 바빠? 아뇨, 그냥 뭐...
그럼 정말 미안한데, 지금 당장 지원 갈 수 있어?
지금 당장요? 몇 급인데요?
D등급. 부상자가 생겼는데, 이송할 손이 모자라서 지원이 필요하대.
아. 저 혼자 가나요?
연말이라 전부 바빠서 어둠 탐사도 2인 1조로 돌린지 꽤 됐는데 왜 이래? 뭐, 꿈결 수집하는 업무도 아니고 단순 부상자 이송이니까 걱정 마. 매뉴얼은 여기.
대리는 기다렸다는 듯 메뉴얼을 사헌의 책상 위에 올려두고는 사라졌다. 혼자 가라고? 이런 안일함이 모여 산업재해를 부르는 거다 미친 블랙기업아... 칼퇴를 꿈꾸며 실컷 월루나 하려던 사헌은 속으로 욕설을 짓씹으며 매뉴얼을 집어들었다. 꼼꼼히 매뉴얼을 읽어내려가는데 짜증이 나서 머리가 지끈거렸다. 사헌은 매뉴얼을 읽다 말고 손바닥으로 이마를 지탱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스트레스와 과로 때문인지 요즘 두통이 자꾸 일었다. 오늘은 반드시 퇴근하는 길에 약국에 들러 두통약을 사야겠다고 생각하며, 사헌은 한숨을 내쉬고는 펜을 쥐고 매뉴얼을 다시 독파하기 시작했다.
Qterw-D-1902
[뫼비우스의 쇼핑몰: 틀린 것 찾기]같은 구역이 무한히 반복되는 쇼핑몰에서 이상현상을 찾아야 하는 어둠. 첫 진입 시 나타나는 구역의 모습을 기억하여 다음 구역에서 발생하는 이상현상(변동)을 찾아내야 한다. (탐사기록 102회까지 기록)
▶ 진입 방법
○○시 ○○구 ○○프라자 건물 3층을 비상계단을 통해 진입. 3층 쇼핑센터로 이어지는 비상구의 문을 등으로 열며 진입하면 어둠에 진입할 수 있다.
▶ 탐사 매뉴얼
1. 모든 공간은 [원본 구역]과 [이상 구역]으로 나뉜다.
1-1. [원본 구역]과 [이상 구역]은 공존할 수 없다.
2. 가장 처음 진입한 구역은 [원본 구역]으로 지정된다. [원본 구역]에는 이상 현상을 포함하여 그 어떤 상해를 유발하는 현상이 나타나지 않는다.
3. [원본 구역]에서 비상구 문을 열고 나가면 나타나는 구역은 [이상 구역]으로, [이상 구역]에는 반드시 한 가지의 이상현상이 존재한다.
5. [이상 구역]에 진입하여 [원본 구역]과 비교했을 때 달라진 점(이상현상)을 찾아내어 비상구 옆 게시판에 위치해 있는 고객의 소리함에 이상현상을 적어 넣은 뒤 비상구 문을 열고 나간다.
5-1. 이상현상을 올바르게 적지 않았을 경우 [원본 구역]으로 돌아온다.
5-2. 고객의 소리함 이용시 반드시 고객의 소리함 전용 메모지를 사용해야 한다.
6. 10번 연속 이상현상을 올바르게 찾아냈을 시 탈출 가능하다.
▶ 현재까지 기록된 이상현상 목록
1. 광고 포스터
- 불우이웃 돕기 캠페인 포스터의 웃는 얼굴이 비명을 지르는 형상으로 변경
- 관광지 홍보 포스터의 색이 반전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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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린 것 찾기? 매뉴얼만 읽어보았을 때는 그저그런 D등급 어둠 같은데, 부상자 때문에 발이 묶여 지원팀을 파견한다는 게... 볼펜을 딸깍이던 손이 멈췄다. 부상자? 사헌은 가만히 생각했다. 그러고보니 부상자가 있으면 부상자 응급 처치를 사유로 별관에서 응급 키트를 무료로 받을 수 있었다. 부상자 처치 등의 목적이 아닌 이상, 개인적 사유로 응급키트를 불출하려면 피 같은 포인트를 내어주어야 했다. 기회가 찾아왔을 때 최대한 뜯어내야 한다. 응급 키트 속 물품을 최대한 적게 쓰고 남은 걸 전부 챙기면 그만이다. 그래야 짬처리 당한 제 처지가 조금이나마 덜 억울하지.
사헌은 그길로 별관에 들러 응급 키트를 받은 뒤 어둠에 진입할 수 있는 장소로 향했다. 한 손에 응급키트를 든 채 사헌은 3층 쇼핑센터로 연결된 문을 등으로 힘껏 밀었다. 끼익,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문이 삐그덕 열리는 것과 동시에 사헌은 문 앞에 서 있던 사람과 부딪혔다. 어둠에 진입하자마자 난데없이 부딪힌 사헌이 휘청거리다 벽을 짚고 겨우 고개를 들자,
저기, 눈 좀 똑바... 주임님?
익숙한 노루 가면이 눈 앞에 서 있었다. 시발, 지원 요청한 팀이 D조라고는 얘기 안 해줬잖아! 사헌은 솔음을 보자마자 뒤돌아 어둠으로 진입했던 비상구 문을 열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땀 뻘뻘 흘리며 올라왔던 비상 계단은 사라지고 제가 서 있는 곳과 완전히 똑같은 쇼핑센터가 펼쳐져 있었다. 메뉴얼대로 어둠에 성공적으로 진입해 버린 것이다. 망연자실해하는 사헌의 뒷통수에 대고 솔음이 말했다.
뭐해? 지원 온 거 아냐?
사헌은 솔음에게서 벗어나는 걸 깔끔히 포기하고 다시 문을 닫았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늘 걸치고 있던 정장 자켓은 어디가고 솔음은 셔츠 차림이었다. 하얀 셔츠 곳곳에 핏자국이 흥건해 사헌은 순간 부상자가 솔음인 줄 알고 동요했다. 그 김솔음이 D등급 어둠 따위에 부상을 입었다고? 그런데 솔음의 몸에서 흘렀다기엔 핏자국이 번진 방향과 흐름이 불규칙적이었다. 그렇다면 외부로부터 묻은 피일 가능성이 높았다. 판단을 빠르게 마친 사헌은 곧 냉정을 되찾았다.
부상자는요?
사헌이 묻자 솔음이 턱짓으로 뒤를 가리켰다. 솔음의 뒤쪽으로 한 남자가 벤치에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앉아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저기요. 정신 차려봐요. 사헌이 다가가 어깨를 두들기니 남자는 작은 신음을 흘렸다. 재빨리 남자의 경동맥을 촉지해보니, 맥이 뛰고 있었지만 조금이라도 늦었다간 뜻하지 않게 초상을 치를 것 같았다.
시선을 옮겨 밑을 보니 벤치의 아래로 늘어뜨린 다리는 무릎 아래 부분이 사라져 있었다. 끔찍한 몰골에 사헌은 남자의 곁에 쭈그려 앉은 채 응급 키트를 열었다. 무릎 아래로 드러난 단면은 마치 물어 뜯긴 것처럼 뼈의 절단면이 날카로웠고 결이 끊긴 근육이 핏방울처럼 맺혀 있었다. 허벅지에는 솔음 나름의 응급처치를 한 모양인지 검은 천이 꽉 묶인 채였다. 아무래도 솔음의 자켓은 지혈대 용도로 쓰인 것 같았다. 솔음이 초기에 지혈을 잘 해둔 덕에 굳이 응급 키트의 지혈대를 쓸 필요는 없어 보여, 사헌은 라텍스 장갑을 끼고 깨끗한 붕대를 꺼내 환부에 둘렀다. 그리고 키트에서 펜 모양의 진통제를 꺼내 남자의 허벅지에 찔렀다.
그런 것도 할 줄 알아?
사헌이 하는 모양을 잠자코 지켜보던 솔음이 물었다.
이거요? 그냥 찌르면 되는데요. 진통제거든요.
아.
생으로 뜯긴 건 엔드로핀으로도 안 돼요. 존나 아파서.
그러니 진통제라도 줘야죠. 제 안대를 가리키며 말하는 사헌의 얼굴은 덤덤했다. 심각한 신체 손상을 입은 직후에는 아드레날린과 엔드로핀의 분비 때문에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던데, 그런 건 전부 낭설이었던 건지 아니면 안구 손실 정도는 치명상이 아니었던 건지. 심연교통공사에서 눈알을 빼앗겼을 때의 사헌은 안와를 감싼 근육과 인대가 생으로 뜯겨지는 고통을 꼼짝없이 받아야들여야만 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었다. 마치 검은 장막에 갇힌 것처럼 좁아진 시야에 당황할 틈도 없이, 안구가 뜯긴 자리에 상흔처럼 남은 통증이 들이닥쳤다. 숨을 꺽꺽대며 고통에 발작하는 자신의 사지를 긴급대응팀 명찰을 단 사람들이 찍어눌러 제압했다. 버둥거리는 허벅지에 펜을 찔러넣은 뒤 의무실로 옮겨지고 나서야 사헌은 그 펜의 정체가 아주 강력한 마약성 진통제임을 깨달았다.
사헌은 실리와 효율을 따질 줄 안다. 그래서 안구 손실이라는 위협적인 경험의 기억에 정체되기보단, 빠르게 털어내고 이 경험을 반면교사 삼아 백일몽 주식회사에 계속 근무하며 실적을 내는 것이 이득이라는 계산을 마치고 다시금 어둠에 뛰어들었다. 언제든 치명적 상해를 입을 수 있는 환경에 대비하기 위해 간단한 응급 처치 방법들도 그때부터 차츰 습득해나갔다.
사헌의 이러한 잣대는 김솔음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사헌이 솔음에게 품은 개인적인 앙심과는 별개로 솔음이 가진 탁월한 능력은 인정하고(제가 앙심을 품어봤자 솔음을 이길 수 없음을 진작에 깨달았기에) 취할 것은 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제 고통을 보며 만족스러워하는 솔음의 새디스트적 성향 상, 심연교통공사에서 있었던 티배깅 행위에 대해 물고 늘어지는 것만큼 비효율적인 일은 없다. 그래서 사헌은 솔음의 앞에서 제 소실된 왼쪽 안구를 무덤덤한 척 가리킬 수 있었던 것이다. 비록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깊은 원한의 폭풍이 불고 있을 지라도.
솔음은 말없이 그런 사헌을 내려다보았다. 가면에 가려져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솔음이 부쩍 말이 없자 스멀스멀 불안감이 피어올랐다. 금방이라도 솔음이 감히 백사헌 주제에 건방지다며 갑자기 목을 콱 조를 것 같았다. 사헌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자 솔음이 갑자기 피식 웃었다.
따라와. 간단히 상황 브리핑 해줄테니까.
솔음은 사헌이 어둠으로 진입했던 비상구 앞까지 걸음을 옮겼다. 사헌이 잠자코 솔음을 따라 비상구 앞에 서자 솔음은 비상구 문 옆에 붙어있는 게시판을 가리켰다. 색이 바랜 불우이웃 돕기 캠페인 포스터와 관광지 홍보 포스터 옆에 고객의 소리함이라고 쓰여진 박스가 붙어있었다. 박스의 옆면에는 포스트잇이 고정되어 있었다. 가까이 다가간 사헌이 포스트잇을 조심스레 집어들었다.
고객의 소리함 전용 메모지
>>다른 것을 적어 넣어주세요<<
복잡한 어둠은 아니야. 최근에 변동사항이 생기긴 했는데...
솔음이 설명했다. <뫼비우스의 쇼핑몰>은 원래 이상현상만 잘 찾으면 유혈사태 없이 무난하게 탈출할 수 있는 D급 어둠이었는데, 얼마 전부터 보고된 적 없는 변동사항이 발견되며 현장탐사팀 사원들이 실종되었다고 한다.
실종된 탐사팀의 송환된 꿈결 수집기에서는 지원을 요청하는 내용의 녹취록이 남아 있었고, 그 후에는 보다시피... 내가 투입됐어.
솔음은 어둠에 진입하자마자 쓰러져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고 한다. 남자의 풍채가 큰 데다가 두 발을 잃은 상태라 솔음 혼자 그를 부축하며 어둠을 탈출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판단, 사무실에 지원 요청을 했고, 마침 월루하던 사헌이 딱 걸려 솔음과 함께 좆뱅이를 치게 됐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사헌은 지원의 지원팀으로 어둠에 투입된 꼴이었다. 원치 않은 사람과 원치 않은 좆뱅이를 치게 된 사헌은 짜증부터 났지만, 어둠에 진입한 이상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해야 했다. 사헌은 벤치에 쓰러지듯 걸터앉아있는 남자와 솔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남자는 과연 풍채가 큰 편이긴 했지만... 부상자를 혼자 부축할 수 없어 지원 요청을 했다는 솔음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그야 솔음은 <눈먼 자들의 저택>에서 사헌의 뒷덜미를 잡고 허공에 들다시피 환풍구에 욱여넣은 전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로 혼자 부축할 수 없어서 지원을 요청했다고요?
왜. 난 지원 요청도 하면 안되나?
아뇨. 그건 아니지만...
수상했다. 고작 부상자를 혼자 이송할 수 없어서 사유로 지원 요청을 했다고? 그 김솔음이? 사헌은 생각에 빠졌다. 게다가 고작 D등급 어둠 따위에, 부상자가 생겼다는 이유로 사측에서 두 차례나 지원 요청을 들어줬다고? 분명 제가 놓친 것들이 있을 것이다. 솔음이 말했던 것과 제가 매뉴얼에서 읽었던 것들을 정리해 볼 필요가 있었다.
- 가장 처음 진입한 구역은 [원본 구역]으로 지정된다.
어둠은 변칙적이고 불가사의하기 때문에 어둠 진입 시점에 따라 진입 장소가 달라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솔음은 어둠에 진입하자마자 남자가 쓰러져 있던 걸 발견했다고 말했다. 솔음이 어둠에 진입한 시점에서, 솔음이 있는 구역은 [원본 구역]이 된다. 여기서 세울 수 있는 가설은 두 가지다.
첫째, [원본 구역]은 어둠 진입 시점에 따라 어둠 내에 존재하는 무한한 구역 중 무작위로 지정된다는 가설. 우연의 일치로 솔음과 남자에게 같은 [원본 구역]이 지정되었고 남자는 구역 이동 중 이상 현상에 의해 상해를 입었지만,
※ 이상현상을 올바르게 적지 않았을 경우 [원본 구역]으로 돌아온다.
이 규칙을 이용해 안전 구역인 [원본 구역]으로 다시 돌아왔던 것이다. 그 다음으로 어둠에 진입한 솔음은 첫 진입이었기 때문에 지정된 [원본 구역]으로 진입하여 쓰러진 남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둘째, 어둠 진입 시점과 관계없이 고정된 [원본 구역]이 존재한다는 가설. 남자는 진입 후 구역 이동을 하는 중 이상 현상에 의해 상해를 입었지만, 두 번째 가설과 마찬가지로 이상현상을 올바르게 적지 않아 [원본 구역]으로 다시 돌아왔고 이후 어둠에 진입한 솔음이 남자를 발견했다, 정도의 가능성이 있었다.
어둠에 진입한 솔음의 시점에서 [원본 구역]의 고정 여부를 알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다. 바로 외부의 인물이 어둠에 진입하는 것. 새롭게 어둠에 진입한 외부인이 솔음이 있는 [원본 구역]에 나타난다는 것은 곧 [원본 구역]은 그 장소로 고정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쉽게 말해 솔음이 있는 장소가 뉴비 스폰 장소인지 확인하려면 뉴비를 스폰시켜 보면 된다. 따라서 솔음은 지원 요청을 통해 뉴비를 스폰시켰을 것이고, 여기에서 뉴비는... 바로 자신, 백사헌이었다!
김솔음이 고작 고정된 [원본 구역]의 존재 여부를 알기 위해 자신을 이용했다는 것을 깨닫자 속에서 울화가 치밀어올랐다. 사헌은 걸쭉한 욕설을 솔음에게 쏘아붙이는 대신, 심호흡을 하며 머리를 굴렸다. 속 시커먼 솔음이 단순히 [원본 구역]의 고정 여부를 알고 싶어서 지원 요청까지 해가며 사헌을 부른 것은 아닐 것이다.
사헌이 솔음의 이야기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 솔음이 어둠 진입 이후 지원 요청을 했다는 것을 미루어 보아, 솔음은 어둠 내부에서도 바깥과 교류가 가능한 아이템을 보유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두 번째, D급 어둠임에도 불구하고 2번의 지원 요청이 전부 수리된 점으로 볼 때, 이 어둠에는 사측에서 눈여겨 볼만한 보상이 있을 확률이 높다(솔음이 팔자에도 없던 지원 요청까지 해가면서까지 이 어둠을 파훼하려는 이유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
상황 파악은 대충 끝났다. 남은 문제는 이상현상을 찾는 거다. [원본 구역]인 이곳의 모습을 최대한 외워두어야 했다. 사헌은 들고 있던 고객의 소리함 전용 메모지를 하나 뜯은 뒤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쇼핑센터를 둘러보았다. 오래된 프라자라서 그런가 규모 자체가 작았다. 게다가 본격적으로 점포가 모여있을 오른쪽 공간에는 셔터가 내려져 있어 내부가 보이지도, 진입할 수도 없었다. 따라서 사헌이 유심히 봐야할 공간은 비상구 앞부터 반대편 엘레베이터까지 일직선으로 이어진 복도, 비상구 왼편에 위치한 벤치와 에스컬레이터, 복도에 드문드문 들어서 있는 작은 점포들과 복도 한가운데, 벽에 걸린 커다란 광고판이 전부였다.
그중 단연코 눈에 띄는 건 광고판이었다.
무엇이든 전부없애드립니다
☎ 016-5869-4989
-짜증나는 직장 상사
-잔소리하는 친척 어른
-가기 싫은 학교, 회사, 학원
☞흔적없이☜
평소 거슬렸던 모든 것
언제 어디서나
전부 없애드립니다
>>빠르게<< 신속, 정확, 친절
...꽤 혹하는 광고였다. 짜증나는 직장 상사 부분에서 사헌의 시선이 조금 오래 머물렀다. 오장육부 사고팔고라는 직관적인 전화번호도 마음에 들었다.
왜. 의뢰하고 싶어?
아, 아뇨. 그냥 좀 본 거예요...
사헌은 헛기침을 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벤치 옆 에스컬레이터 앞에는 수리중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다. 표지판을 무시하고 에스컬레이터를 타려던 사헌의 뒤통수에 대고 솔음이 말했다. 거기 위아래 다 막혀있어. 과연 솔음의 말대로 에스컬레이터의 끝에는 끝없는 어둠만이 가득했다. 무턱대고 들어갔다가는 뼈도 못 추리고 실종될 게 뻔했다. 별 소득 없이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려온 사헌은 반대편 엘레베이터까지 복도를 따라 걸었다. 복도를 따라 듬성듬성 늘어선 점포들은 죄다 텅 비어 있어 딱히 눈여겨 볼 것도 없었다. 쭉 걷던 사헌은 돌연 멈춰섰다. 어느새 엘레베이터 앞이었다. 고개를 들어 현재 엘레베이터의 층수를 알리는 화면을 보니 엘레베이터는 F층에 멈춰 있었다. 혹시 몰라 엘레베이터 호출 버튼을 눌러보았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이 정도 봤으면 충분하겠다 싶어진 사헌은 솔음이 서 있는 비상구 앞으로 돌아갔다. 허공을 보며 무어라 중얼거리던 솔음이 사헌이 다가오자 말을 잠시 멈췄다. 그리고는 물었다.
다 봤어?
네. 지금부터 [이상구역]으로 진입하면 되죠?
응.
그렇게 말하는 솔음은 비상구 앞에서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복도 벽에 기댄 채, 한가롭게 회색 동전이나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개자식, 부상자 부축은 나 혼자 해라 이거지. 사헌은 속으로 욕을 짓씹었다. 어쩔 수 없이 남자가 쓰러져 있는 벤치로 다가가 혼자 남자를 부축하려는데, 어째서인지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다. 사헌은 남자의 어깨에 손을 올리려다 멈칫했다.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느낌이 머릿속에서 술렁이고 있었다. 직감이라기엔 악착같은 생존 본능과 닮아있는 감각에 사헌은 움찔 몸을 떨었다.
단순히 사헌을 부려먹으려는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사헌은 그 이면에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왜 김솔음은 부상자 이송에 소극적이지? 사헌이 이 어둠에 지원팀으로 파견된 것은 지원 인력으로 선진입했던 솔음이 부상자를 이송하는 데 필요한 인력이 부족해서였다. 그러나 솔음은 지원 인력으로 파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상자 이송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마치 부상자를 구조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잠깐. 구조할 필요가 없다고?
싸한 느낌에 사헌의 두뇌가 초조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사헌은 지금 핵심을 놓치고 있었다. 이럴 땐 큰 틀부터 차근차근 다시 생각해보면 된다. 현재 사헌은 부상자를 이송하기 위해 지원 인력으로 어둠에 투입됐고, 매뉴얼 상 어둠의 이름은 [뫼비우스의 쇼핑몰: 틀린 것 찾기]이다. 잠깐, 틀린 것? 그 순간 어두운 하늘에 번개가 치는 것처럼 생각 하나가 번뜩였다. 황급히 주머니에 손을 넣자 작은 종이가 손에 잡혔다. 설마설마하면서도 종이를 주머니에서 꺼내 펼치는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고객의 소리함 전용 메모지
>>다른 것을 적어 넣어주세요<<
알고보니 이 어둠은 틀린 그림 찾기가 아니라 다른 그림 찾기였던 것이다.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처럼 멍해지는 정신 틈으로 몇 분 전 솔음이 했던 말이 스며들었다.
'복잡한 어둠은 아니야. 최근에 변동사항이 생기긴 했는데...'
이딴 말로 어물쩍 넘어가기에는 치명적인 변동사항이잖아! 메모지가 꽉 쥔 손아귀 안으로 사정없이 구겨졌다.
틀린 것 찾기와 다른 것 찾기. 틀린 것 찾기가 원본이 존재하고 수정본에서 오류를 찾는 활동이라면, 다른 것 찾기는 원본 없이 두 개의 사물을 대상으로 차이점을 찾는 활동이다. 그 말인즉슨, 틀린 것을 찾는 어둠에는 [원본 구역]이 존재하지만 다른 것을 찾는 어둠은 [원본 구역]이 존재하지 않는다. 활자 상으로는 고작 단어 하나 바뀐 것일 뿐이지만, 어둠의 핵심조건이 뒤바뀐 것과 다름없었다!
어지럽게 엉클어진 단서들이 하나씩 짜맞춰지자 저절로 입이 바짝 말랐다. 사헌은 바싹 마르기 시작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다면, 지금 제가 서 있는 이 공간은 [원본 구역]이 아니라 [이상 구역]이 된다. 뒤바뀐 전제조건에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사헌은 엄습하는 불안감을 애써 억누르고, 슬며시 고개를 들어 제 앞에 앉아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솔음이 부상자 이송에 소극적인 이유를. 이 공간이 [이상 구역]이라면, 어둠에 먼저 진입한 솔음은 충분히 눈치챘을 것이다.
이 남자가 바로 이상 현상이라는 것을.
들켰네?
그 순간, 남자의 얼굴이 기형적으로 뒤틀리며 꽃봉오리처럼 변하더니, 이내 꽃이 피듯 네 갈래로 갈라지며 사헌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괴생명체는 갑자기 허공에 붙들린 듯 잠시 멈칫하더니 곧 중심을 잃고 휘청였다. 그 틈을 타 사헌은 재빨리 몸을 날려 공격을 겨우 피했다. 끼에에엑-! 사냥감을 놓친 괴생명체가 울부짖었다. 꽃잎처럼 갈라진 살가죽에 톱니처럼 박힌 날카로운 이빨들이 딱딱 소리를 냈다. 시발, 뒤질 뻔 했다!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벌어졌을 참사에 사헌은 모골이 송연해졌다. 사헌은 넘어진 채로 신속하게 볼펜을 꺼냈다. 괴생명체의 머리에 볼펜을 겨냥하고, 재빨리 왼쪽 발 뒷굽을 두 번 두드리고는 그대로 볼펜 끝을 눌렀다.
펑!
펜촉에 맞은 괴생명체의 머리가 폭죽처럼 터지며 살점과 핏덩어리들이 컨페티처럼 튀었다. 삐- 하는 이명이 두개골을 관통하며 뇌를 쥐어짜는 듯한 통증이 일었다. 사헌은 파들파들 떨리는 손으로 얼굴에 튄 피를 훔쳐냈다. 피 묻은 손이 하얀 의료용 안대를 스치자 안대가 시뻘겋게 물들었다. 충격에 격양된 심장이 귓가에서 쿵쾅거리는 것만 같았다. 거칠게 숨을 들이쉬고 내뱉어도 쉬이 진정되지가 않았다. 씨발... 씨발...! 벌어진 입술로 욕설이 튀어나왔지만 사이렌처럼 골을 울리는 이명 때문에 제 목소리가 들리지가 않았다. 사헌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서 있는 솔음을 노려보았다. 쨍한 두통 사이로 씹어뱉듯 소리쳤다.
이 씹새끼가 나를 속여.
그 뒤로도 계속 쌍욕을 지껄였던 것 같은데, 제 귀에 들리는 말은 하나도 없어서 사헌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잃어버린 것다고 생각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소름끼치는 통증은 목 뒤를 타고 올라와 두개골을 쪼개려 들었다. 사헌은 살면서 이렇게나 발작 같은 두통을 처음 경험했다. 왜지? 왜 이렇게 머리가 아프지? 결국 머리를 감싸쥐며 바닥에 쓰러졌다. 바닥에 널브러진 사헌은 멍하니 천장을 응시했다. 흐려지는 시야 바깥으로 솔음이 천천히 다가왔다. 입을 뻐금대는 걸 보니까 뭐라 말하는 것 같은데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아, 목소리 문제가 아니라 청력이 문제였던 건가. 뒤늦은 깨달음을 얻으며 사헌은 정신을 잃었다.
*
얼굴을 때리는 차가운 공기에 부스스 눈이 떠졌다. 눈앞에 보이는 건 어쩐지 익숙한 뒤통수였다. 아무래도 누군가의 등에 업힌 것 같았다. 사헌은 멍하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언제 어둠에서 빠져나왔는지 깜깜한 하늘 아래 눈에 익은 거리가 펼쳐져 있었다. 불편한 승차감에 사헌이 몸을 뒤척이자, 사헌을 업은 형체는 잠시 멈칫하고는 사헌을 힐끗댔다. 슬쩍 뒤돌아 자신의 얼굴을 살피는 낯이 어딘가 익숙했다.
...김솔음?
자신이 업혀 있는 게 솔음의 등이라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사헌은 솔음의 목을 조르려고 했다. 목을 조여오는 사헌의 팔에도 안색 하나 변화 없던 솔음이 으름장을 놨다.
목 조르면 버리고 간다.
시발 누가 업어달랬냐? 버리든가.
그 말에 솔음은 사헌의 허벅지를 받치고 있던 손을 풀며 똑바로 일어섰다. 사헌은 그대로 주르륵 아래로 미끄러지며 맨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솔음이 진짜 버리라 하면 버리고 가는 새끼라는 사실을 사헌은 잠시 잊고 있었다. 개자식. 욕설을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키는데, 현기증이 일면서 눈앞이 어지러워졌다. 바닥에 발을 딛을 때마다 아스팔트가 치즈케이크처럼 부드럽게 뭉개지는 것 같았다. 휘청이는 사헌의 몸을 솔음이 단단히 붙들었다. 놔라 씨발... 어깨를 감싸는 솔음의 손을 사헌이 거칠게 뿌리쳤다.
걷지도 못하는 게 왜 자꾸 설치지...
......
진짜 죽고 싶나.
음산하게 중얼거리며 자신을 내려다보는 솔음의 시선이 싸늘했다. 금방이라도 이 길바닥에서 자신을 죽일 것 같은 기세에 사헌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얌전히 업히겠습니다.
사헌은 얌전히 솔음의 등에 다시 업혔다. 솔음의 등에 업힌 채 사헌은 스멀스멀 올라오는 비참함을 곱씹었다. 김솔음 때문에 죽을 뻔 했음에도 불구하고 화도 제대로 낼 수 없는 상황이 짜증이 났다. 오갈 데 없는 기 꺾인 분노의 자리는 빈정거림이 차지했다.
재밌었어요?
뭐가?
나 엿먹이니까. 살겠다고 대가리 굴리는 거 보니까 재밌었냐고.
왜 나한테 화를 내지?
......
D등급 어둠이라고 방심한 건 너잖아.
사헌은 입술을 깨물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솔직히... 방심했었다. 하지만 그 모든 상황이 이렇게 되도록 유도한 건 솔음의 의도도 있음을, 사헌은 놓치지 않았다.
부상자가 이상 현상이라고 얘기 안 해주는 게 사람 엿먹이는 거잖아 씨발.
...이상 현상이라는 확신이 없었어.
뭐?
그게 인간인지, 이상 현상인지 구분이 안 됐어.
솔음은 황당해하는 사헌에게 차분히 설명했다. 외계인의 시선으로는, 그 남자가 겉보기에 완벽한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었던 데다 아무리 건드려 봐도 별 반응이 없어(사헌은 이 대목에서 억울해졌다. 왜 나한테만...) 판단 근거가 부족했다고.
내가 지원 요청을 했던 건 그것 때문이었어. 부상자가 인간인지, 인간이 아닌지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거든.
......
그게 다야.
...그게 다라고?
그럼 무슨 말이 필요한데?
솔음이 되려 물었다. 어처구니가 없어진 사헌은 허, 하고 헛웃음을 뱉었다.
사원 목숨 우습게 아는 회사에서 고작 D등급 어둠 따위에 지원 인력을 2번이나 보내준다고? 지랄하지마. 어둠에서 뭔가 얻는 게 있으니까 지원 인력을 보낸 거겠지. 그래서 그쪽이 1차 지원 인력으로 파견된 거고.
난 내가 지원 인력으로 파견됐다고 한 적 없는데.
뭐?
뭔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내가 투입되기 이전 탐사팀의 수집기에서 지원 요청이 담긴 녹취록이 남아있었다는 건 사실이지만, 내가 이 어둠에 진입한 것과는 별개의 일이야. 난 변동된 어둠의 세부사항을 기록하고 새로운 클리어 방법을 알아내기 위해 투입됐으니까.
사헌은 기억을 더듬어 솔음의 말을 떠올렸다.
'실종된 탐사팀의 송환된 꿈결 수집기에서는 지원을 요청하는 내용의 녹취록이 남아 있었고, 그 후에는 보다시피... 내가 투입됐어.'
...솔음은 자신이 지원 인력으로 어둠에 투입됐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그저 투입되었다고만 말했을 뿐이다. 아니 무슨 말을 이렇게 애매하게 해? 분통이 터진 사헌은 주먹을 꽉 쥐었다. 결국 사헌 혼자 헛다리를 짚고 있었던 것이다. 뭔가 쓸만한 보상이 숨겨진 어둠인 줄 알고 내심 기대했던 마음이 한숨과 함께 바스라졌다. 그런데 허탈함만 남은 마음 속에 작은 의문이 피어올랐다.
그쪽이 정말로 이상 현상과 진짜 사람을 구분 못한다면... 왜 어둠에서 나를 만났을 때 의심하지 않았지? 내가 지원 인력인 척하는 이상 현상일지도 모르는 거잖아.
난 알 수 있어.
...어떻게?
느껴지거든. 너인게.
솔음의 말을 끝으로 침묵이 내려앉았다. 당황한 사헌은 말문이 막혔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지. 솔음을 향한 자신의 살기를 솔음이 감지해낼 수 있다는 걸까. 솔음은 외계인이니까 가능할지도 몰랐다. 사헌은 우수수 소름이 돋은 팔뚝을 쓸어내렸다. 기분이 이상했다. 솔음의 발언으로 사헌은 마음이 복잡해졌다. 공포인지 원망인지 아니면 그 이외의 것인지 모를 감정이 썩 내키지 않았다.
...미친 새끼. 만약 내가 지원 인력으로 투입되지 않았다면 어쩔 생각이었던 건데?
그래서 애초부터 너를 지원 인력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한 건데?
뭐?
이제보니까 사헌의 칼퇴와 월루를 가로막은 건 대리의 짬처리가 아니라 김솔음의 지명이었던 거다. 이젠 화를 낼 기운도 없었다. 전투의지가 상실된 자리에는 황폐한 흡연 욕구만 올라왔다. 사헌은 허무한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좆같네 진짜...
나 오늘 칼퇴할 수 있었는데...
초과근무 써.
누가 안 쓴대? 그쪽 탓하는 거잖아.
솔음은 대꾸하지 않았다. 사헌은 별 말이 없는 솔음의 무뚝뚝한 뒷통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구었다. 두통이 잔상처럼 남아 머리가 여전히 지끈거렸다. 아, 오늘은 꼭 퇴근길에 약국 들려서 두통약 사려고 했었는데... 사헌은 솔음의 등에 얼굴을 묻은 채 생각했다. 비릿한 피냄새가 났지만 그 끝에 은은히 남아있는 익숙한 섬유유연제 향이 포근하게 느껴져, 사헌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
괴담 전문 회사에 근무하는 사헌이 경험한 괴담 중 가장 공포스러운 괴담을 꼽자면, 사헌은 주저하지 않고 이 괴담을 꼽을 것이다.
직장인 괴담: 전날 몇 시에 퇴근했든 간에 정시 출근을 해야 한다.
어제 솔음의 등에 업혀 사택에 도착했을 때가 새벽 3시였다. 죽기 직전의 몰골로 겨우 씻고 침대에 누워보니 새벽 4시. 사헌은 잘 수 있는 시간을 계산하는 도중에 기절했다. 아침에 겨우 일어나 출근 준비를 시작했을 때, 솔음은 이미 출근을 한 뒤였다. 외계인은 잠도 없나... 사헌은 텅 빈 신발장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사무실에 도착한 사헌은 하품을 참으며 피곤한 낯으로 컴퓨터를 켰다. 정시가 가까워질수록 하나둘씩 사무실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제 얼굴을 보며 다들 한두마디씩 던지고 갔다. 사헌 씨 잠 못 잤어요? 사헌 씨 어디 아파? 사헌 씨 혹시 집안에 우환이... 네?
업무 시작 시간까지 시간이 조금 남아서, 사헌은 컴퓨터가 켜지자마자 초과근무 신청서를 작성했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돈이라도 많이 벌어야 했다. 하지만 사헌은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그 일이 살아가는 걸 방해하고 있다...
나이 먹고 기가 빠져서 그런가. 계란 한판을 진작에 넘은 F조 과장이 들으면 뒷목 잡을 생각을 하며 사헌은 습관적으로 복지몰에 들어가 아이쇼핑을 했다. 마침 연말 특가로 홍삼을 100p에 팔고 있었다. 사헌이 싱글벙글 웃으며 구매 버튼을 클릭하려던 그때, 가까운 곳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재빨리 컨트롤과 w 키를 눌러 탭을 끈 사헌은 업무를 하는 척하며 인기척을 낸 사람이 어서 빨리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백사헌.
별 생각 없이 뒤를 돌아본 사헌은 깜짝 놀라서 심장이 튀어나올 뻔했다. 아니 김솔음이 왜 여기서 나와... 사헌의 동요에도 솔음은 평소처럼 무표정했다. 얼굴에 묻은 피곤한 기색과 솔음의 손에 들린 수상한 비닐 봉지만 아니었다면 사헌은 솔음이 완전히 평소와 동일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설마 저 비닐봉지를 내 얼굴에 씌워서 질식시키려고...? 오랜 갈굼 경험으로 사헌은 극단적인 상상만 늘었다.
주, 주임님이 여긴 어쩐 일로...?
별 건 아니고, 줄 게 있어서.
그렇게 말한 솔음이 비닐봉지를 사헌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사헌이 벌벌 떨며 비닐봉지를 열어보니, 안에는 약이 들어있었다.
...이게 뭐예요?
두통약.
내가 몰라서 물어봤겠냐... 이걸 주는 당신의 목적, 생각, 용의, 의도, 속뜻을 몰라서 묻는 거다...
제가 뭘 잘못했나요...?
......
솔음이 진심이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만 사헌의 눈에 솔음은 이런 친절을 베풀 사람(외계인)이 아니라서 독살을 하려는 게 아닌지 의심부터 생겼다. 사헌은 눈알을 굴리며 솔음의 눈치를 봤다. 차가운 얼굴은 평소보다 조금 피곤해 보일 뿐, 어떠한 감정의 실마리도 담겨있지 않아서 그 속에 들어있는 돌연적인 사고회로를 알 길이 없었다.
두통 같은 증상은 한동안 계속될 거니까 약 먹어. 근데 시간 지나면 알아서 사라지니까 걱정 안 해도 돼.
...네?
솔음이 대뜸 알 수 없는 소리를 했다. 의사도 아니고 저게 뭔 소린가 싶어진 사헌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솔음을 올려다보았다. 솔음은 여전히 알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어 사헌은 솔음의 말이 진심인지 농담인지 알쏭달쏭해졌다. 사헌은 손에 들린 비닐봉투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 행동의 의미를 모르겠어서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그렇게 서로를 바라본 채 기묘한 침묵이 흘렀다. 사헌은 숨이 턱턱 막히는 침묵에 짓눌리며, 제발 누군가 말이라도 걸어서 이 분위기를 구제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순간,
어? 솔음 씨!
같은 층 사무실을 쓰는 옆 팀 주임이 끼어들었다.
여긴 어쩐 일이에요? 지난 탐사 이후로 오랜만에 보는 것 같네.
아, 네. 안녕하세요.
D조 요즘 엄청 바쁘다면서요. 피곤하죠? 솔음 씨 맨날 코 골면서 잔다고 여기까지 소문 다 났어요, 하하.
사헌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사람 좋은 척 웃으며 폭탄 같은 말을 뱉는 옆 팀 주임의 뒤통수를 갈겨 당장 기절시키고 싶었지만, 말단 사원의 신분으로 차마 그런 하극상 같은 행동(김솔음은 예외)을 할 수는 없었다. 주임의 말을 들은 솔음은 사헌의 아연실색한 얼굴을 힐끗 쳐다봤다. 얼굴 한 쪽에 진득하게 닿는 시선이 따가웠다. 차마 솔음의 얼굴을 마주 볼 자신이 없어진 사헌은 식은땀을 흘리며 먼산만 바라봤다.
그래요? 재밌는 얘기네요.
......
어디서 자꾸 그런 이야기가 도는 건지... 아무튼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잔잔한 미소를 지은 솔음이 대화를 매듭지었다. 폭탄을 던진 옆 팀 주임은 벌벌 떠는 사헌을 솔음과 남겨둔 채 그렇게 가버렸다. 사헌은 사형 선고를 기다리는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비명을 지르고 싶은 충동을 참아내며, 사헌은 이어질 솔음의 응징을 기다렸다. 방금 전과는 차원이 다른, 죽음과도 같은 침묵이 이어졌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사헌은 자신이 정말로 좆됐구나 싶어졌다. 솔음이 금방이라도 감히 헛소문을 퍼뜨린 자신의 죄를 죽음으로 다스릴 것 같았다. 그 순간, 작게 바람 빠지는 소리가 고개를 푹 숙인 사헌의 귀에 들어왔다. 어리둥절해진 사헌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이만 갈게. 오늘 수고해.
솔음은 그저 그 말만 남기고 떠나버렸다. 생명의 위협이 가신 사헌은 어안이 벙벙해진 채 자리에 앉아 생각했다.
...방금 웃었던 거 맞지?
*
가늠할 수 없는 미지가 예상 가능한 위기보다 위협적이다. 사헌의 오랜 지론이었다. 헛소문을 퍼뜨린 걸 솔음에게 딱 걸린 그날, 사헌은 사택에 돌아가면 솔음에게 잡도리 당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솔음은 놀랍게도 그 이후에도 사헌이 퍼뜨린 헛소문에 대해 일언반구조차 하지 않았다. 그때 보았던 솔음의 웃음은 분명 사택에서 자신을 어떻게 죽일지 생각하며 짓는 웃음 같았는데... 예상치 못한 솔음의 관용에 안도의 마음은커녕 오히려 불안해졌다. 솔음의 사고과정과 도출되는 행동양식을 도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헌이 솔음의 의도를 고심하는 동안, 솔음이 준 두통약에는 먼지만 쌓여갔고 둘의 관계는 미묘해졌다. 솔음이 사헌에게 두통약을 건넨 이후, 가끔 사택에서 마주치면 한두마디 나눌 정도로 둘의 사이가 발전한 것이다. 여전히 데면데면하긴 했지만, 예상치 못한 사고 이후 둘 사이의 교류가 완전히 냉각되었던 걸 고려하면 꽤나 장족의 발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며칠 째 계속되는 철야에 머리가 반으로 쪼개질 것 같은 두통을 참다 못한 사헌은 결국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서랍 깊숙히 넣어두었던 두통약을 꺼내 입에 털어넣었다. 사무실 의자에 깊숙히 몸은 파묻은 채 눈을 감고 죽음이 찾아오길 기다렸지만 이윽고 두통이 잦아들었다. 솔음이 자신을 독살하려던 게 아니라니. 사헌은 충격을 받고 한동안 멍하니 넋을 놓았더랬다.
그제서야 사헌은 솔음이 약을 건넨 의도가 어쩌면 호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통상적인 관계라면 의심치 않았을 보편적인 행동 의도를 사헌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것은 사헌의 철저히 본인 위주인 이기적 사고방식 탓(사헌은 이유 없는 호의는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 자신은 이유 없는 호의를 베풀지 않으니까!)도 있었지만, 그동안 솔음이라는 존재가 사헌에게 보여주었던 태도를 보았을 때, 호의는 솔음에게 있어 마치 실조된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왜 솔음은 제게 두통약을 주었을까? 사헌은 고민했다. 자신의 고통을 보며 도파민을 느끼던 그 김솔음의 태도를 바꾸게 한 것이 무엇일까? 그리고 사헌은 어떤 사건을 기점으로 솔음의 태도가 조금 묘해졌음을 깨달았다. 솔음의 표현에 따르면 사고, 사헌의 표현으로는... 이종교배. 싸패외계인 김솔음도 지 섹파는 챙겨준다 이건가? 아니 애초에 섹파가 맞긴 한가? 교배(...)는 그날 딱 한번 했으니까... 일련의 사고 흐름 끝에 다다른 건, 아주 강한 흡연 욕구였다.
그래서 사헌은 충동적으로 편의점에서 담배를 샀다. 새벽 2시에 롱패딩 걸치고 슬리퍼 질질 끌며 담배를 사는 사헌에게 알바생은 신분증을 요구하지 않았다. 오피스텔 옆 골목에서 대충 태우고 들어가려고 했는데 영하의 칼바람이 할퀴는 맨발이 너무 시려서 사헌은 사택으로 돌아갔다. 한 개비만 피면 괜찮다며 속으로 정신승리를 한 사헌은 발코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불을 붙이고 연기를 빨아들이니, 이 맛을 어떻게 그동안 잊고 살았나 싶었다. 담배를 입에 문 사헌이 어둠이 내린 밤거리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솔음이 방문을 열고 나왔다. 솔음은 어둠 속에서 빛나는 사헌의 담뱃불을 발견하고는 눈썹을 까딱이더니, 이내 발코니 문을 열고 들어왔다.
여기 금연구역인데.
......
나 비흡연자야. 배려 안 해?
사헌이 대꾸할 틈도 없이 솔음의 손이 가까워졌다. 이대로 멱살이 잡혀 기어코 솔음에게 한 대 맞겠구나 싶어진 사헌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거칠게 멱살을 잡아채는 손길은 없었다. 대신 온기를 품은 손가락이 입술을 스쳤다. 물고 있던 담배가 잇새에서 빠져나갔다. 사헌은 슬그머니 눈을 떴다.
내가 너 잡아먹냐.
타다 만 담배를 꺾으며 솔음이 피식 웃었다. 사헌은 멍하니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희미한 달빛이 스며든 냉랭한 인상의 얼굴이 웃으니까 꽤 봐줄 만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쑥 든 미친 생각에 사헌은 곧 불쾌해졌다. 그래서 괜히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며 말을 돌렸다.
안 자고 있었어요?
자려고 했는데, 어떤 미친놈이 집에서 담배를 피잖아.
......
들어가서 자. 잡생각 붙잡고 늘어져봤자 머리만 아프니까.
그 두통의 99.9%가 본인 때문이라는 자각은 왜 없는 건데. 사헌은 그렇게 중얼거리고 싶은 충동을 삼켜냈다. 요즘 자신이 생각이 많아진 건 또 어떻게 귀신같이 알고 저런 말을 하는 건지... 머쓱해진 사헌은 괜히 허전해진 입술을 문질렀다. 그러다 이내 스쳐지나가는 생각에 멈칫했다. 연기를 머금고 있던 입안이 근질거리는 것만 같아, 사헌은 결국 입을 열었다.
저 의식하세요?
뭐?
...그 일 때문에 저 의식하는 거면, 신경 안 써도 된다고요. 우리, 뭐 되는 것도 아니잖아요.
순간 솔음은 말문이 막힌 것처럼 보였다. 홧김에 속내를 뱉어버린 사헌은 후환이 두려워졌다. 황급히 발코니 문을 열고 쫓기듯 거실로 발을 내딛었다. 솔음의 대답을 들을 자신이 없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솔음은 사헌을 붙잡지 않았다. 생각에 빠진 뒷모습을 힐끗댄 사헌은 방으로 도망치듯 들어왔다. 방문을 닫고, 침대에 누운 사헌은 한숨을 내쉬며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아무래도 이 집에서 오늘 밤 잠들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 같았다.
*
[3000/80]
[5000/70]
씨발... 담배연기가 잇새로 한숨처럼 빠져나왔다. 피로에 찌든 눈이 부동산 어플의 매물들을 빠르게 스캔했다. 좁아터진 방을 어떻게든 넓게 보이려고 꼼수를 썼는지 사진 속 침대가 엿가락처럼 늘어져 있었다. 이딴 관짝같은 방도 원룸이랍시고 매물로 내놓다니. 이럴 때 보면 어둠이 무서운 게 아니다. 사람이 사는 집이라는 개념을 투기로 받아들이는 부동산 업자들의 탐욕이 무서운 거다. 사헌은 부동산 어플의 스크롤을 연신 내리다,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넣었다.
열심히 손품을 팔아본 결과, 사람 꼴로 살 수 있는 곳은 월세가 턱없이 비쌌고 월세가 괜찮다 싶으면 보증금이 1억이었다. 흡연 충동이 다시금 일렁거려, 사헌은 난간에 슬며시 기댄 채 담배를 다시 입에 물었다. 얼굴을 때리는 매서운 칼바람에 연기를 내뿜으며, 사헌은 지친 낯으로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서울에 집이 이렇게나 많은데, 제가 몸뚱어리 하나 누일 공간이 없다는 게 믿겨지지가 않았다.
사택이란 거, 존나 좋은 복지구나... 사헌은 턱을 괴며 생각했다. 그치만 독립하고 싶었다. 사헌이 그렇게 마음먹게 된 이유는 이전부터 그러했듯 솔음 때문이었다. 얼마 전, 홧김에 솔음을 떠보듯 뱉어버린 말 때문에 한동안 나름 괜찮아졌던 둘 사이의 분위기가 곱절로 이상해져버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사헌이 퇴근했을 때는 솔음이 자고 있거나, 솔음이 퇴근했을 때는 사헌이 이미 자고 있어 서로 얼굴 맞댈 일 없이 엇갈렸다는 점이었다. 그러다가도 가끔 현관을 나서는 솔음과 마주쳤을 때 어색한 고갯짓을 주고받다 보면, 사헌은 차라리 마음 놓고 솔음을 미워하던 시절이 그리워질 정도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사헌은 솔음이 준 두통약을 꼬박꼬박 먹었다. 사람(외계인)에겐 죄가 있어도 그가 준 물건에는 죄가 없기 때문에, 사헌은 이왕 받은 거 요긴하게 복용해주자고 정신승리를 했다. 그렇지만 사헌이 두통약을 물과 함께 목으로 넘길 때마다, 마음 한구석에서 감도는 불편한 기분은 무시할 순 없었다. 그 개운치 않은 껄쩍지근한 느낌을, 사헌은 예상치 못한 대상으로부터 원치 않은 호의를 받아, 얼떨결에 빚을 진 것 때문이라고 치부하기로 했다.
복잡한 생각에 빠져 있으니 뒷골이 다시 슬금슬금 땡겼다. 사헌이 고개를 푹 숙이며 양손으로 뒷목을 감쌌다. 생각해보니 며칠 전에 마지막 남은 약을 먹었던 것 같았다. 약을 먹는 동안에는 빌어먹을 두통이 잦아들어서 한동안은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바닥을 딛고 선 발이 아지랑이처럼 일렁였다. 분명 저는 가만히 서 있는데 사방이 울렁거리는 듯한 느낌에, 사헌은 잠시 주춤거리며 난간을 붙잡았다. 명백한 현기증이었다.
그렇게 사옥 하늘정원에서 찬바람 맞던 사헌은 얼마 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사무실에 돌아온 사헌에게 대리가 기다렸다는 듯 일감을 넘겼다. 탐사기록이 적은 D등급 어둠 매뉴얼 작성 업무라는 대리의 말에 가식으로도 좋은 표정이 나오지 않았다. 그런 사헌의 고단한 얼굴을 흘낏 본 대리가 선심쓰듯 말을 꺼냈다.
좆뱅이 치느라 힘든 건 알겠는데 얼굴 좀 펴 봐. 이번 탐사엔 동기도 같이 가던데 뭐.
...동기요? 누군데요?
먼저 말해주면 재미없지. 가서 확인해 봐.
사헌은 어쩔 수 없이 대리가 건넨 매뉴얼을 들고 집합 장소로 향했다. 엘레베이터를 타고 10층으로 내려가는 동안, 사헌은 입사 오리엔테이션을 함께한 얼굴들을 떠올렸다. 김솔음, 고영은, 강이학, 장허운. 기억에 남는 유력한 얼굴들 중 가장 달갑지 않은 건 단연코 김솔음이었다. ...설마 김솔음은 아니겠지? 사헌은 제발 솔음만은 아니길을 간절히 빌며 10층 회의실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회의실에 앉아 있던 영은이 어두운 얼굴로 인사했다. 탐사를 함께할 동기가 솔음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사헌은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비록 영은과도 썩 사이가 좋진 않았지만, 사헌은 입사 이후 영은이 이렇게 반가웠던 적이 없었다. 안녕하세요. 싱긋 미소짓는 사헌을 본 영은이 떨떠름한 미소로 화답했다. 아 네, 안녕하세요. 둘 사이의 어색한 기류에 한 남자가 파고들었다. 그제서야 남자의 존재를 눈치챈 사헌이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보자 남자는 멋쩍은 듯 미소지었다. 키가 작고 왜소한 체격의 남자는 사헌이 처음 보는 이였다.
이번에 입사한 Y조 신입사원 송윤조입니다. 부족하지만 잘 부탁드려요.
아, 네. 안녕하세요. F조 사원 백사헌입니다.
연말인데도 웬일로 사측에서 D등급 어둠에 3명을 붙여주나 했더니, 있으나마나한 인력을 붙여줬다. 윤조를 바라보던 사헌의 시선에 서린 흥미가 빠르게 식었다. 입사한지 얼마 안 된 신입사원은 한창 자신의 팀에서 트레이닝을 받아야 할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소속된 조 대신 자신과 영은 같은 주임 직급도 달지 못한 저연차와 함께 탐사를 보내는 건... 그저 팀을 사지로 떠밀겠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니면 D등급 어둠 매뉴얼 작성 업무를 할 사람이 저연차와 신입사원 뿐일 정도로 회사의 인력난이 심각하거나. 사헌은 사람 좋은 척 미소지으며 윤조에게 말했다.
윤조 씨, 들어가기 전에 잠깐 화장실 다녀올래요?
아뇨, 괜찮아요. 지금 딱히 화장실을 가고 싶진 않아서...
다녀오세요. 신입 중에 간혹 어둠 진입 직후에 실수를 하시는 분들이 있어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사헌의 압박아닌 압박에 윤조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회의실을 나섰다. 윤조가 나간 회의실 문이 닫히고, 영은과 둘만 남은 회의실에는 정적이 흘렀다. 정적을 깬 건 영은의 한숨이었다.
아니, 한창 트레이닝 받아야 할 신입을 주임도 없는 팀에 넣는 게 말이 되나요?
그러게요. 아무리 연말이어도 그렇지 이건 좀 심한데. 죽으라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요. 죽으라는 것도 아니고... 마무리팀을 소모적으로 대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정도가 지나쳐요.
사헌은 곧 영은과 자신의 핀트가 어긋났다는 것을 눈치챘다. 사헌은 마무리팀 신입을 붙여주다니 (나보고) 죽으라는 것도 아니고... 라는 의미로 말을 했지만 영은은 주임도 못 단 저연차들과 팀을 붙여주다니 (신입보고) 죽으라는 것도 아니고... 라는 의미로 말을 한 것 같았다. 그러나 사헌은 구태여 그 사실을 지적하지 않았다. 어차피 영은과 이렇게 한 배를 탄 이상, 영은과 척을 져서 좋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헌은 태연히 말을 돌렸다.
회사에 인력이 없나봐요? 탐사기록도 별로 없는 어둠에 우릴 투입한 걸 보면.
인력은 최근에 충원했다고 들었어요. 윤조 씨도 그 충원된 인력 중 하나겠지만... 아무래도 연말이라 고등급 꿈결 수요는 높은데 공급이 따라잡지 못해서 인력난이 심하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솔음 씨 말로는 최근 주임급 이상은 거의 C등급 이상 어둠만 투입됐다고 하더라고요. 아니면 미확인 어둠이거나.
...그래요?
영은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인물이 언급되자 사헌은 흠칫했다. 요즘 솔음이 사택에 얼굴을 비추지 않는 이유가, C등급 이상 어둠에만 투입되서였다니. 한 지붕 아래 살면서도 사헌은 꿈에도 몰랐던 이야기였다. 사헌은 타인의 입으로 듣는 솔음의 이야기가 새삼스러웠다. 그 싸이코패스가, 자신 아닌 남과는 꽤나 멀쩡한 척 교류를 하는구나 싶어서.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그렇게 열심히 C등급 어둠 탐사하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뒤지기라도 하면 더 좋을텐데, 라고 사헌은 생각했다. 솔음만 없으면 굳이 방도 안 알아봐도 되고, 사택에서 솔음 눈치만 찔끔찔끔 보고 있을 필요도 없어진다. 그런 효용을 생각하면 솔음의 장례식에 낼 부조금 따위는 아깝지 않게 느껴졌다. 그런 시커먼 속내를 감춘 채, 사헌은 대충 대꾸했다. 하필 연말이라, 솔음 씨나 윤조 씨나 참 안타깝게 됐네요. 그 말에 영은이 한쪽 눈썹을 까딱였다.
의외네요.
뭐가요?
사헌 씨라면 마무리팀이라 미끼로 쓸 사람 생겼다고 좋아할 줄 알았거든요.
영은의 말이 정확하게 맞았다. 사헌은 사실 영은의 말을 듣고 곧바로 사측의 의도를 파악했다. 등급은 정해졌으나 탐사기록이 적은 어둠의 경우 매뉴얼이 확립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많아 동급의 어둠보다 몇 배는 위험해진다. 매뉴얼 작성 업무가 까다로운 이유다. 그런 업무에 주임도 아닌 평사원을 둘이나 투입하는 건, 현재 연말특수로 고등급 꿈결의 수요가 증가하여 주임급은 더 고등급의 어둠에 투입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만한 평사원들 중 실적이 좋은 편인 자신과 고영은을 투입하고, 매뉴얼 작성 업무가 까다로운 점을 감안하여 미끼로 쓸 마무리팀 신입을 붙여줬을 게 뻔했다. 뜨끔한 사헌이 떫게 웃으며 대답을 하기 위해 입을 열려던 찰나, 회의실의 문이 열리더니 윤조가 들어왔다. 그 바람에 사헌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입을 다물었다.
매뉴얼이야 다들 이미 읽었겠지만, 신입도 있으니까 어둠 진입 전에 간단히 정리해볼게요.
화장실에서 돌아온 윤조가 회의실 의자에 앉자, 영은이 차분히 설명을 시작했다.
Qterw-D-9826
[심야일미식당] (작성중)오래된 이자카야 형태의 어둠. (탐사기록 9회까지 기록)
▶ 진입 방법
모바일 맵에서 <심야일미식당> 리뷰창의 통합 예약 링크를 클릭하면 진입 가능.
▶ 탐사 기록
- 탐사기록 #1
주문한 요리를 섭취하길 거부한 3인 전원 분노한 요리사의 칼에 사지가 잘려 사망.
- 탐사기록 #4
직원 3인이 이자카야의 메뉴 중 '모츠니코미'를 섭취한 직후 심한 식도 작열감과 복부 불편감 호소.
구토 행위를 통해 배출 시도하였으나 실패. (실행자: 김유화 사원, 시도 횟수: 2회)
구토 시도 직후 요리사가 주방 밖으로 나왔다는 심인철 주임의 외침 후 3인 전원 실종.
이후 심인철 주임의 이름으로 모바일 맵의 <심야일미식당> 리뷰창에 별 5점짜리 리뷰를 남긴 것이 확인됨.
<리뷰 내용>
심인철 ★★★★★
오래된 노포같은 이자카야입니다. 특히 모츠니코미가 맛이 좋습니다. 잡내가 조금 있는 마늘. 목이 타는 것 같다고 했더니 삐 소리의 원인은 머리통을 열어봐야 한다고 하품하면 강해지는 칩거 세력들이 나를 도청하고 있다. 그래서 울퉁불퉁 걸려 넘어진 톱날같고 입을 열면 비명을 지르고 뚜각뚜각 깎아내며 육즙이 많은 고҉기҉!҉҉ 고҉기҉ ҉고҉기҉!҉҉ 고҉기҉ ҉고҉기҉!҉҉ 고҉기҉ ҉고҉기҉!҉҉ 고҉기҉ ҉고҉기҉!҉҉ 고҉기҉ ҉고҉기҉!҉҉ 고҉기҉ ҉고҉기҉!҉҉ 고҉기҉ ҉고҉기҉!҉҉ 고҉기҉ ҉고҉기҉!҉҉ 고҉기҉ ҉고҉기҉!҉҉ 고҉기҉ ҉고҉기҉!҉҉ 고҉기҉ ҉고҉기҉!҉҉ 고҉기҉ ҉고҉기҉!҉҉ 고҉기҉ ҉고҉기҉!҉҉ 고҉기҉ ҉고҉기҉!҉҉ 고҉기҉ ҉고҉기҉!҉҉ 고҉기҉ ҉고҉기҉!҉҉ 고҉기҉ ҉고҉기҉!҉҉ 고҉기҉ ҉고҉기҉!҉҉ 고҉기҉ ҉고҉기҉!҉҉ 고҉기҉ ҉ !
사헌이 투입되었던 어둠 중 가장 짧은 매뉴얼이라고 할 수 있었다. 탐사 기록이 많으면 이를 바탕으로 대처할 수 있는 방안이 늘어나는데, 이건 뭐 거의 맨땅에 헤딩하는 꼴이었다. 의식하지 않아도 한숨이 저절로 새어나왔다. 매뉴얼을 넘기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는 사헌을 애써 무시한 영은이 입을 열었다.
어둠에 진입한 후에는, 단독 행동은 최대한 삼가해주세요. 특히 윤조 씨는, 무언가 판단하거나 행동하기 전에 꼭 저희의 의견을 묻고 행동해주세요.
네...
...서론은 이쯤하면 됐고. 이제 진입하죠?
사헌이 툭 뱉으며 핸드폰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영은과 윤조가 고개를 끄덕이며 가면을 썼다. 익숙한 산양 가면을 쓴 영은의 옆에는 윤조가 물고기 가면을 쓰고 서 있었다. 사헌까지 가면을 쓰자, 매뉴얼에 나와있는 대로 셋은 모바일 맵에 <심야일미식당>을 검색했다. 통합 예약 링크를 터치하자마자 눈앞에 장막이 드리워진 것처럼 깜깜해지더니, 다시 눈을 깜빡였을 땐 완전히 생소한 장소였다.
오래된 노포 같은 곳이라더니, 정말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것 같은 낡은 이자카야였다. 문이 열린 입구 앞에 선 사헌이 문 안쪽으로 한 걸음 내딛자 먼지 쌓인 나무 바닥이 삐그덕거렸다. 사헌은 삐그덕거리는 위치에 발을 올려 지그시 눌러보았다. 삐걱거릴 뿐이지 부서질 정도로 삭은 건 아닌 것 같았다. 사헌은 성큼 발을 딛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앞으로 향했다. 주변 탐사에 여념이 없는 사헌의 어깨를 영은이 붙잡았다.
단독행동은 안 돼요.
그냥 본 건데요. 혹시 무서우세요?
사헌의 말에 순간 영은의 얼굴에 질색하는 기색이 스쳤다. 그러나 곧 영은은 차분히 표정을 수습하고는 말했다.
...신입도 있잖아요. 웬만하면 떨어지지 마세요.
네, 네.
저, 저기 뭔가 있는데요...?
윤조의 말에 사헌과 영은은 투닥거리는 걸 멈추고 윤조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윤조가 가리킨 곳에는 앞치마를 맨 사람만한 목각인형이 서 있었다. 셋의 시선이 모이자 목각인형은 기다렸다는 듯 삐걱거리는 걸음걸이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이자카야 안쪽으로 안내하려는 듯 팔을 뻗었다. 영은은 침을 꿀꺽 삼키더니 목각인형이 안내하는 대로 따라갔다. 그 뒤엔 윤조가, 맨 뒤에는 사헌이 따라 걸었다.
이자카야 안으로 들어서자, 주방을 마주 보고 앉은 바 테이블이 펼쳐졌다. 그 뒤로 협소하지만 일행끼리 앉을 수 있는 테이블이 2개 있었다. 셋을 이자카야 안으로 안내한 목각인형은 마치 동작을 정지한 것처럼 제자리에 멈춰 섰다. 갑자기 멈춘 목각인형을 응시하는 사헌의 귀로 영은과 윤조의 대화가 흘러들어왔다.
갑자기 멈췄어요. 왜지...?
자리에 앉는 걸 기다리는 것 같아요.
아무 데나 앉아도 괜찮은 걸까요?
사헌은 이자카야 안을 둘러보았다. 자신들이 내는 인기척 외에는 이자카야 내부는 고요하기만 했다. 벽에는 형체를 알 수 없는 낡은 포스터들이 덕지덕지 붙어있었고 다른 한쪽 벽면에는 술로 추정되는 유리병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바 형식의 테이블로 둘러싸인 사방이 뚫린 주방은 직원도 없이 텅 비어있었다. 목각인형 혼자 운영하는 작은 업장인 모양이었다. 사헌이 목각인형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목각인형이 탐사기록에서 언급된 요리사인 것 같은데요?
아...
바 테이블에는 앉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 목각... 아니, 요리사가 우리 말을 알아듣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조심해서 나쁠 거 없으니까요.
...그럼 뒤쪽 테이블에 앉으면 되겠죠?
그렇게 말한 윤조가 조심스럽게 테이블로 다가갔다. 윤조의 손이 의자에 닿는 순간, 그때까지 가만히 서 있던 목각인형이 재빠르게 팔을 뻗어 윤조의 앞을 가로막았다. 갑작스러운 목각인형의 거부반응에 깜짝 놀란 윤조가 바싹 얼어붙었다. 굳어버린 윤조의 어깨를 잡아챈 건 영은의 손이었다. 영은은 윤조를 자신의 뒤로 숨기며 물었다.
괜찮아요? 행동하기 전에 저희한테 물어보라고 했잖아요.
아... 네. 감사, 아니, 죄송합니다...
사실 사헌은 윤조가 테이블에 먼저 접촉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야, 먼저 건드렸다가 잘못 건드리기라도 하면 손해니까. 사헌은 태연하게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팻말을 가리켰다.
아, 이 자린 예약석인가봐요.
예약석이라 쓰여진 팻말이 식기가 미리 차려져 있는 테이블 한가운데 보란듯이 올려져 있었다. 윤조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연신 사과하는 목소리가 시무룩했다. 사헌은 대꾸하지 않고 남아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앉아도 되나요? 목각인형에게 질문한 사헌이 조심스럽게 의자에 손을 올렸다. 그때까지도 목각인형은 가만히 서 있었다. 제지하지 않는 걸 보니 앉아도 되는 자리 같다는 판단이 섰다. 사헌이 의자에 앉자 그때까지 경계 어린 눈빛으로 목각인형을 주시하던 영은과 윤조도 그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모든 사람이 자리에 앉자 목각인형은 테이블 옆에 꽂혀 있던 메뉴판을 꺼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영은이 조심스럽게 메뉴판을 펼쳤다.
심야일미식당은 ■■■■년 생선을 활용한 간단한 요깃거리를 팔던 작은 식당을 시작으로, ■■■년 동안 제철에 맞는 각양각색의 식재료를 활용한 요리법을 집대성하여 지금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최근 유명 TV 프로그램 <브라운의 심야 토크쇼>에서도 소개될 만큼 많은 ■■님들의 사랑을 받고 있어, 이에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특별 행사를 준비하였습니다.
[TV 출연 기념 특별 행사]
■■ 해체 쇼
해체한 살점은 금일 심야일미식당에 방문해주신 모든 분들께 무료로 제공됩니다.
[제철 특선 메뉴]
고마사바 <<추천>>
고등어회에 참깨와 간장을 섞은 소스를 버무린 요리
니쿠토우후 니코미
두부에 고기와 쪽파를 올린 된장 베이스의 조림 요리
나가이모 야끼
일미만의 비법소스를 참마에 발라 구워낸 요리
[기타 메뉴]
메다마야끼 <<인기>>
일반적인 메다마야끼가 아닌 일미만의 재료와 방식으로 새롭게 탄생한 구이 요리
타코부츠
삶은 문어를 큼직하게 썰어 와사비와 간장소스를 곁들어 먹는 요리
아라비키 소시지
거칠게 다진 육류로 만든 소시지
[주류]
농축적혈구주 <<인기>>
신선동결혈장주
메뉴를 훑어내려가던 영은의 안색이 시퍼래졌다. 영은의 옆에 앉아 있던 윤조는 갑자기 말수가 없어진 영은을 의아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사헌은 첫번째 문단을 천천히 읽어보다, 영은의 시선이 닿은 곳으로 시선을 내렸다. 주류에 적힌 생소한 이름들. 하지만 일반적인 술이 아닌, 혈액과 관련이 있다는 것쯤은 사헌도 알 수 있었다. 역시 멀쩡한 이자카야는 아니다 이거지. 사헌은 옆에 가만히 서서 주문을 기다리는 목각인형을 힐끗댔다.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압박감이 다가와, 사헌은 괜히 뒷목을 긁적이며 말했다.
...뭘 시켜야 할까요.
그러게요. 탐사기록에 언급된 음식 메뉴가 아예 없어요. 전부 새로운 메뉴라니...
사헌은 기억을 더듬어 탐사기록에 언급된 음식 메뉴들을 떠올렸다.
- '스모츠'를 섭취한 직원(신재윤 사원)이 섭취 직후 급성 중독 증상(혈액 순환 부전, 경련) 보임. 구토로 배출 시도하였으나 발작을 일으키며 사망.
- '츠케모노'를 섭취한 직원(유민준 주임)이 섭취 후 복부 통증 호소, 수분 뒤 피를 토하며 사망.
- '사바분카보시'를 섭취한 직원(최수현 사원)이 섭취 후 약간의 오심을 호소하며 섭취 중단함. 이후 이자카야의 문으로 나가려고 하자 요리사에게 신체부위를 강탈당한 뒤 문을 열고 탈출. (신체부위: 안구)
글자만 한글이지 전부 일본어 발음을 그대로 적어놓은 이름이라 무슨 요리인지 헷갈렸다. 사헌은 고등학생 시절 제 2 외국어로 일본어를 선택해 공부했던 기억을 떠올리려 노력했다. 스모츠는 곱창 요리, 츠케모노는 채소절임, 사바분카보시는 고등어 요리... 각 단어와 한국어 뜻을 매치해보던 사헌의 머릿속에 깨달음이 하나 스쳤다.
고마사바를 시키면 돼요.
고마사바요? 왜죠?
탐사기록에 언급된 음식들 기억해요?
아, 아니요...
네. 모츠니코미, 스모츠, 츠케모노, 사바분카보시... 였었죠, 아마?
역시 머리가 좋은 영은은 매뉴얼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사헌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모츠니코미와 스모츠는 내장, 츠케모노는 채소, 사바분카보시는 고등어로 만든 요리에요. 앞서 언급된 사례들 중 음식을 먹고도 살아남은 경우는 재료가 고등어인 사바분카보시 하나 뿐이고요.
아, 그런 거였군요...!
감탄하는 윤조의 옆에서, 영은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사헌을 바라보았다. 사헌은 이 어둠의 테마가 이자카야라서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중식당이었으면, 그대로 전원 사망행이었을 거다. 중식은 재료도 다양하고 요리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으니까. 사헌은 고개를 돌려 목각인형을 바라보았다. 사헌의 시선에 목각인형이 삐걱거리며 허리를 숙였다. 사헌의 말을 경청하려는 듯한 자세였다.
고마사바 하나 주세요.
......
주문 끝입니다.
사헌의 말에도 목각인형은 허리를 숙인 자세 그대로 멈춰 있었다. 뭐가 문제지? 당황한 사헌이 목각인형에게 한번 더 말하려던 그때였다. 삐그덕, 삐그덕. 목각인형의 고개가 천천히 사헌 쪽으로 돌아갔다. 이목구비 없는 무미한 얼굴이 가까워졌다. 바짝 다가온 밋밋한 얼굴에 위협을 느낀 사헌이 몸을 움찔 떨었다. 주문을 잘못했나? 일본어로 말해야 하나? 쿵쿵 뛰는 심장박동 사이로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목각인형이 사헌을 뚫어져라 응시하듯 고개를 바짝 들이민 채 뻣뻣한 움직임으로 손을 들어 메뉴판에 가져갔다. 그리고 제철 특선 메뉴, 기타 메뉴, 주류라고 쓰인 글자를 한 번씩 가리켰다.
...각 메뉴마다 하나씩 시키라는 것 같아요.
그, 그렇군요...
죽, 죽는 줄 알았네... 식은땀을 흘린 사헌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시 평정을 되찾으려고 노력하며, 사헌은 메뉴판을 다시 쳐다보았다. 제철 메뉴는 시켰으니, 남은 건 기타 메뉴와 주류였다. 메다마야끼는 직역하면 눈알 구이지만, 일반적으로는 노른자를 터뜨리지 않은 계란프라이를 의미한다. 하지만... 이런 어둠에서는 정말 눈알 구이를 줄 것 같아 상상만으로도 속이 좋지 않아졌다. 사헌은 마음 속으로 메다마야끼를 제일 먼저 제외했다. 여기서 뭘 선택해야 섭취해도 죽지 않을 수 있지? 생각하자, 백사헌. 생각해.
이전의 탐사기록에서 왜 고등어 요리를 먹은 사원은 죽지 않았을까? 고등어 요리와 사망자들이 먹었던 요리에는 무슨 차이가 있지? 사헌은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모츠니코미, 스모츠, 츠케모노, 사바분카보시... 요리 이름을 되뇌이던 사헌이 잠시 멈칫했다. 그러다 메뉴판을 들고 메뉴의 이름을 쭉 훑었다. 아, 이제 알겠다. 깨달음을 얻은 사헌은 불안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윤조와 영은을 보며 입을 열었다.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정확한 재료를 알 수 있는 요리를 고르는 거예요.
...왜죠?
이전 탐사기록에서 사망자가 먹었던 요리를 떠올려 봐요. 모츠니코미는 일본식 곱창전골이고, 스모츠는 내장을 식초에 절인 거예요. 츠케모노는 채소 절임이고요. 하지만 이름만으로는 정확히 어떤 재료가 쓰였는지는 알 수 없어요. 막말로, 모츠니코미에 돼지가 아닌 사람의 창자가 들어갔다고 해도 알 수 없는 거죠. 츠케모노에 쓰인 채소가 독초일수도 있고요.
아, 이런...
하지만 사바분카보시는 달라요. 사바는 일본어로 고등어라는 뜻이에요. 요리의 이름에 재료의 이름이 명백히 표기되어 있어요. 이런 식으로 생각해보면, 기타 메뉴에서 골라야 할 음식은 명백하죠.
타코부츠. 타코는 문어니까?
네 맞아요.
윤조는 어두운 얼굴로 영은과 사헌의 문답을 조용히 경청하고만 있었다. 부쩍 말이 없는 윤조를 영은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괜찮아요? 영은이 묻자 윤조는 멋쩍게 중얼거렸다. 일본어를 모르면 영락없이 죽어야 하는 어둠이라니 끔찍한데요. 그건 사헌도 동의하는 바였다. 쓰잘데기없는 외국어를 남발한 메뉴판을 어둠에서도 봐야 한다니, 정말로 끔찍했다.
대충 어떤 요리를 골라야 할지 결정이 되고 나니 남은 건 주류 하나였다. 주류는 의외로 쉽게 해결되었다. 메뉴판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영은이 불쑥 말한 덕분이었다.
주류는 아무거나 시켜도 문제 없을 것 같아요.
왜요?
이전 탐사팀에서도 저희처럼 각 메뉴별로 하나씩 주문했을 거예요. 하지만 탐사기록에는 주류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아요. 그렇다면 답은 하나죠.
주류를 마셔도 별다른 이상이 없었기 때문에?
네. 사실 이것들은 주류도 아니고 혈액 제제니까요. 독을 타지 않는 한, 피를 마시는 것과 비슷하겠죠.
뭔가 알고 있는 게 있으신가봐요? 의료인?
영은의 태도로 보아 무언가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것에 대해 사헌이 꼬집자 영은이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변명처럼 내뱉었다.
아뇨. 대학만 그쪽으로... 어차피 다니다 전과해서 그냥 야매에요.
음, 그래도 아는 게 있으면 공유해야 하지 않나... 우린 지금 우리가 뭘 마셔야 할지도 모르는데.
그렇죠, 물고기 씨? 턱을 괴며 비아냥거린 사헌이 윤조에게 동의를 구했다. 바짝 긴장한 채 앉아 있던 윤조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영은은 인상을 살짝 찌푸리다,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수혈에 쓰이는 혈액제제들이에요. 워낙 다양한 혈액제제들이 있지만, 아주 간단하게 설명해드리자면, 농축적혈구는 혈장과 혈소판을 제거한 혈액이에요. 신선동결혈장은 혈소판을 제거한 뒤 혈장을 냉동시킨 제제고요.
둘 다 복용해도 별 문제는 없는 거죠?
생명이 위중해질 정도의 문제는 생기지 않을 거예요. 배탈이 날 순 있겠지만.
사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은이 의학 쪽 지식이 풍부하다는 꽤 쓸만한 사실을 얻어냈다. 더더욱 영은과 척을 져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하며, 사헌은 고개를 돌려 목각인형에게 말을 걸었다. 고마사바, 타코부츠, 농축적혈구주를 주문하자 목각인형은 그제서야 숙였던 허리를 피고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목각인형이 주방에서 요리를 시작하자, 조용했던 이자카야 내부가 조금 소란스러워졌다. 그제서야 영은은 긴장이 조금 풀린 듯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염소 씨가 일본어를 잘하는 줄은 몰랐는데요.
그냥 뭐, 수능 때 제 2 외국어로 공부했던 게 다에요.
...그래도 고마워요. 덕분에 메뉴를 선택할 수 있었으니까.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얼떨떨해진 사헌은 잠시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다 곧 표정을 갈무리하고 피식 웃었다.
순전히 추측일 뿐인데요. 나중에 원망하지나 마세요.
그러자 영은은 작게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사헌이 고른 요리를 먹고 죽는다고 해도 원망하지 않을 것만 같은 진실된 미소였다. 사헌은 그런 영은의 티끌 없는 선함에 속이 불편해졌다. 늘 생각했던 거지만 영은은 정말 자신과는 맞지 않는 부류의 인간이었다. 사헌은 시선을 피하며 주제를 돌렸다.
걸리는 건... 이 ■■ 해체 쇼인데, ■■이 뭔지 도무지 모르겠네요.
그게 뭐가 되었든 참치는 아닐 것 같아요...
소심한 윤조의 말에 영은과 사헌 둘다 고개를 끄덕였다. 해체 쇼 후 살점을 무료로 나눠준다고 했으니, 아마 먹어야 하는 건 ■■의 살점 또한 포함이겠지. 사헌은 생각했다. 지난 탐사기록을 살펴보았을 때, 먹은 요리를 토해내거나 요리를 먹지 않겠다고 거부하면 곧바로 능지처참행이었다.
- '사바분카보시'를 섭취한 직원(최수현 사원)이 섭취 후 약간의 오심을 호소하며 섭취 중단함. 이후 이자카야의 문으로 나가려고 하자 요리사에게 신체부위를 강탈당한 뒤 문을 열고 탈출. (신체부위: 안구)
다만, 이 탐사기록에서 탐사직원은 고등어를 먹었지만 곧바로 섭취 중단했다. 하지만 죽지는 않았다. 그러니 주문한 요리를 아주 조금 한입이라도 맛보기만 하면 적어도 죽음을 맞이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건 ■■의 살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다면, 탐사직원이 요리사에게 신체부위를 강탈당했다는 점이다. 정성껏 만든 요리를 남겨서 괘씸죄로 안구를 강탈당한 건지, 요리의 값으로 안구를 지불한 건지를 알 수가 없었다. 고민을 하니 머리가 서서히 지끈거렸다. 인상을 찌푸린 사헌은 이마를 짚으며 가만히 앉아있는 윤조를 힐끗 쳐다봤다. 마음만 같으면 윤조를 이자카야의 문 밖으로 내보내서 미끼로 써먹고 싶은데. 아마 그러면 영은의 반발이 심하겠지.
어디 아파요? 안색이 안 좋은데.
아, 두통이요. 요 근래 계속 그래요. 신경쓰지 마세요.
요 근래 계속이요? 증상은요?
그냥 두통에 뭐, 가끔 어지럽거나...
이명이나 현기증도 있나요?
아, 네.
최근에 과로하거나 스트레스 받을 일이 많았나요?
네. 어떻게 아셨어요?
사헌의 증상을 들은 영은의 표정이 조금 심각해졌다. 뭐지? 귀신같이 사헌의 증상을 정확히 짚어내는 영은의 질문에 사헌은 당황했다. 그런 사헌의 반응에 영은은 잠시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음, 제가 정식 의사도 아니고 이렇게 말씀드리기가 조금 조심스럽지만... 메니에르병 일지도 몰라요.
메, 메니 뭐요?
내이에서 발생하는 질환이에요. 스트레스가 심하면 발병하거든요.
...그, 그래요?
네. 물론 뇌쪽 문제일 수도 있지만... 아무튼 병 키우지 말고 시일 내로 빨리 병원 가세요.
...나 병 걸렸던 거야? 그냥 스트레스 때문인 줄 알았는데. 사헌은 조금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문득 두통약을 건네주던 솔음의 무심한 얼굴이 떠올랐다.
'두통 같은 증상은 한동안 계속될 거니까 약 먹어. 근데 시간 지나면 알아서 사라지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시간 지나면 알아서 사라지기는 개뿔이. 존버하다가 병 키웠다 새끼야... 사헌은 테이블 아래로 주먹을 꽉 쥐었다. 스스로가 우스웠다. 의사도 아닌 김솔음의 말을 정말로 믿기라도 한 거야? 하긴 외계인이 인간의 몸에 대해 뭘 안다고... 입안이 씁쓸해진 사헌은 작게 헛웃음을 지었다. 솔음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기분이 가라앉는다니. 어쩌면 자신은 솔음의 저주에 걸린 것일지도 몰랐다. 어둠 한복판에서도 솔음을 생각하며 기분 잡치는 저주 같은 거.
사헌의 상념을 깬 건, 삐그덕거리는 목각인형의 걸음 소리였다. 쟁반을 든 목각인형이 다가와 테이블 위에 주문한 요리가 담긴 접시들을 내려놓았다. 접시에는 참깨 소스가 뿌려진 고등어 회 몇 점과, 두껍게 썬 문어 조각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을 차지한... 검붉은 피가 담긴 유리컵도. 요리의 비주얼은 멀쩡했을 뿐더러 천만다행히도 양이 그리 많지 않아 보였다. 피는... 신선해 보이긴 했다.
이제 맛보기만 하면 되는데... 사헌은 젓가락을 집어들려다 옆을 힐끔거렸다. 목각인형은 주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무언가를 기다리듯 여전히 테이블 옆에 서 있었다. 영은도 목각인형을 의식했는지 금방이라도 체할 것 같은 얼굴로 젓가락을 집어들었다. 윤조는 겁에 질린 나머지 테이블 옆쪽으로 시선조차 두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불안한 듯 젓가락을 연신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왜 안 가죠?
먹는 걸 보고 가려는 것 같은데요...
진짜 토할 것 같다... 사헌은 테이블에 차려진 요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삼키면 빼박 오염행일 것 같은데. 다시 고개를 돌려 목각인형을 본 사헌은 목각인형이 내뿜는 무언의 압박감에 천천히 테이블 쪽으로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먹, 먹죠... 영은이 더듬대며 문어를 집자, 윤조도 고개를 끄덕이며 고등어 회 한 점을 집었다. 어차피 먹어야 한다면 그나마 리스크가 낮은 농축적혈구주를 먹는 게 낫지 않나. 생각을 마친 사헌이 재빨리 피가 든 유리컵을 잡았다. 그 순간, 낯선 손이 사헌의 손목을 턱 붙잡았다. 으악! 깜짝 놀라 그 자리에서 튀어오를 뻔한 사헌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손의 주인을 확인했다. 사헌의 손목을 붙잡은 목각인형이, 다른 손으로 테이블에 차려져 있는 요리를 천천히 손가락질했다. 음료 말고 요리를 먹으라는 이야기 같았다. 꼼수를 쓰다 딱 걸린 사헌은 얼떨떨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순순히 유리컵을 놓자 목각인형도 사헌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내키지 않았지만 사헌도 결국 작게 썬 문어 한 조각을 집었다. 젓가락을 쥔 손이 작게 떨렸다. 목각인형의 매서운 시선 아래, 셋은 음식을 입에 넣었다. 그래, 삶고 데친 문어가 이상해봤자 얼마나 이상하겠어... 정신승리하며 입에 들어간 문어를 깨무는 순간, 사헌의 표정이 겉잡을 수 없이 썩어들어갔다. 머리털 하나하나가 쭈뼛쭈뼛 일어서는 맛이었다. 식감은 잘게 자른 고무 타이어인데, 맛은 무슨 한여름의 기온에 잔뜩 상한 생선 내장 같았다. 사헌은 저와 마주보고 앉아있는 영은의 얼굴을 살폈다. 영은 또한 씹으면 씹을수록 표정이 굳고 있었다. 그 옆에 앉은 윤조는... 안색이 새하얘진 채 더는 씹지도 못하고 굳어 있었다. 셋이 먹다가 셋이 돌연사해서 맛집인가 싶었다.
하얗게 질린 셋이 겨우 요리를 꿀꺽 삼켜내는 것까지 지켜본 목각인형은 다시 주방 안으로 들어갔다.눈앞에서 목각인형이 사라지자마자 셋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미친듯이 기침을 했다. 결국 눈물이 고인 영은이 휴지로 눈가를 문질러 닦으며 말했다.
정신이 오염될 것 같은 맛이었어요...
사헌은 고개를 끄덕이며 오른쪽 눈에 고인 눈물을 훔쳐냈다. 맛은 기절할 정도로 없었지만 모두 이렇게 멀쩡한 걸 보니 메뉴를 잘 고른 것 같았다. 영은과 사헌이 한숨 돌리려는데, 그때까지 안색이 좋지 않은 윤조가 돌연 헛구역질을 했다. 화들짝 놀란 영은이 윤조를 돌아보며 물었다.
괜찮아요? 설마...!
요, 요리가 잘못된 건 아닌데, 제가 비위가 약해... 우욱!
구토하는 시도만으로도 죽을 수 있다. 화들짝 놀란 사헌은 고개를 돌려 주방 쪽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목각인형은 설거지하느라 바빠 윤조가 헛구역질을 하는 걸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사헌은 티슈를 잔뜩 뽑은 뒤 윤조가 구토를 하기 전에 윤조의 입에 틀어막듯이 갖다댔다.
물고기 씨, 좀만 참아볼 순 없어요? 여기서 토하면 우리 다 죽어!
안 보이는 곳에서 하면 괜찮지 않을까요?! 화장실이라든가...!
어둠에 무슨 화장실이 있어요?! 분출하지 말고 삼켜 그냥! 어차피 당신 위장에서 나온 건데!
염소 씬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예요?!
영은과 사헌이 투닥대는 동안 윤조의 안색은 시시각각으로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결국 밀려오는 토기를 참지 못한 윤조가 사헌과 영은을 뿌리치고 술이 진열된 벽면 옆 공간으로 뛰어들어갔다. 그 유약했던 신입이 맞나 싶을 정도의 힘에 뿌리쳐진 사헌과 영은은 순간 벙쪄 얼빠진 사람처럼 그 뒷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건 사헌이었다. 씨발! 이대로 구토한 걸 들키면 뒤진다! 사헌은 살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윤조가 뛰어들어간 공간에 따라 들어갔다. 믿을 수 없게도 사헌의 눈앞에 펼쳐진 건 화장실이었다.
성인 남자 두명 정도가 간신히 서 있을 수 있는 크기의 협소한 화장실에는 칸이 하나 밖에 없었다. 사헌이 잠긴 칸에 조심스럽게 노크했다. 구역질하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새어나오며 위액 특유의 시큼한 냄새가 나 사헌마저도 속이 좋지 않아졌다. 시발... 사헌은 이자카야로 통하는 화장실 문을 닫았다. 문에 기댄 채 식은땀에 젖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손바닥에 내뿜어진 한숨이 뜨뜻했다.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멍청한 신입 때문에 상황이 엉망진창이 됐다. 지금 당장 뒷덜미를 잡아채고 이자카야 밖으로 던져서 어떻게 되는지 미끼로 쓰고 싶을 지경이었다.
사헌은 잠시 마음을 가다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세면대 위에 작은 스프레이가 놓여 있었다.
~아팠던 첫사랑의 향기까지도 탈취해드립니다~
...탈취 스프레이 맞지? 문구를 읽어보면 대충 맞는 것 같았다. 어차피 화장실에서 이런 냄새를 풍겼다간 미친 요리사에게 들키고도 남는다. 상황에 딱 맞는 아이템이 운좋게 나타나줬으니, 기꺼이 사용해줘야지. 사헌은 윤조가 들어가있는 칸 쪽으로 탈취 스프레이를 뿌렸다. 스프레이 자체의 냄새는 없었지만 화장실 내부에 진동하던 토사물 냄새가 확실히 사라졌다. 사헌은 안도하며 스프레이를 주머니에 넣어 챙겼다. 사택에서 요긴하게 써야겠다, 라고 생각하면서.
물고기 씨, 추스르고 나오세요. 너무 오래는 있지는 말고요. 요리사가 의심할 테니까.
사헌은 그 말만을 남기고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초조한 얼굴로 앉아있던 영은이 사헌이 돌아오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물고기 씨는요? 괜찮아요?
다행히 저쪽에 화장실이 있더라고요. 문을 잠가서 못 들어가긴 했는데... 암튼, 처리하고 있어요.
...그래도 다행이네요.
다행은 무슨 다행...
사헌이 팔짱을 끼며 중얼거렸다. 저걸 들키는 순간 다 황천길행인데. 그 말에 영은의 낯이 어두워졌다. 영은은 할 말이 있는 듯 잠시 입술을 달싹이다, 이내 크게 숨을 내뱉고는 말했다.
그, 사실... 염소 씨랑 물고기 씨가 화장실에 가 있을 때 말인데요.
네.
요리사가 수상한 기색을 눈치챘는지 염소 씨와 물고기 씨가 들어간 곳으로 가려고 하길래, 그걸 막으려고 요리를 더 주문했어요. 문어로요. 고등어 회는 물고기 씨가 먹고 탈이 났으니까...
아.
산 넘어 산이었다. 사헌은 지금만큼 강한 흡연 욕구를 느낀 적이 없었다. 미안해요. 생각나는 방법이 이것밖엔 없었어요. 사과하는 영은의 목소리는 귓등으로도 안 들렸다. 머리로는 영은의 판단이 옳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걸 또 먹어야 한다니. 상황이 삽시간에 이렇게까지 꼬여버리는 건 또 처음이었다. 기력이 빠진 사헌은 쓰러지듯 자리에 앉았다. 단순히 먹는 행위가 문제가 아니었다. 얼마나 먹어야 하는지, 먹는다면 그 이후에 어떤 값을 치뤄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상황에서 짊어지는 리스크가 너무 큰 선택이었다.
일단 알겠어요. 문제는 저희가 이 어둠에 대해 아는 게 정말 없다는 거예요. 탈출 조건조차도 제대로 모르잖아요 우린.
...탐사기록에 적힌 탈출 사례는 지금까지 총 2건이었죠.
영은이 씁쓸하게 대꾸했다. 영은의 말대로 탈출 사례는 총 2건이 기록되어 있었다.
- 탐사기록 #5
'사바분카보시'를 섭취한 직원(최수현 사원)이 섭취 후 약간의 오심을 호소하며 섭취 중단함. 이후 이자카야의 문으로 나가려고 하자 요리사에게 신체부위를 강탈당한 뒤 문을 열고 탈출. (신체부위: 안구)
- 탐사기록 #8
투입된 직원 중 5성급 호텔 레스토랑 부주방장 출신 사원(김수아 주임)이 주문한 '레바육회'에서 잡내가 난다며 요리사에게 항의.
주방 밖으로 나온 요리사에게 고기 잡내 잡는 법을 알려주고 3인 전원 탈출.
탈출 후 김수아 주임의 주머니에서 <감사합니다> 카드 발견됨.
...영은과 사헌 중 그 누구도 5성급 호텔 레스토랑 부주방장 출신이 아니었으니, 요리 노하우를 전수하는 방법으로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렇다면 남은 건 이자카야의 문으로 나가는 방법인데, 아마 필연적으로 신체 부위 손실이 뒤따르는 방법일 게 분명했다.
신체부위를 요리사에게 강탈당한 이유가 뭘까요? 요리를 전부 먹지 않아서?
이자카야에서 먹고 마신 값을 신체부위로 지불하는 것일 수도 있겠죠.
...<눈먼 자들의 저택>에서 처럼요?
영은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같은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사헌은 영은이 가진 공포의 근원을 잘 알고 있었다. 정말로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왔다는 섬뜩한 느낌. 자신의 생명은 결국 거대한 위협 앞에서 바람 앞의 촛불 신세였다는 자각에서 흘러나오는 무력감 같은 것들. 사헌은 눈을 질끈 감았다. 정말로 이대로 꼼짝없이 죽어야 하는 건가? 무슨 방법이 없을까? 가망 없는 의문들 속 떠오른 건 우습게도 솔음이었다. 막다른 길에 내몰리고 나서야, 사헌은 솔음이 아쉬워졌다. 항상 탁월한 방식으로 어둠을 헤쳐나가는 김솔음이.
하 씨발... 사헌이 이마를 짚으며 중얼거렸다. 진짜 학습능력이 없는 건가 나는. 왜 하필 이럴 때 김솔음이 생각이 나고 지랄이지.
그때, 영은이 상념에 젖은 사헌의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
염소 씨! 물고기 씨가 아직도 화장실에서 나오지 않은 게 이상해요. 확인을 좀 해봐야 할 것 같아요.
영은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러고보니 윤조가 아직도 화장실에서 나오지 않고 있었다.
우리 둘 다 자리를 비우면 요리사가 의심할 거예요. 제가 자리를 지킬 테니, 염소 씨는 물고기 씨가 괜찮은지 좀 봐주세요.
...알겠어요.
사헌은 곧바로 화장실로 향했다. 목각인형의 시선을 의식하며,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이동해 화장실의 문을 열었다. 윤조가 들어가 있었던 칸은 여전히 잠겨 있었다. 사헌은 잠긴 칸의 문을 두드리며 윤조를 다급하게 불렀다.
물고기 씨! 자요? 여기서 자면 안 돼요! 일어나라고!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사헌은 윤조의 이름을 부르며 문을 두들기는 걸 멈췄다. 대신 가만히 서서 칸의 문에 귀를 대어보았다. 소름끼치는 침묵이 흘렀다. 씨발. 설마. 안돼. 등골이 오싹해지며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사헌은 있는 힘껏 문을 몸으로 들이받았다. 몇 번 강하게 문을 몸으로 들이받자, 낡고 헐거워진 경첩이 삐걱대며 어긋났다. 사헌은 심호흡을 한 후, 잠시 문에서 멀리 떨어졌다가 있는 힘껏 달려들어 문을 들이받았다. 쾅! 요란한 소리와 함께 칸의 문이 부서지듯 열리며 내부가 드러났다. 그리고 사헌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아무도 없는 텅 빈 칸이었다.
사헌은 멍하니 아무도 없는 칸 안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진짜 좆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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